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상해(上海)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제88사의 모습이다. 저렇게 하이바 쓰고 체코제 기관총이든 독일제 소총이든 들었다면 정예병력이라고 불러줄 수 있었다. 약 200개 사에 달하는 국민혁명군의 대부분은 하이바도 없고 총은 Gew88의 복제판인 한양식 보총이나 들고 다녔으니까.


 대전사(大戰史)에 있어 한없이 존재감이 부족한 중국군이지만 지금에 와선 중일전쟁 직전 독일식으로 개편된 덕식사(德式師)나 중일전쟁 중 인도나 중국 서남부에서 미국식으로 훈련 받고 국공내전까지 싸운 미식사(美式師)의 모습은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의 주인공인 제1군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독일제 슈탈헬름이나 미제 M1 철모는 이들 머리를 거쳐간 적이 없고 중정식 보총이나 스프링필드도 이들 손을 거쳐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군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장개석의 대두, 국민정부의 북벌이 모두 제1군의 창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1924년 6월 16일, 광주 황포 장주도에서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의 첫 기수가 입교식을 치뤘다. 제작년 북벌 와중에 월계군벌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광주를 버린지 정확히 2년 만이었다. 학교가 세워졌을 무렵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소총은 생도 10명 중 1명에게도 쥐어줄 수 없었고 하루 세 끼 밥을 먹일 수도 없었으며 피복은 군복 한 벌이 전부였다. 손문이 연아용공(聯亞容共) 노선을 채택하여 모스크바에서 지원이 온 덕에 시간이 흘러 상황은 나아졌지만 맞서야 할 군벌군대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했다.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 보통 '황포군교'로 줄여 부르는 이 학교의 첫 생도들은 이렇게 고된 여건과 훈련을 이겨내고 645명이 졸업했다. 장기 교육과정을 조언한 소련 고문에 맞서 교장 장개석은 단기 교육과정을 택했다. 덕분에 1926년까지 황포군교는 6개 기수 3,000명에 달하는 인원을 군대에 공급했다. 황포군교 1기생들은 11월 20일에 창설된 교도 제1단을 구성했다. 단장엔 하응흠(何應欽)이 임명됐다. 12월 26일엔 교도 제2단이 창설됐다. 단장엔 왕백령(王柏齡)이 임명됐다. 두 사람 모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친 엘리트자 청말부터 반청 활동을 해온 혁명파 인물이었다. 해가 바뀌고 1925년 초, '교군(校軍)'이라 불리던 황포군교 출신 2개 교도단은 첫 실전을 겪게 된다. 상대는 한때 손문의 동지이자 광동성의 주인이었던 월계군벌 진형명이었다.




이 사람이다.


 진형명은 광동성 혜주(惠州) 출신이다. 중국 남부에 퍼진 민족인 객가(客家) 출신이어서 객가장군으로도 불린다. 지주 집안 출신으로 청말 혁명파 조직인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고향에서 부성장을 맡았지만 1913년 제2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손문파였던 진형명은 광동성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 시간도 마냥 길진 않았다. 1917년 12월 진형명은 다시 광동성을 장악했다. 진형명은 진보적인 군벌이었다. 사천성에선 군비 때문에 100년 뒤 세금을 미리 걷어갔지만 광동성에선 군비를 전체 예산의 3할 밑으로 제한했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진독수(陳獨秀)는 진형명의 광동성 정부에서 교육부장에 임명됐다. 다른 성에선 교육 예산을 빼서 군비로 돌렸지만 광동성에선 전체 예산의 2할은 교육비로 쓰였다. 청년들은 성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광주에서 서구로 소련으로 유학을 갔다. 이뿐 아니었다. 영국 대사관에 의하면 진형명은 중국에서 가장 유능한 군인 중 한 명이었다. 패배로 점철된 손문의 인생이 패망에 이르지 않은 건 진형명의 월군이 버텨준 덕분이었다.


 이렇게 청말의 혁명동지로, 민초의 反 북양 동업자로 노선을 같이한 손문과 진형명이 갈라진 큰 이유는 중국의 현실을 해결할 방법 차이였다. 손문이나 여러 군벌 지도자들이 수천 년 된 중국의 전통에 따라 무력으로 하나된 중앙정부를 세우고자 했다면 진형명은 여러 성 정부가 일종의 연방제를 이루는 방안을 제시했다. 통일을 위한 내전이 이뤄졌을 때 인민들이 받을 고통을 먼저 생각했을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북양 세력에 맞서기 힘든 상황에서 북벌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잃어버릴 자기 기반이 아까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형명에게 손문은 존중과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으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내뱉는 이상론자기도 했다. 손문이 북벌 노선을 버리지 않자 진형명은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2년 6월 16일의 일이었다. 이후 진형명은 완전히 손문과 결별했다. 예하 월군은 진형명을 따르는 부대와 훗날 건국월군(建國粤軍)으로 재편되는 손문파 부대로 두동강이 났다. 손문파 부대들이 광동성과 이웃 성 경계에 고립된 동안 진형명은 오패부에게 광동성과 이웃한 강서(江西)성의 주인으로 인정받았으며, 500만 원을 지원 받았다. 상황이 바뀌어 북양의 직계 정권이 약화되자 진형명은 손문에게 광주를 내주긴 했으나 여전히 혜주를 중심으로 광동성 동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아직은 미약한 광동의 국민당에게 있어 진형명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국민당은 진형명이 광주를 공격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1925년 2월, 동서 방향으로 광동성 내륙에서 광주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동하(東河)를 따라 교군 2개 단이 공격에 나섰다. 교군은 서전에서 승리했고 이어서 면호(棉湖)라는 소도시를 점령했다. 이 시대 중국에서 성벽을 넘는 법은 옛날과 다를 바 없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했다. 1917년 자금성에서도 그랬고, 1925년 면호에서도 똑같았다. 하응흠의 지휘는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예하 장병들과 소련 군사고문의 도움으로 교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교군을 포함한 동정군(東征軍)은 진형명 군대를 항구도시 산두(山頭)까지 밀어붙였고 거기서 전역의 종결을 선언했다. 제1차 동정이라 불리게 되는 이 전역이 끝난 직후인 4월 14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2개 교도단을 묶어 당군 제1여로 편성하고 여장에 하응흠을 임명했다. 9일 뒤엔 교도 제3단이 창설됐다. 단장엔 전대균(錢大均)이 임명됐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진 않았지만 전대균 역시 황포군교의 교관 출신이었다. 손문이 가지지 못했던 군대를 이제 국민당은 가지고 있었다. 동정 때 노획한 문서에 광동성에 주둔한 외부 군벌, 계계군벌 류진환(劉震寰)과 전계군벌 양희민(楊希閔)이 북양군벌과 내통했다는 내용이 발견되고 실제로 둘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민당 정부는 당군 제1여를 동원하여 광주를 점거한 군벌 군대를 공격했다. 반란은 한 달만에 진압됐다.


 7월 26일,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는 각 성의 군벌 군대인 건국군과 직속인 당군이란 이름을 없애고 모든 예하 군대를 국민혁명군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8월 26일엔 국민혁명군을 5개 군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하응흠의 당군 제1여와 담서경(覃曙卿)의 건국월군 제4사가 3개 사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 제1군을 구성했다. 창설 당시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제1군 군장 장개석, 부군장 하응흠, 참모장 왕무공(王懋功), 정치부 주임 주은래(周恩來)

 - 제1사 사장 겸임 하응흠(전신 당군 제1여)

 - 제2사 사장 겸임 왕무공(전신 황포군교 교도 제4, 제5단)

 - 제3사 사장 대리 담서경(전신 건국월군 제4사)


 군벌 군대도 섞여 있었지만 제1군의 주요 인물은 모두 황포군교 출신이었다. 장개석은 교장이었고 하응흠은 교관이었다. 왕무공은 1924년 황포군교 검열위원을 맡았고 1925년엔 우리나라 사관학교 생도대장쯤 되는 3기생 교도총대장을 맡았다. 주은래는 황포군교 정치부 주임을 맡은 바 있었다. 손문 사후 국민정부로 개조된 광동정부의 권력 투쟁에서 국민당 좌파의 핵심 인사였던 요중개(廖仲愷)의 암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장개석은 세를 불렸다. 국민정부 주석 왕정위(王情衛)와 손을 잡고 우파의 거두 호한민(胡韓民)을 쳐냈으며, 월군총사령으로 국민정부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이끌던 허숭지마저 위협이 안될 수준으로 만들었다. 1925년이 끝으로 향할 무렵 장개석은 2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지휘하여 아직 숨이 붙어있던 진형명을 끝장내고자 했다. 국민혁명군 장병들은 또 다시 사다리를 들고 적진을 넘었고 11월까지 진형명의 세력을 모두 쓸어버렸다. 두 차례 동정에서 진형명은 재기할 여력 없이 몰락했고 향항(香港)으로 가서 사망하게 되었다. 제2차 동정이 끝난 뒤 제1군은 장화(張和)의 1개 여와 여응양(余應楊)의 1개 단을 독립 제2사로 편성해 풍일배(馮軼裴)를 사장에 임명했으며 황포군교 교도단을 교도사로 확대하여 왕백령을 사장에 임명했다.




읽다보면 언급되는 배다. 장개석이 황포군교와 광주를 오갈 때 이용했다고 한다. 황포군교는 섬이었단 사실을 잊지 말자.


 1926년 1월, 장개석은 제1군 군장 자리를 하응흠에게 물려줬다. 부군장에 왕백령이 임명됐으며 참모장에 장백성(蔣伯誠)이 임명됐다. 정치부 주임엔 유은래가 유임됐다. 이 시기 독립 제2사는 제14사로, 교도사는 제20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시기 제1군이 투입된 사건으론 중산(中山)함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건조된 780톤짜리 포함은 원래 이름이 영풍(永豊)이었다. 국제적인 기준에서나 중국 내에서나 큰 배는 아니었지만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922년 6.16 사변에서 손문이 살아서 광주를 탈출할 수 있던 것이 이 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10년대 중반 광주정부에 합류했던 해군 대형함들이 다시 북양정부에 붙어버린 상황에서 영풍함은 남방이 보유한 가장 큰 포함이기도 했다. 손문의 목숨을 구한 뒤 이 배는 손문의 호를 따 중산으로 개칭된 상태였다. 1926년 초, 국민정부 내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한창 심화되고 있었다. 장개석은 제1군 제2사 사장 왕무공이 소련 고문단과 야합했다며 숙청했다. 황포군교 안팎에서 장개석을 비난하는 선전선동이 퍼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원인 함장 이지룡(李之龍)이 자기 허가 없이 중산함을 움직였다는 것과 최근 며칠 동안 자신의 일정을 파악하려는 경쟁자들의 움직임 등을 고려했을 때 장개석은 경쟁자와 공산당이 자신을 숙청하려 든다고 판단했다. 장개석은 선수를 쳤다. 기차역과 중앙은행을 포위하고 중산함을 점거해 이지룡을 체포했으며 소련 고문단을 구금했다. 제1군은 이 모든 행동을 처리했다. 장개석은 뒤이어 '당무정리안'을 내놓아 국공합작 체제에서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우위를 확인시켰고 그토록 부르짖던 북벌을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됐다. 1926년 7월 1일, 장개석은 전간기 가장 거대한 군사 작전인 북벌의 시작을 알렸으며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했다. 제1군에선 부군장 왕백령과 참모장 장백성이 제1, 제2사를 이끌고 강서성으로 향했다. 처음엔 예비대였던 군장 하응흠과 제3, 제14, 제20사는 군장 하응흠이 동로군 총지휘에 임명되면서 제3, 제14사와 보충단을 확대한 독립 제4사가 복건성으로 향했다. 제20사는 예비대로써 광동에 남았다. 상대는 중국에서 비교할 데 없는 군사적 수재인 오패부와 그에 지지않는 능력자인 손전방(孫傳芳)이었다. 국민혁명군은 제1군부터 제8군까지 10만 명, 전선으로 향한 부대는 8만 명에 불과했지만 직계 군벌 두 사람은 각각 25만, 20만에 달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오패부는 중국 최대의 조병창 중 하나인 한양 병공창을 가지고 있었고, 손전방은 상해의 강남제조국을 손에 쥐고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도 언급한 바 있지만 북벌군이 믿을 구석이라곤 소련의 원조 밖에 없었다. 소련의 직접적인 무력개입 없이도 북벌군이 강대한 군벌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이딴 분량조절로 언제 국공내전까지 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