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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http://m.dcinside.com/board/war/590190

2부 http://m.dcinside.com/board/war/596183



3부 목차

1. 현리를 향한 3군단의 후퇴
1-1. 《9사단 상황》
1-2. 《3사단 상황》


2. 현리에 집결한 3군단
2-1. 《돌파작전 계획》
2-2. 《돌파작전 실패》


3. 3군단의 패주
3-1. 《험준한 을수재로의 패주》





1. 현리를 향한 3군단의 후퇴





1-1.《9사단 상황》

9사단은 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28연대가 좌전방, 30연대가 우전방, 29연대가 사단예비로 배치되어있었습니다.


중공군의 공세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5.17 02:00 좌측에 위치한 7사단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어 사단의 좌측이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상황을 확인하자 5.17 04:00 용포로 철수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각 예하 연대는 04:00 주저항선에서 후퇴를 시작해 5.17 10:00경 용포에 도착, 집결지의 상황이 매우 혼잡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일부 부대는 남기고 사단 주력은 군단 집결지인 현리로 이동합니다.



1-2. 《3사단 상황》

3사단은 3군단 우전방 사단으로 예하 18연대가 좌전방, 22연대가 우전방, 26연대가 사단예비로 배치되어있었습니다.

특이점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한 김종오가 사단장을 맡고있었습니다.


3사단은 5.14 획득한 포로를 통해 공세 전 북한군이 가리산을 점령해 이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와 합세한다는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대비 하던 중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5.15~5.17간 벌어진 공방전으로 3사단 방어선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고 5.17 04:00 방어선의 일부가 무너지게됩니다. 이때 9사단장에게 주보급로가 함락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3사단장은 철수명령을 고민하던 중 04:00 9사단이 철수를 시작하자, 3사단도 08:00에 후퇴명령을 하달합니다.

이 명령을 받은 예하 연대들은 교전중인 18연대를 시작으로 22연대가 다음차례로 철수해 정오경 현리에 도착하였고, 사단의 후퇴를 엄호하던 23연대는 그 뒤를따라 5.17 18:00 현리에 도착합니다.



2. 현리에 집결한 3군단

5.17 11:00경 사단 집결지인 용포에서 출발한 9사단 주력이 현리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각 3사단 일부 병력도 현리에 속속히 집결하고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현리에 집결한 병력은 3사단, 9사단, 3군단 직할부대, 미 10군단 예하 7사단 일부 병력,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 일부 병력이 섞여있는 매우 혼잡한 상황이였습니다.





2-1. 《돌파작전 계획》

3사단장은 군단장에게 현리 일대의 상황과 오미재의 공산군 방어진지 돌파가 어렵게된 상황을 보고하였고, 현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군단장 유재흥은 5.17 14:00 항공기를 이용해 군단지휘소인 하진부리에서 현리로 도착했고, 연대급 이상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주재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3사단장은 각 사단에서 1개연대씩 차출해 오미재를 탈환하고 포위망을 돌파한 후 후방에서 방어전을 펼친다는 작전을 설명했고, 군단장은 좋은 작전이니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한 후 15:30 현리를 떠나 군단전술지휘소가 위치한 하진부리로 돌아갔습니다.



3군단장 작전명령

가. 군단은 오미재를 돌파한 후 창촌지역에 집결한다.

나. 3사단과 9사단은 주력부대를 사용하여 오미재를 탈환하고 퇴로를 개척하라.

다. 포위망돌파에 성공하면 지연전을 펼치면서 창촌으로 철수 하라

라. 철수 중 군단의 지휘권은 3사단장에게 위임한다.

마. 돌파에 필요한 보급품은 공중보급한다.




군단장이 떠난 직후부터 양 사단장들은 구체적인 돌파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여기서 퇴로를 개척할 부대로는 3사단 18연대와 9사단 30연대가 선정하며 다음과 같은 포위망 돌파 계획을 수립합니다.




가. 9사단 30연대는 선봉으로 736고지와 785고지 점령(초록색)

나. 다음으로 18연대가 오미재를 탈환하고 810고지와 681고지 점령(하늘색)

다. 군단의 모든 병력과 장비는 30연대와 18연대의 엄호하에 도로를 따라 철수

라. 돌파부대의 공격시간은 21:10

마. 공격개시선은 용포교량을 기준 (노란색)






2-2. 《돌파작전 실패》


(돌파작전의 주력인 18, 30연대를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30연대의 상황」

선봉인 3대대는 해가 질 무렵 공격을 시작해 22:00경 첫 번째 목표인 736고지를 점령했습니다만, 다음 공격을 맡은 1대대가 갑자기 실종되었고 이때부터 3군단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당시 무전망의 혼선이 심해 각 부대간의 연락이 매우 힘든 상황에서 1대대가 실종되자 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확인된 정보로는 이 시각 1대대는 방태산 중턱으로 철수하고있었으나, 그 사유는 끝내 밝혀지지않고있습니다.





「18연대의 상황」

18연대장은 공격 차례를 기다리던 중 9사단장이 찾아와 “돌파작전에 자신이 있느냐?”고 질문했고, 이때 18연대장은 9사단장은 작전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9사단장은 18연대 지휘소를 떠나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갑자기 방태산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9사단장 곁에 있었던 9사단 군수참모는 “9사단장은 총성이 들리자 작전 지휘를 포기하고 방태산으로 올라갔다.” “그때 9사단장은 제정신이 아니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장병들도 점차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29연대가 현리 주변에서 방어전를 벌이면서 사방에서 총성이 울렸고, 현리 - 오미재 도로에 대기중이던 운전병들이 임의로 차량과 중장비를 파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재흥 군단장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다”라는 루머가 퍼지며 혼란은 증폭되어 일부 병력은 살길을 찾아 남쪽에 위치한 방태산으로 도주하기시작했습니다.



18연대 상황으로 돌아가보면 22:00가 지나도 30연대의 다음 공격이 없자, 연대장은 부하에게 30연대 상황을 확인하도록 지시했고 그 결과, 30연대 예하 1개 대대는 실종, 1개 대대는 도주 중 이였습니다.



18연대장은 3사단장에게 30연대가 대열이 무너져 방태산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결국 군단은 통제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3사단장은 30연대가 후퇴하고, 군단의 주력이 통제를 잃고 무너지는 이 상황에서 오미재 돌파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5.18 03:30 3사단장은 다음과 같은 철수 명령을 내려 장비는 버리더라도 병력만은 살리고자했습니다.


3사단 철수 명령

가. 전 부대는 방태산를 통해 창촌으로 철수한다.

나. 휴대할 수 없는 장비는 적의 노획을 막기 위해 모두 파괴하라.

다. 23연대,18연대는 방태산 주요 고지를 확보해 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라.



3. 3군단의 패주

17일 밤 3군단은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합니다. 군단은 장병, 노.무자, 위문공연단이 뒤섞여 철수하면서 모든 부대는 와해되고, 공용화기와 장비는 파괴하거나 유기하고 방태산 남쪽으로 후퇴했습니다.



밤낮으로 후퇴하면서 모든 부대장들은 지휘통제능력을 상실했고, 보급도 없이 험준한 방태산을 통과하면서 장병들의 체력은 모두 소진되었고, 일부 장병들은 개인화기는 물론 자신의 군장을 유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임시 집결지가 방태산 남쪽 광원리(1)라는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방태산 통과 후 군단이 와해되지않고 광원리에서 뭉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3군단 퇴각 대열을 매섭게 추격했고 일부 병력들은 군단집결지인 창촌을 차단하기위해 철수 대열을 우회했습니다.



18일 밤 3군단은 방태산을 통과해 임시 집결지인 광원리(1)에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3군단 지휘부는 선발대를 보내 광원리 - 창촌 간 도로를 확보하려했으나, 중공군은 이미 5.18 18:00경 창촌(3)을 점령해 선봉대를 저지했고, 5.18 22:00 창촌으로 가는 도로인 원당동(2)이 결국 중공군에게 점령되면서 결국 후퇴로는 차단됩니다.





3-1. 《험난한 을수재로의 철수(하늘색 화살선)






광원리 - 창촌간의 도로가 차단되어 퇴로가 막히자 지휘부는 광원리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을수재(4)를 거쳐 군단사령부가 위치한 하진부리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통신 상황이 매우 열악해 철수명령은 즉시 이루어지지않았지만, 9사단 30연대 3대대장이 직접 나서 사기가 바닥나있던 장병들을 독려 한 덕에 5.19 04:00 군단의 주력은 을수재(4)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을수재는 매우 험한 고개로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병사가 대다수인 상황에서 이 퇴각길에 많은 병사들이 자신의 무기와 군장을 버리거나 많은 낙오자가 생기기도했지만

19일 15:00 3군단의 선봉이 하진부리에 도착했고 뒤를 이어 3군단 주력과 이들을 엄호하던 후속병력들도 속속히 하진부리에 집결하게되었습니다.

이후 하진부리에서 3군단은 다시 방어선을 구축해 중공군 저지를 시도했으나

후퇴로 인한 60%에 가까운 병력과 다수 장비들의 손실, 장교부족으로 지휘계통에 생긴 문제로 인한 낮은 전투력으로 결국 5.21 하진부리 방어선이 무너지며 3사단은 하진부리에서 남서쪽인 송계리로, 9사단은 하진부리에서 남동쪽인 대화로 각각 철수합니다.


이후 3군단은 해체되었고 예하 3사단과 9사단은 각각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으로 배속됩니다.



4부에서…



**1대대가 785고지를 점령하지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30연대장과 1대대장의 증언이 엇갈리는데

1대대장은 군단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위해 방태산에 병력을 배치했다고 증언하고있으며, 30연대장은 지금까지도 1대대장이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참고
中共軍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 국방구 군사편찬연구소

현리전투(중공군 5월 공세)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6.25전쟁기 중공군 5월 공세에 대한 전투 사적 고찰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장감각(현리계곡의 소용돌이) - 서경석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