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창(?昌) 봉기 이후 호북(湖北) 군정부가 수립되고 찍은 사진이다. 뒤로는 커다란 철혈십팔성기(鐵血十八省旗) 두 개가 걸려있다.
1942년을 마무리하고 1943년을 시작하며 윈스턴 처칠(Winston L. Churchill)은 '시작의 끝'이란 표현을 썼다. 그렇다면 1911년 10월 10일, 호북(湖北)성 무창(?昌)에서 신군 장병들이 일으킨 봉기는 '끝의 시작'이었다. 호북에 인접한 사천(四川), 호남(湖南), 안휘(安徽)는 물론이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운남(雲南), 광동(廣東)과 청조의 수도인 직예(直隸), 청조가 시작된 동삼성에서도 반청봉기가 일어났다. 연말이 되자 전국 17개 성이 청조의 지배를 벗어났다. 청조는 1907년 이래 전국에 22개 성을 두었다. 1911년 말, 해외에서 중국 동맹회를 이끌던 손문(孫文)은 귀국하여 이듬 해 첫 날 남경(南京)에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올랐다. 한창 북경(北京) 인근에서 대규모 훈련을 진행하던 북양군은 남쪽으로 출동하여 혁명군을 밀어붙였지만 무한(?漢) 삼진-호북의 중심지인 무한은 무창, 한구(漢口), 한양(漢陽)으로 구성되고 묶어서 무한삼진이라 부름-을 점령한다고 상황 종료될 리 없었다. 2월 12일, 태후는 어린 황제의 퇴위를 선언했다.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끝낸 이래 수십 세기, 당연스레 대륙을 다스려온 황제는 영구히 없어졌다. 새로 만들어진 중화민국은 핏줄을 타고난 천자가 아닌 인민이 뽑은 대총통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래야 했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다.
누가 얘보고 중국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라고 했나. 손문은 같은 한족이라고 알지도 못하고 기대를 가졌지만 실체가 드러나기까진 얼마 안 걸렸다.
원세개(袁世凱)는 어딜봐도 새 민국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불충할지언정 청조의 신하로 평생을 살아온 원세개에게 공화정치란 개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손문과 손 잡고 남북으로 갈라질 뻔한 중국을 내전에서 구했으며 유혈사태 없이 새 시대를 여는데 일조했지만 그뿐이었다. 대총통 자리를 양보받은 원세개는 정략과 군략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했으며, 남방을 거점 삼은 혁명파를 무력화시켰다. 자신을 비판하던 혁명파 정치인 송교인(宋敎仁)을 암살했고 손문과 황흥(黃興)이 일으킨 제2혁명을 진압했다. 1910년대 중반이 되자 중국에서 원세개를 막을 인물은 없었다. 법을 바꿔 큰 권한을 가진 대총통 자리에 영구히 앉은 원세개는 황제나 다를 바 없었지만 진짜 황제가 되고 싶었다. 1915년 12월 13일, 중화민국 대총통은 중화제국 홍헌제(洪憲帝)가 됐다. 꿈은 이뤘지만 인생은 끝났다. 북경에서 2,000 하고 100 킬로미터는 더 떨어진 운남성 곤명(昆明)에서 호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사람이 채악(蔡鍔)이다.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건강이 나쁜 편이었는데, 훗날 중공군 총사령에 오르는 주덕(朱德)은 호국전쟁 중에 얼굴이 창백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채악의 건강이 나빴음을 표현한 바 있다.
1915년, 신해혁명 당시 운남에서 봉기를 이끈 채악은 이전부터 원세개에게 위험인물로 인식되어 북경에 있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 젊은 30대 장군은 병에 걸려 몸은 약했지만 정신은 강했다. 북경을 탈출해 일본을 거쳐 일본령 대만(臺灣), 프랑스령 베트남을 거쳐 운남성에 도착하여 현지 군대를 호국군으로 개편하고 원세개 토벌에 착수했다. 전선은 사천성에서 교착됐으나 5년 전과 같이 전국 각 성이 독립을 외치며 북경정부에서 이탈했다. 1916년 신년에 자신을 총통이라 표현한 반쪽짜리 황제는 옥좌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머잖아 원세개는 홧병으로 죽었고 호국전쟁은 끝났다. 얼마 뒤 채악도 죽었다. 원세개의 자식인 북양군벌은 단기서(段祺瑞) 등 환(晥)계와 풍국장(馮國璋) 등 직(直)계로 갈라져 집안 싸움을 시작했고 망명 중인 손문은 광동성 광주(廣州)에 호법정부를 만들어 군정부 대원수 자리에 취임했다. 손문은 북양과 대응되는 남방군벌을 규합해 북벌에 나섰다. 채악의 후임자 당계요(唐繼堯)의 운남성 전(滇)계 군대, 토비(도적) 출신으로 광서(廣西)를 장악한 군벌 육영정(陸榮廷)의 광서성 계(桂)계 군대, 손문의 오랜 동지 진형명(陳炯明)의 광동성 월(粤)계 군대, 담연개(譚延闓)나 정잠(程潛)의 호남성 상(湘)계 군대 등. 손문이 1917년에 시작한 호법전쟁에서 전체 병력은 10만 명에 달했지만 모두 '빌린 군대'에 불과했다. 일차적으로 연내에 장강(長江) 이남을 장악하고 1918년 새해엔 황하를 넘어 북경을 점령하겠단 손문의 큰 그림엔 관심 없는 지방 군벌들은 진격을 꺼렸다. 짧은 성과는 있었지만 긴 성과는 없었고, 북양 최고의 명장이라는 오패부(吳佩浮)가 진압군을 끌고 오자 손문이 빌린 북벌군은 알아서 물러나거나 무너졌다. 사실 손문이 맞선 단기서도 다를 바 없었다. 이 기회에 호남을 발판 삼아 아예 남방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것이 북경정부의 주인인 단기서의 구상이었지만 실전부대를 장악한 북양군벌 직계는 더 이상 남하하길 거부했다. 이렇듯 높은 직위는 있지만 직접 가용한 실전부대가 없던 단기서와 환계의 사정은 참전군의 편성과 직환전쟁, 환계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시 이야기를 남쪽으로 돌려보자. 허무하게 끝난 호법전쟁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던 손문은 1920년대가 되어 다시 중국에 돌아왔다. 광주정부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손문은 다시 북벌에 나섰다. 물론 빌린 군대였다. 개중에는 허숭지(許崇智)처럼 크게 배신하지 않고 손문을 따른 군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1922년 제1차 직봉전쟁 와중엔 오랜 동지였던 광동성의 지배자 진형명이 6.16 정변을 일으켜 뒤통수를 쳤다. 목숨을 건진 손문은 다시금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싸우는 용병 집단이 아닌 당을 위해, 삼민주의를 위해, 중국의 미래를 위해 싸울 군대가 필요했다.
신해혁명 때 하룻밤만에 절강(折江)성 항주(抗州)를 함락시켰느니 하는 식으로 분명 자기 커리어가 있었지만 장개석(蔣介石)은 어떻게 보면 좆밥1에 불과했다. 중화민국의 첫 총통, 대만의 독재자이자 대한민국의 만력제 장개석은 모두 1926년에 시작되었다.
때마침 찾아온 소련의 합작 제안은 손문과 국민당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였다. 공산당과 합작한다는 건 꺼림칙한 면도 있었지만 손에 잡을 수 있는 무기와 자금 원조.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혁명 군인'을 길러낼 수 있는 군관학교의 설립을 현실화시킬 수 있던 것이다. 광주 황포(黃浦) 장주도(長州島)에 세워진 군관학교는 시간이 흐르며 계속 이름은 바뀌지만 소재지 이름을 따서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리게 된다. 이곳을 거친 생도들이 지역 군벌의 군대가 아닌 당군(黨軍)을 이뤘으며 그 장개석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도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계기였다.
1925년, 손문이 죽고 광주정부가 국민정부로 개조되었을 때 건국월군이니 건국상군이니 제각각이던 국민당 측 군대는 국민혁명군의 이름 아래 통일된 단대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엔 장개석, 상계 군벌 담연개, 전계 군벌 주배덕(朱培德), 월계 군벌 이제심(李濟沈), 월계 군벌 이복림(李福林)이 각각 지휘하는 5개 군이 있었고 이후 상계 군벌 정잠의 군대가 제6군, 계계 군벌 이종인(李宗仁)의 군대가 제7군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호남성 집안싸움에서 밀리던 현지 군벌 당생지(唐生智)의 군대가 제8군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이 북벌 초기 8개 군이다.
8개 군은 시간이 흐르며 해체와 재편성을 반복했으며 어떤 부대는 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았지만 어떤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성을 반복하며 1926년과 1940년대를 비교했을 때 단대호만 같을 뿐인 다른 부대가 되어버렸다. 또한 어떤 부대는 대만으로 철수하여 지금까지 역사가 이어지지만 어떤 부대는 대륙 중화민국과 끝을 같이 했다. 1926년부터 1949년까지 혼란스러웠던 중국만큼 이 8개 군의 역사는 중국 대륙을 아우르며 적도 북양군벌에서 한때의 동지들, 외부의 적 일본, 최종보스 중공군까지 바뀌어간다. 이제부터 부족하나마 그 발자취를 쫓아가보고자 한다.
<읽기 전 안내>
1. 이 시리즈는 장명근(張明金), 류립근(劉立勤)이 쓰고 중국 인민해방군 출판사(中國 人民解放軍 出版社)에서 낸 책 '국민당 역사상의 158개 군(國民黨歷史上的158個軍)'의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썼다.
2. 당시 편제나 직위, 계급 등은 직접 옮기는 걸 원칙으로 한다. 사령, 총사령, 사령장관 등 한국어로 옮기지 않고 중국어를 우리말로 읽는다. 편제는 다음과 같이 대응된다. 반(班) = 분대, 배(輩) = 소대, 연(連) = 중대, 영(營) = 대대, 단(團) = 연대, 사(師) = 사단, 군(軍) = 군단. 종대(從隊)는 대한민국에서 쓰는 '부대'나 '제대' 같은 의미인데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군단~야전군급 제대다. 로군(路軍)은 야전군급 제대지만 1932년 제19로군처럼 예하에 3개 사 밖에 없는 더 작은 제대일 수도 있다. 집단군(集團軍)은 북벌 말기 4개 집단군은 우리가 아는 그 집단군이지만 중일전쟁을 전후해선 야전군급 제대다. 병단(兵團)은 야전군급 제대다. 야전군(野戰軍)은 집단군급 제대다.
3. 민국 군벌들은 황포계 같은 예외도 있지만 주로 출신 지역을 가지고 구분한다. 앞서 적은 직예[뒷날 하북(河北)성] 출신 직계, 안휘 출신 환계 등이다. 보통 각 성의 약자인 한자를 쓴다. 사천 출신 천(川)계, 귀주 출신 검(黔)계 등.
그래서 제1군부터 쓴다. 근데 딱지들아 왜 굳셀 무자가 막히냐 제정신?
킬 르번구이쭈 엔 킬 공비 - dc App
좆본이 화학무기만 쳐 뿌려대지 않았다면 현 세계의 판도는 더 나앗을것 - dc App
글쎄올시다? 아무리 좆본군 좆본군이래도 나름 열강 군대인데 군대 조무사 수준인 중국군 상대로 그렇게 유의미한 저지를 당했을 거라곤 생각 안함
응 핵맞고 뒤져 ^^
차이어 장군 호국전쟁 끝나자마자 피토하면서 죽었잖어. 트루 중화영웅 차장군님...
장대인이 보인다
노-무-현 한자 때문일걸
씨발 이것도 금지어로 처박아놓으면 어쩌란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