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벨트에 의해 계속 추진되던 소련의 대일전 참전 권유 정책에 대해 트루먼 행정부가 처음부터 회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소련의 비타협적 태도와 과도한 참전 대가 요구(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에서 참전 대가에 대한 윤곽이 확정되었으며 1944년 10월 모스크바회담에서 구체 논의)에 실망하였던 미 군부 내에서는 소련의존전략에 대한 회의론은 꽤 오래 전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1944년 7월 11일 미 합동참모본부(약칭 합참) 승인 전쟁계획에 의하면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 동안에 보니스와 류구에 상륙한 후 1945년 10월 1일에 큐슈 진공이 이루어지며 1945년 12월 말까지 동경에 진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소련작전을 필수조건으로 하지 않았다.14) 또한 합참의 11월 연구서에서도 “소련의 참전이 없어도 일본의 패망은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실한 신념이 있다”고 주장되었다.


1945년 4월에도 큐슈작전을 수행하여 일본을 항복시킬 경우 소련 참전이 꼭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아래와 같이 개진되었다. 이러한 남으로부터의 공격전략이 채택된다면 특히 소련이 대가를 요구하면서 끝까지 공여하기를 주저하던‘시베리아기지 설정 및 쿠릴열도를 경유한 보급선의 개통’ 작전은 전보다 중요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더이상의 값비싼 양보를 통하여 소련 참전을 유도하기보다는 자국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미국에 유리한 객관적 전황 호전이 이런 자신감을 낳게 했던 것이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측근 정보장교들이 4월 12일 작성한 소위 “대령들의 보고서”에서는 이 분위기가 극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미․영의 군사 능력상타국의 도움 없이도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수 있으므로 소련 참전은 군사적 의의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이 보고서 결론이다. 또한 막판에 가담할 것이 명백한 소련 참전을 촉진시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참전을 막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지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므로, 더 이상의 양보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를 지연시키는 것이 차선책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주장이 계속되었다.


"소련의 아시아전 참전은 세계를 동요시킬 중요한 사건이며 그 악영향은 앞으로 여러 代를 두고 미칠 것이다. … 소련은 어차피 그들이 원할 때 참전할 것인데, 대일 참전의 가능성이 분명한 소련에게 미국이 독자적으로 불필요한 양보를 한다면 중국․한반도․만주는 각각 아시아의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될 것이며 이는 대서양헌장과 세계평화에 대한 반역행위가 될 것이다."


4월 16일 딘(John R. Deane) 소장이 모스크바에서 협의차 워싱턴에 귀임했을 때 모스크바 주재 미 군사자문단은 미․소 협력문제가 이미 미국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를 밝히면서 시베리아 기지 설치의 백지화를 건의했다. 이들은 4월 17일부로 군사작전의 조정을 위한 미․소 간의 회의 개최를 포기했으며 결과적으로 미․소 연합작전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합참은 4월 24일 기지문제는 취소하고 보급선 문제는 보류하도록 결정했으며 소련 참전이 일본 본토 진공과 항복 접수에 더이상 필수적이 아니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완범, 「트루먼과 동북아 냉전: 미국의 원폭실험 성공에 따른 소련의 대일전 참전배제 구상, 1945년 4월~1945년 8월」『미국사연구』제21집 (2005년 5월), pp.74-75.


한줄 요약: 일본을 박살내는 데는 빨갱이들 도움 따윈 필요없다레후


그러나 이때까지는 트루먼이 루스벨트 행정부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소련 참전 배제론은 군 내부의 논의에 그쳤습니다. 게다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처절하게 저항하고 미군 피해가 예상수치를 뛰어넘자 미군 또한 소련의 참전이 미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폭 개발 이후에는 트루먼이 마음을 바꾸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