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적으로 볼때, 대규모로 인명 손실이 난 역사적 사건들을 들면 항상 순위권 안에 드는것이 바로 명 제국의 몰락입니다. 일차대전이나 몽골 제국에 거의 버금간다고 할 수있을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심지어는 사천 지방에선 고대 사천인들의 핏줄이 남지 않았다고 말해질정도였었죠. 

 중국사에서 늘 제국의 몰락과 새 제국의 성립은 자연한것이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유독 명청교체기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것은 미묘한 일입니다만, 이에는 아주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장헌충같은 살인광의 발광이나, 악에 받친 청군 휘하 한인 팔기들의 만행등. 

 이번 글에서 다룰것은, 후자에 속하는것입니다.





 명제국은 확실히 멸망한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최후의 황제 숭정제는 북경에 남아 자살했고, 그의 뒤를 이을 아들들 역시 모두 잡혀 척살당했습니다. 

 이자성은 한때 옛 대제국들의 수도였던 양겅중 한곳인 장안에서 대순제국을 선포했으며, 장헌충은 사천땅에서 대서제국을 선포했으며, 청은 마침내 산해관에 입관하여, 대륙을 장악하기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관중의 장악은 제법 순조로웠습니다. 오삼계군의 인도를 받는 청군은 군기가 해이해진 이자성의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고, 베이징에 들어섰으며,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했습니다.

 이에 맞서야할, 남명의 잔존세력은 참으로 한심한 상태에 처해있었습니다. 애초부터 복왕 주유승과 노왕 주상방중 누구를 황위에 올릴지부터 동립당과 환관당으로 갈리어 미친듯이 물고 뜯었으며, 겨우 겨우 노왕 주상방을 홍광제로 올린 그 순간에도 조정은 조선의 그것은 애교로 보일정도로 붕당이 갈리어 서로 잘근 잘근 씹어대었고, 기껏 황제가 된 홍광제는 술이나 쳐먹고 쎾쓰나 하면서 좆망 직전인 남명의 상황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홍광제라는 인간의 침소에선 대체 뭔짓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녀가 하룻밤에 두셋씩 죽어나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당대 강남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남명 조정엔 강남의 꽃이라고 불리울만한 소주가 있었으며, 그 옛날 홍무제가 명제국을 세웠던 남경이 있는 양주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남경의 성곽은 매우 탄탄했고, 형식적이나마 조정도 일부 남아있었습니다. 그냥 빤스만 들고 런한 수준인 동진이나 남송보단 훨씬 좋은 조건이었는데, 남명 조정은 그 모든것을 가지고도 일을 말아먹고 있었죠.


 강남의 위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던 청제국은 나름 남진을 주저하고 있었으나, 정말이지 병신 그자체인 남명을 보고 강남 원정의 결심을 굳힙니다 그리하여 청 조정은 남명 정권을 인정하지 않음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숭정제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기위해 이자성을 쫓고 있었는데 남명은 병사 한명도 내어 주지 않는다. 에라이 쌍놈들아. 거기에 니네들 숭정제 유지도 못받았잖아? 니네 황제 신하들 까고 백성들에게 투덜대는 유서 남겼지 후계자 관련으론 한마디도 안했단다? ㅉㅉ 정통성 없는 새끼들...' 정도가 그들의 발언 내용의 요약이었죠.

 이름높은 청의 명장,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움직였습니다. 한인들을 편입해 수가 훨씬 더 불어난 청군도 남으로 진격했습니다.

 


 청군은 콧노래를 부르며 진격했습니다. 아, 사실 콧노래를 부르진 못했습니다. 은근히 힘들고 거친 여정이었거든요. 처음엔 모든것이 순조로워 많은 땅들이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로 손아귀에 들어왔지만, 가면 갈수록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미치광이 살인광 장헌충의 군대는 어쨌건 끈질기게 저항했으며, 명의 사족들도 나름의 군대를 꾸려 저항했고, 명군의 파편도 일부는 조정이 병신인것과는 상관없이 열심히 싸웠습니다. 사가법이나 정성공같은, 척계광의 후예라고 불러야 마땅할 명 최후의 명장들도 남명측에 있었고요.





 그래도 청군은 아득바득 이 모든 저항을 뚫고 진격했습니다. 한인들의 머리를 빡빡 깎아 그들의 군대에 편입시키거나 아니면 죽여버리는 식으로 말이죠. 적의 구분이 어려워 어쩔수가 없다는, 마치 빨치산 때려 잡는다는 핑계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죽여댄 나치독일의 그것과 비스무리한 핑계를 대며, 그들은 걸리적거리는것은 모두 죽여버리며 진군했습니다.


 이런 급박한 시기에, 남명 정권은 여전히 뻘짓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은 숭정제의 아들, 헌민태자 주자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나, 홍광제는 여전히 살이나 찌고 있고, 환관 마사영은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장군들의 군대를 빼돌려 수많은 패배를 유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마침내 청군은 양주성에 도달했습니다. 그전의 많은 성들은 - 남명정권에 질려버린 장군들이 머리칼을 자르고 투항하는 식으로 그럭저럭 손쉽게 넘어왔고 양주성이 버텨낼 가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주성을 지키던 명의 최후의 명장중 하나인 사가법은, 투항할 마음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남명정권은 분명히 부패했고, 홍광제는 분명히 무능한 작자였습니다. 사가법 역시 이 부패한 조정덕분에, 사가법의 지휘를 받으며 양주성을 지켜야 했을 십만의 군대는 다른 장군에 맡겨졌다가 순식간에 흩어져버렸으며, 그 외에도 많은 조정의 견제를 받으며 상당한 고생을 했었죠.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남명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족을 조금 달자면, 그는 후대인의 시각에서 보아도 그럭저럭 존경스러운 사람입니다. 양주성 공방전때도, 청의 군대를 견제하기위해 수공을 퍼붓자는 제안에, '백성들이 죽는다. 백성 다음이 바로 사직이다.'라는 말을 했었죠. 물론, 그의 행동의 선의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중국사에도 손꼽을만한 대학살을 일으켰다는점은 조금 씁쓸하긴 합니다.


 그는 양주성을 침공해온 도르곤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투항하라는 제안을 무시하고, 대포를 갈기며 처절하게 저항했습니다. 자신들에게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어떻게 청군이 치워버리는지 대강 알고있던 명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합심하여, 사가법의 지휘하에 싸웠습니다. 


 



 그러나... 양주성의 저항이 무심하게도, 결국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사가법은 도도에게 붙들려가, 항복을 종용받았으나 거절하고 처형당했죠.

 

 그리고, 성의 함락과 동시에 오랜만에 겪어보는 격렬한 저항으로 짜증이 잔뜩 난 청군이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악명높은 양주 십일의 시작이 됩니다.


'이때, 성곳곳에 불이 났는데, 가깝게는 십여 곳, 멀게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붉은 색 불빛이 서로 비추는 것이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고, 타닥 타다닥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울렸다. 거기다 공격당해 부상 입은 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끊어지다 이어지다 하는 애처로이 돌보는 소리들, 그 처참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 양주십일기. 첫날의 부분.


 청의 기록은, 이 모든 일을 '우리 병이 머물기를 10일, 이를 도(屠 - 죽일 도)했다.'라고 간결하게 기록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이 문장은 너무나 파렴치해보일정도로 잔인한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갑자기 부인네 중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나의 친구 주서(朱書)兄의 두 첩실이었다. 나는 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두 첩실은 모두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살이 밖으로 드러났고, 발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무릎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중 한 첩실은 여아 하나를 그때까지도 안고 있는데, 만주병이 발각하고서, 채찍을 휘둘러 아기를 때리고는 뺏어서 진흙탕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병사 하나가 칼을 빼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병사 하나는 긴 창을 가로쥐고서 뒤에서 몰고, 병사 하나는 중간에 자리잡고 사람이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십 사람을 마치 양떼를 몰 듯, 조금이라도 주춤대면, 즉각 채찍질이요, 혹은 바로 죽여버렸다. 부녀자들은 긴 밧줄에 목이 매이어 줄줄이 구슬이 꿰어진 듯하고, (발이 작으므로) 한 발 걷고 한 번 넘어지고,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거리에는 온통 버려진 아기들 천지인데, 혹은 말굽에 짓밟히거나 혹은 사람 발에 밟히거나 하여, 간뇌가 쏟아져 온 땅을 덮을 지경이고, 울음소리가 온 들을 가득 채웠다. 개울 하나와 못 하나를 지나는데, 그 안에 시체가 쌓였고, 팔다리가 서로 포개졌고, 핏물이 흘러들어가 물빛이 울긋불긋 대여섯 갈래가 되었고, 못은 시체로 메워져 평평해졌다.' - 양주십일기. 이틀째의 부분.


'도중에 목격한 것이, 어지러이 널린 시체가 산더미요, 핏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혹한 지경이라 한다. 또 들은 얘기가 王씨 성의 어떤 군관어르신이 우리동네 소양(昭陽)李씨 집에서, 돈 수만으로 매일 난민을 구조하고, 그 부하들이 살인할라치면 왕왕 말리곤 하여, 그런 식으로 살려낸 자가 상당수라 한다. 이날 밤 슬피 흐느낀 끝에 잠에 깊이 빠져들었다.' - 양주십일기. 넷째날의 부분. 


 중국 역사 최악의 학살은 대략 이런 식으로 행해졌습니다. 

 물론, 저항은 매우 심했고, 청의 병사들은 매우 많이 죽었으며, 당연히 화가 날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것도, 이런 대량 학살을, 80만이 죽었다고 말해지는 학살을 정당화 하지는 못합니다. 사가법의 저항은 중국의 세계관으로 볼땐 당연한것이었으며, 죽어나간 민간인들은 그저 무력한 민간인이었을뿐입니다.

 양주십일은, 그저 청이 저지른 비열하고 잔혹한 악행이었을 뿐입니다. 단순히 숫자로 치자면 난징대학살보다 정도가 더 심했지요.


 청 조정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이 참혹한 학살의 기록을 생생히 담은 양주십일기의 출간을 철저하게 막았으며,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 책을 볼 기회가 없었지요.

 하지만 먼훗날, 청의 유학생들은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출판된 이 양주십일기를 읽게 되었고, 반청의식을 키우며 멸망흥한을 부르짖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만주족의 정권은 붕괴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지요.

 악행을 저지른 청제국은 수백년 후에나 댓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할까나요....






 또다시 사족으로, 양주십일기를 보다보면 상당히 입에 쓴웃음을 짓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병사에게 애걸하여 수중에 넣는데,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이, 수치를 몰랐다. 나는, 병사의 칼을 빼앗아 이 요사스런 물건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여기 병사가 훗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려를 정복할 때에, 고려 부녀자 수만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당당 중국이, 수치를 모르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오호라, 이게 바로 중국이 대란을 당하는 이유이다.' - 양주십일기. 둘째날.


출처 : http://contrite.tistory.com    -  맹물국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