현리 전투는 6.25전쟁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전투야. 
지금까지도 1개 군단이 괴멸된 국군 최대의 패전과 3군단이 해체되고 전작권을 미국에게 양도하게 만든 전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두고두고 회자되고 꽤나 많은 루머가 진실인양 인터넷에 퍼져있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패전의 책임이 오롯이 당시 3군단장이였던 유재흥에게만 몰려있는 현재 평가와 인터넷에 많이 알려진 루머들을 조금이나마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어.

1부 목차
1. 현리전투란?
2. 주요 사단 편제
3. 미 8군의 정보 판단
3-1 미 8군의 방어 계획

1. 현리전투란?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5월 공세 당시 중동부전선을 방어하는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중공군의 8개 군단에 맞서 치른 방어전을 지칭함

2. 주요 사단 편제

미 제 10군단-애드워드 알몬드 소장
7사단: 사단장-김형일
3.5.8 연대 예하부대로 편성

국군 제 3군단-유재흥 소장
3사단: 사단장-김종오
18.22.23 연대 예하부대 편성 
9사단: 사단장-최석
28.29.30 연대 예하부대 편성


3. 미 8군의 정보 판단
미 8군은 4월 22일부터 4월 29일까지 전개된 중공군의 4차 공세를 저지하고 5월 7일부터 공세를 시작해 5월 9일에는 김포반도-봉일천-의정부-가평-춘천-인제-속초에 해당하는 미주리선을 점령했어. 

이때 UN군 지휘부는 5월 이전의 공산군 배치 상황을 근거로 공산군의 차기 공세는 서부 또는 중부 전선에 주력이 집중되어 이루어질것으로 판단하였는데.
여기서 미 8군 사령관이 중동부 전선으로 중공군이 공세를 가하지 않을것이라 판단한 근거는 유엔군과 공산군간의 휴전협상에서 공산군측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서울을 포기하지 않을것이라 생각한게 첫 번째이고 
그동안의 공세에서 공산군이 보여줬던 한계점은 보급문제이였던것을 근거로 도로망이 열악한 중동부 전선으로 공산군의 주력이 집중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게 두 번째야

그러나 항공정찰을 통해 공산군의 대규모 병력이 개성-연천 방면에서 화천-양구 지역으로 이동하고있는 것과 대규모 보급차량 행렬이 매일 반복되고있는 정황, 소양강의 교량 가설 등 중동부전선으로 예상되는 공세 징후를 포착했고 또 4월 공세 이후 사로잡힌 포로들이 일관적으로 중공군이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있다는 진술을 하는것이였어
이에 미 8군 사령관 벤틀리트는 미주리 선에 대한 전 군의 진격을 중지시키고 5월 13일 기하여 소양강-설악산에 새로운 방어선을 건설하고 원거리 정찰대를 파견하여 정확한 공세날짜를 포착하려 애를 썼어

3-1 미 8군의 방어 계획

미 8군은 너무 늦게 예상 공세 지역을 포착하여 사단의 이동이 가능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제대로 방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동부 전선을 향해 중공군의 주력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예하 부대에 전해지면 최 전선의 장병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최악의 경우 대량 탈영의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어

이에 미 8군과 미 10군단은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는데 미 8군은 미 1군단의 예비대인 미 3사단을 8군에 배속시켜 군 예비대로 전환했고 미 10군단은 기존의 방어계획을 그대로 유지하여 대규모 공세를 펼친 공산군이 험준한 동부 산악지역에서 스스로 공세 종말점에 도달하게 만들어 아군의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할 계획이였어. 
특히 미 8군의 작전 계획은 4차 공세와 달리 철수와 지연에 염두를 주지 않고, 준비된 방어 진지에서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것으로 계획을 했고. 이에 미 8군은 전 전선에 5400개의 지뢰와 다중의 철조망, 지형을 이용한 방어진지를 유개호로 서로 연결함으로 통신과 보병들의 협조에 용이하도록하였으며 진지와 장애물들을 준비한 후에 방어계획을 검토하고 예행연습을 실시하는 등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의 방어준비를 했어

2부에서...


참고 
ㆍ中共軍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 국방구 군사편찬연구소 ㆍ현리전투(중공군 5월 공세)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ㆍ6.25전쟁기 중공군 5월 공세에 대한 전투 사적 고찰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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