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모에서 미사일까지5

국산 무기개발 비화 KT-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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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명. KT-1이 사업 완료되기까지 수많은 연구․기술 인력이 개발현장을 오고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86명이란 KT-1 개발사업에 3년 이상 노력을 기울인 연구개발진 인원이다. 하지만 이 사업은 출발부터 많은 인력이 투입돼 규모있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격동의 80년대를 맞은 국방과학연구소는 뼈아픈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했다. 많은 연구인력이 퇴직 하고 기구를 개편한 가운데 기술사업단 기술 분석실 아래 공군사업담당 부서가 83년 신설됐다. 인원은 겨우 4명뿐.




90년대 초까지 KT-1 개발을 위한 사업의 책임을 맡아 지휘한 강위훈 박사와 유일하게 사업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이수용 연구원(50․현 고정익항공기체계 팀장)은 여기에서 실장과 연구원으로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강박사와 이수용 팀장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71년 당시 이수용 팀장은 서울대 항공공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강박사는 이때 서울대에 강사로 출강했고 이팀장은 졸업 때까지 3과목을 강박사에게서 수강했다. 이팀장이 73년 졸업 후 공군장교로 임관, 공군사관학교에서 항공공학을 강의하는 교관이 되자 강박사는 공사의 학과장으로 부임해왔다.


4년여의 복무를 마친 이팀장은 78년 국과연의 연구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내 손으로 항공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당연한 포부를 가진 공학도에게 있어서 국과연은 최선의 길이었다. 당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고 해봐야 그 진로란 항공사 정비계통이나 자동차회사 설계팀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인 79년 강박사는 공사에서 국과연으로 소속을 옮기게 되었다. 서로 다른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인연의 끈은 83년이 되자 마침내 두 사람을 공동의 운명으로 묶어주었다. 국과연 구조조정으로 인해 생겨난 공군사업담당 부서에서 또다시 만나게 된 것.


공군사업담당 부서는 인원이 4명에 불과한 신설 부서. 더욱이 공군으로부터 뚜렷한 개발 요구가 없는 상황이었다. 강박사는 이수용 연구원에게 기초연구과제를 부여했다. 공군의 향후 항공기 소요에 대비해 항공기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며 국내 항공기 개발가능성 판단을 위한 조사연구를 시작하도록 한 것이다.




조사결과, 90년대 초가 되면 장기취역하고 있는 공군의 지원기급 항공기가 구조강도 저하와 부품 수급 등의 이유로 대체 항공기 소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됐다. 따라서 90년대 중반 이면 개발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아래, 기술요구도가 낮으며 향후 공군 소요가 예상되는 초등훈련기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83년에는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소요기술을 분석하고 개발대상으로 정한 초등훈련기의 유사기종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항공기 형상설계는 84년부터 시작됐다. 이때 형상모델은 기체의 단순화에


역점을 둔 탓에 그 외형이 직선적이었다. 최대속도를 200kt(약 360㎞)를 목표로 420마력 짜리 엔진을 탑재하는 훈련기 형상이었다.


85년이 되자 국과연은 또 한차례 조직개편을 실시, `항공기체계실'을 구성했다. 연구인력도 보완됐으며, 항공기 개념설계를 분야별로 세분화하는 등 더 구체적인 업무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설계목표 성능에 있어서 최대속력을 250kt로, 장착엔진도 550마력으로 상향조정 했다. 또한 항공기 날개는 공기역학적 특징이 우수한 테이퍼(taper)형으로, 동체는 유선형으로 각각 변경했다.


연구진은 86년까지 훈련기 외에 연락기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도록 4인승 항공기를 설계해 나갔다.


국과연이 그동안 유도무기와 무인항공기를 개발하는 가운데 항공역학에 대해 부분적으로 기술과 자료를 축적했다고는 하지만, 유인항공기 전체 시스템에 대한 설계 통합기술과 설비는 전무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연구진의 어려움은 클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항공기의 설계기준을 설정하는 자체가 가장 중요한 업무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군사규격과 연방항공법을 참고해 분야별로 적용할 항목과 내용을 설정해 나가도록 했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막연할 때가 있었다.


항공기 개발에 필수적인 풍동 실험실도 없었다. 그나마 인하대에 설비된 실습용 풍동실험실을 빌려 항공기에 미치는 공기의 영향 등을 실험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시기까지를 볼 때 국과연이 항공기 개발에 본격 돌입한 것은 아니다. 개념설계 단계였다. 국과연이 최소한 시험용 항공기라도 제작해보는 `탐색개발' 단계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공군으로부터 `개발해 달라'는 소요제기와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