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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와 1990년에 베트남의 팜반동 총리를 만났던 리콴유 회고록 407~408, 413쪽 내용입니다.
407~408쪽
베트남 지도자들은 참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거들먹거리면서 스스로를 동남아시아의 프러시아인이라고 (19세기 유럽의 군사강국 프로이센에 빗댄 표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국이 기술과 물량으로 대적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그들이 큰 희생을 감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청난 인내력과 미국 매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고도의 선전선동 능력을 동원했던 베트남인들은 결국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도자들은 전세계의 어떤 나라, 어떤 세력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내정에 개입하려는 나라가 있으면 상대가 중국 같은 대국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또 우리같이 왜소한 동남아시아 약소국가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413쪽 (1990년 하노이에서 만남)
그는 비록 몸은 쇠약해져 있었으나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싱가포르에서 우리의 만남을 (1978년) 회고하며 그는 과거는 지나갔고 이제 베트남은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들을 도우러 온 나의 우정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비통함을 억누르는 듯했다. 나는 1978년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불손하고 거만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꿋꿋함을 잃지 않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덩샤오핑이 베트남을 응징한 것에 감사했다. 중국에 의한 베트남의 패배는 그 옛날 유럽에서의 프러시아인들과 같이 동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들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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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선저의 On China 국내 번역판 455~456쪽
1979년 8월 덩샤오핑이 (미국 부통령) 먼데일에게 말했다.
"그런 크기의 나라에서 백만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노동 인력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만 상비군이면 필요한 병참 지원도 만만치 않을 것이요. 지금은 그들이 소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소련에게서 매일 200만 달러를 받도 있다는 추정도 있고, 250만 달러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 상황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고 소련이 감내하는 부담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더욱더 어려워질 게 뻔해요. 시간이 지나면 베트남도 깨닫겠지요. 소련에 요청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요. 그런 형편이 되면 아마도 새로운 상황이 대두될 것입니다."
10년이 좀 더 지나자 소련과 그 재정 지원이 붕괴되어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그가 말했던 새로운 상황이 일어났다. 결국 민주 사회의 지탱이 더 어려웠던 기간 동안, 중국은 동남아에서 전략적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덩샤오핑은 남아시아와 말라카 해협에 대한 소련의 우위를 꺾겠다는 목적을 이룩하기에 충분한 전술적 공간을 얻었다.
1978년와 1990년에 베트남의 팜반동 총리를 만났던 리콴유 회고록 407~408, 413쪽 내용입니다.
407~408쪽
베트남 지도자들은 참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거들먹거리면서 스스로를 동남아시아의 프러시아인이라고 (19세기 유럽의 군사강국 프로이센에 빗댄 표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국이 기술과 물량으로 대적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그들이 큰 희생을 감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청난 인내력과 미국 매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고도의 선전선동 능력을 동원했던 베트남인들은 결국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도자들은 전세계의 어떤 나라, 어떤 세력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내정에 개입하려는 나라가 있으면 상대가 중국 같은 대국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또 우리같이 왜소한 동남아시아 약소국가들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413쪽 (1990년 하노이에서 만남)
그는 비록 몸은 쇠약해져 있었으나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다. 싱가포르에서 우리의 만남을 (1978년) 회고하며 그는 과거는 지나갔고 이제 베트남은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들을 도우러 온 나의 우정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비통함을 억누르는 듯했다. 나는 1978년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불손하고 거만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패배에도 불구하고 꿋꿋함을 잃지 않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덩샤오핑이 베트남을 응징한 것에 감사했다. 중국에 의한 베트남의 패배는 그 옛날 유럽에서의 프러시아인들과 같이 동아시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들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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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선저의 On China 국내 번역판 455~456쪽
1979년 8월 덩샤오핑이 (미국 부통령) 먼데일에게 말했다.
"그런 크기의 나라에서 백만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려면 노동 인력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백만 상비군이면 필요한 병참 지원도 만만치 않을 것이요. 지금은 그들이 소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소련에게서 매일 200만 달러를 받도 있다는 추정도 있고, 250만 달러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 상황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고 소련이 감내하는 부담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더욱더 어려워질 게 뻔해요. 시간이 지나면 베트남도 깨닫겠지요. 소련에 요청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요. 그런 형편이 되면 아마도 새로운 상황이 대두될 것입니다."
10년이 좀 더 지나자 소련과 그 재정 지원이 붕괴되어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그가 말했던 새로운 상황이 일어났다. 결국 민주 사회의 지탱이 더 어려웠던 기간 동안, 중국은 동남아에서 전략적 목표를 상당 부분 달성했다. 덩샤오핑은 남아시아와 말라카 해협에 대한 소련의 우위를 꺾겠다는 목적을 이룩하기에 충분한 전술적 공간을 얻었다.
화교계국가니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