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세계최종전쟁을 위하야 만주국을 동아시아의 다섯 민족이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오족협화가 실현된 왕도낙토로 만들기 위해 만주사변을 주도한 망상가 이시와라 간지, 그는 만주국 건설에 깊이 개입한 후 대좌로 진급해 육군병기창 사령관, 센다이에 주둔한 보병 제4연대장을 거쳐 육군참모본부의 핵심 보직인 작전과장에 이르러 2.26 사건 진압을 진두지휘하며 커리어의 절정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육군 내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이시와라는 1937년에 관동군 참모장도 아닌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육군참모본부에서 나와 다시 관동군으로 6년만에 돌아가게 됩니다.


오랜만에 관동군으로 온 이시와라는 매우 빡쳤습니다. 이시와라는 만주국이 오족협화가 실현된 왕도낙토로 만들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며 관동군에 있을 때 항상 현지인들을 대등하게 대하라고 신신당부 했었는데, 관동군 장교들은 조선인, 만주인, 중국인, 몽골인을 아랫사람으로 부리며 "지배자 민족"의 위치에 도취되어 행패나 부리고 있었던 겁니다. 자기 이상의 실현은 커녕 만주국이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분노한 이시와라는 관동군 장교들이 오족협화를 실현하지 않는 세금도둑들이라며 관동군 장교 전체의 월급삭감을 열렬히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관동군 전체가 이시와라에게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편 당시 관동군 사령관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장교 부인들의 사교클럽을 건설할 특별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시와라는 이게 뭔 예산낭비냐며 그 예산 당장 삭감하라고 주장하여 도조의 분노를 샀습니다. 이시와라는 결국 관동군 부참모장에서도 밀려나 일본 본토의 보병 제16사단장이 되어 그걸로 군생활 끝냈습니다. 이후 라츠메이칸 대학의 교수가 된 이시와라는 도조를 "도조 삼등병"이라고 조롱하지만 결국 무시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