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김일성과 만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pt.1 195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외교가 직면한 문제 http://gall.dcinside.com/m/war/581652
앞선 글에서 1940~60년대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외교가 직면하던 문제점에 대해 간략히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외교의 점진적 전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냉전기 세계적 정세 변화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은 한일기본조약 등, 여러가지 노력으로 자유진영 우방국들과의 관계 재정립에 성공하였지만,
여전히 세계의 절반은 소련과 중공 그리고 그 두 국가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이었고,
1940~60년대 대영제국, 프랑스제국, 미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제 3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외교전에서는 북한과의 경쟁에서 열세에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조금씩 변화의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NATO와 WTO(바르샤바 조약기구) 사이의 경쟁관계, 좀 더 직설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경쟁관계가 표면적으로 크게 누그러졌으며,
두 거대 체제 혹은 국가 사이의 관계가 개선된 것처럼 보이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런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체제를 데탕트 체제라고 하는데,
이 시기 제 1세계 자유국가들과 제 2세계 사회주의국가들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큰 충돌과 경쟁 없이 온화한 양태를 띄었습니다.
핑퐁 외교라고 불리는, 그리고 때로는 팬더 외교라고도 불리는,
그런 미중 사이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외교 관계를 수립하며 중국이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소련의 경쟁 대상으로 떠올랐고,
유럽공동체와 일본의 부상으로 자유진영 내에서 미국의 독보적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 3세계 연맹이 힘을 받으며 자유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양극단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떠오른 것처럼 보였으며,
동시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도 직접적 충돌을 피하는 나름의 묘수들과 양국 사이의 암묵의 규칙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시기 세계는 미국과 소련, NATO와 WTO에 의해 양분되어 극한대립하던 1950~60년대와는 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물 밑 현실은 시궁창이었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데탕트 시대에 대한 글에서 다루도록 하고요.
이렇게 표면적 다극체제가 정착하고, 자유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이에 표면적 긴장관계가 완화되자 대한민국의 외교 또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기본적으로 1970년대 초부터 진행된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의 변화의 방향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960년대까지 지속되던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쟁과 적대 스탠스를 완화한다.
2. 대미관계 중심의 외교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외교적 교류의 다변화를 시도한다.
3. 하지만 경제적 이권, 외교적 우군 형성을 위한 북한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속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이 수정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데탕트로 말미암아 유연한 외교 정책의 수립이 가능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유진영에 속한 국가로서 행해야 했던 의무들이 상대적으로 헐거워졌고,
이는 대한민국이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약간이나마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즉, 더이상 미국 등 다른 자유국가들에 발맞추어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척을 질 필요가 없어진 것이죠.
그리고 같은 시기 사회주의권이나 제 3세계권에서도 외교 정책이 약간이나마 완화되며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 수정이 가능해졌습니다.
두번째로 6.25 전쟁의 기억이 상대적으로 흐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6.25 전쟁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대한민국의 외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이는 대한민국의 중국, 북한, 소련과의 관계는 물론,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과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부모님을 쏴죽인 김철웅이나 동생을 강간한 후자오쯔, 그리고 이들이 이런 일을 하도록 지원한 알렉세이는 물론이고,
할아버지를 산산조각내버린 152mm 야포탄을 만든 공장에서 일하던 폴란드의 여직공 산드라,
형의 다리를 깔아뭉개 불구로 만든 T-34 전차의 엔진과 궤도를 만든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렉터 기술자 보얀,
동생을 폐인으로 만든 후자오쯔가 먹고 다니던 공여 식량을 생산한 헝가리의 아니타까지,
6.25 전쟁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국민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들과 우호관계에 있는, 혹은 협조하는 국가와 사람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적으로 취급되었고요.
하지만 시대가 흐르며 아픔은 잊혀져 갔고,
1960년대의 경제 개발기를 거치며 국민들의 관심사는 과거의 복수가 아니라 현재의 먹거리와 미래의 윤택한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외교 전략에서 더 이상 강경한 적대 정책이 아닌, 어느 정도 유화된 정책을 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유연한 정책은 북한과의 동시 수교를 희망하는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정책이었고,
원론적으로 소련, 중국, 북한, WTO 가입국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상호 간에 냉랭했고, 수교 또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198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외교의 숙제가 되었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시기의 경제적 변화도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의 변화를 야기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중동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OPEC가 형성이 되며 찾아온 1973년의 제 1차 오일 쇼크가 있었습니다.
제 1차 오일쇼크는 당시 산업화를 추진하던, 특히 중화학 공업의 육성을 시도하던, 대한민국에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당시 중동 산유국들에게 대한민국은 친미-친이스라엘 국가로 인식되고 있었고,
이 때문에 OPEC의 원유 생산 쿼터 도입과 원유 수출 가격 통제, 그리고 비OPEC 산유국들의 동조와
뒤이은 이슬람권 산유국들의 친이스라엘 국가들에 대한 보복성 수출입 조치들은 비정상적 인플레이션 위기 등 대한민국 경제에 큰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이에 대한민국은 기존의 대중동 정책에서 미국,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중시하던 것에서 탈피하여,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 알 사우드 가문이 통치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등,
중동 제3세계 산유국들을 대상으로 한 외교 역량 강화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나중에 2000년대부터는 한국이 부패한 중동 독재자들과 붙어먹는다는 욕도 먹고 있지만, 뭐 그건 나중의 일이니...)
그리고 동시에 1960년대 한일수교, 파독 광부와 간호사, 베트남전 참전 등으로 모은 외화를 밑천삼아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의 성과가 서서히 나타난 것이 이 시기인데,
이는 경제적 요인 중 국내적 요인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197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북한에게 뒤쳐지는 최빈국이었으나,
1970년대 초 북한의 1인당 GDP를 따라잡음으로써 더 이상 경제적으로 북한에게 속된 말로 "쫄릴 것"이 없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다만, 시장 구매력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외교 정책에 본격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빠르게 잡아도 1980년대이고,
실질적으로 장기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1997년 터진 IMF 사태가 수습된 2000년대 초반부터의 일이니,
이 시기 국내 경제의 변화는 대한민국의 외교전에 더이상 북한에 쫄을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줬다는 수준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변화 속에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에 점진적 변화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1972년 있었던 7.4 남북공동성명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측근 중앙정보부장이 6.25의 주범이자 북한의 통치자인 김일성을 접견한 것은 물론,
무력 통일과 극한 대립이 아닌 평화통일과 민족 공영을 선언하는 선언문을 남북의 지도자가 동시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해석의 차이로 동상이몽이 된 성명문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7.4 남북공동성명과 데탕트의 기조, 세계적 정치-경제-문화 환경의 변화 아래 대한민국의 외교 전략은 점진적 수정기를 거치게 됐습니다.
북한과 수교 및 협력 관계에 있던 중동과 동남아의 제3세계 국가들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었고,
대한민국의 묵인 아래 호주 등 몇몇 제1세계 국가들이 북한과 수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제3세계 신생 국가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한국이 아닌 남한과 북한 둘 다와 동시 수교를 하는 경우가 꽤 증가하였고요.
하지만 이런 점진적 변화를 추진하던 대한민국의 외교정책은 1980년대 초중반에 터진 일련의 사건들로 다시 한 번 변곡점을 맞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들은 1970년대의 점진적 외교정책의 변화와도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다음 파트의 재미있는 부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80년대가 뭐있더라... 3세계 외교/아웅산, 이란-이라크, 또 뭐 생각이 안나네
KAL기 폭파, 88올림픽 등등등 더 있음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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