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 봉쇄와 폭격으로 인해 일본 경제는 이미 전쟁 말기에 대부분의 생산활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여기에 군수생산 중심의 기존 전시경제의 구조적 문제와(전쟁이 끝났으니 군수물자를 생산할 이유가 없다) 패전 이후 일어난 한국과 중국 출신 징용 노동자들의 귀향이 겹치면서 일본 경제는 시민들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생산활동의 위축에 겹쳐 일본 경제를 위협한 또 다른 악재는 초인플레이션이었다. 1945년 8월의 물가를 100이라고 할 때 이듬해 3월의 물가수준은 1184.5에 달했다. 반년만에 12배가 오른 것이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의 주원인은 밀린 전쟁부채의 청산이었다. 압류 보상금, 구조조정 유도금, 군인적금과 전쟁공채를 포함하여 1945년 8월에서 11월까지 일본 정부가 개인과 기업에 지급한 전쟁부채는 중일전쟁 시작부터 패전까지 일본이 지출한 총 군비의 1/3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266억 엔-이었다. SCAP(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전쟁부채의 지급 중단을 명령한 1946년 중순에 일본 정부는 여전히 섬유업계 공장 징발 보상금으로만 120억 엔을 빚지고 있었다.
전쟁부채의 지급과 관련한 입장차는 일본 정부와 SCAP간 분쟁의 주원인이기도 했다. 재벌, 국영기업과 상공성에 주로 분포한 혁신파 관료들(이들은 전시 일본경제를 이끈 주된 세력이기도 하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전범이라고 말하는 일본인의 대다수는 이들을 일컫는다)은 이러한 부채 지급을 중단할 경우 전 산업계의 운전자금이 말라 버려 결국 생산량 감소와 더 큰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들은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생산량 확대에 총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차 요시다 내각(1946년 5월-1947년 5월)에서 대장대신 직위에 있었던 이시바시 탄잔은 대표적인 생산 우선주의자였다. 그는 현재 일본 경제의 문제는 생산 설비와 노동력의 과잉이라고 주장하며, 생산량 확대만이 경제 위기의 해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대부분의 혁신파 관료들의 시각-가격 메커니즘보다 투입과 결과를 우선시하는-과 일치하였다.
SCAP는 이러한 일부 관료들의 입장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특히 일본은행과 외무성(전시 내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제주의적, 고전주의적인 시각을 견지하였으며 군부로부터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의심을 받으며 탄압받았던) 관료들 역시 생산 증대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데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1946년 7월 일본 정부가 SCAP의 명령에 의해 전시 부채 지급을 중단하자 혁신파 관료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더욱 빠른 속도로 치솟자 일본 정부는 복구금융위원회를 설립하고 재건은행이라는 새로운 기관을 통해 자본 공급을 재개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 정부는 공단이라는 일종의 공기업을 통해 주요 상품에 대한 공급을 통제하고 생산을 촉진하는 다양한 수단들을 적용하였다. 임시물자수요조정법(1946년 9월 30일)에 의해 지명된 상품들은 오직 공단과 석탄처(석탄은 특히 중요한 물자로 취급받았으며 별도 기관에서 관리하였다)만이 취급할 수 있게 하였다.
석탄처의 활동을 살펴보면 이들이 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알 수 있다. 석탄 생산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 부족이었다. 석탄 노동의 상당량을 담당하던 한국과 중국 징용 노동자들이 돌아가면서 석탄 생산량을 원래대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였고, 노동력 확충을 위해 석탄처는 일정량의 식량 공급을 요구하였다. 또한 석탄은 주요 산업의 필수 자원으로써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특히 철강과 식량은 그 자체로 석탄의 최대 소비처중 하나인 동시에 석탄 생산에 필수적인 자원이었다. 하지만 전후 석탄 생산량의 대다수는 민간용으로 소모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민간 소비로는 산업 생산량 증대는 요원한 목표였다. 상공성은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전시와 같은 경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임시물자수요조정법(이하 법)이었다.
입법과 동시에 일본 정부는 경제안정본부(ESB)를 설립하여 주요 물자와 자본 이동에 대한 전면적 통제를 재개하였다. 설립 당시 일본 경제는 전쟁부채 지급 중단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소수 핵심 분야-석탄을 포함한-에 주요 자원을 집중하여 이들 상품의 생산을 증대시키는데 총력을 가했다. 자본과 외화, 주요 자본재들은 법에 의해 ESB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이들 자원은 전적으로 우선순위 자원의 생산에 투입되었다. 1948-49년 일본 정부 재정의 20퍼센트가 석탄을 비롯한 ‘핵심 분야’의 생산자 가격 보전에 사용되었다.
일명 ‘우선순위 생산’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방법은 확실히 효과를 발휘하였다. 석탄 생산량은 1946년의 2280만 톤에서 1947년 2930만 톤, 48년의 3479만 톤으로 증가하였으며, 전체 광공업 생산량 역시 47-49년 사이 70퍼센트 증가하였다.
문제는 역시 인플레이션이었다. 요시다 내각이 사퇴한 이후 집권한 카타야마 내각은 1947년 11월이면 인플레이션이 안정되고 전 국민이 암시장을 통하거나 빚을 지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였다. 1947년 10월 도쿄 지방법원의 판사 야마구치 요시타다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써 암시장을 쓸 수는 없다’는 유서를 남긴 채 굶어죽은 사건은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선순위 생산이 계속될 수는 없다는 공감대를 전 국민 사이에 형성하였다.
인플레이션과 함께 일본 경제의 지속석을 해치는 또다른 문제는 무역수지 적자였다. 비슷한 상황의, 비슷한 정책을 사용한 다른 국가들(마치 한국의 1950년대를 보는 듯한)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구조였다. 석유와 식량, 목화를 비롯한 일본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들은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ESB는 이들 원조 물자들을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정해진 환율로 정해진 공단과 민간에 분배하였다. 미국의 국제 정책에서 일본의 위상이 달라짐에 따라 미국은 하루빨리 일본의 경제적 자립을 달성할 것을 SCAP에 요구하였고, 이 요구에는 당연히 균형수지 달성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SCAP는 일본 정부의 ‘우선순위 생산’과 같은 막가파식 행태에 대해 분개하였으며, 결국 균형재정을 강요함으로써 일본 경제를 다시금 불황의 늪에 빠뜨리게 된다. 이러한 불황은 한국전쟁 발발과 그에 따른 수요 급등 전까지 지속되었다.
후속편도 쓰도록 노력해봄. 여유가 된다면 말이지......
참조: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