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때 구글에서 중국 지도라도 키고 따라가면서 보면 조금 더 볼만할 것.
지난 글
왼쪽이 오패부, 오른쪽이 손전방
전편 마지막 문장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북벌군이 북벌 여정에서 맞서야 할 첫 상대는 하남(河南), 호북, 직예, 호남 4개 성에 걸쳐 25만 명을 거느린 직계 군벌 오패부와 절강(折江), 복건(福建), 강서, 안휘, 강소(江蘇) 5개 성에 걸쳐 20만 명을 거느린 직계 군벌 손전방이었다. 전자는 1920년대 초반만 해도 '중국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The Biggest Man in China)'라는 말과 함께 타임(Time)지 표지에 등장한 적도 있었으나 재작년에 봉계 군벌 장작림(張作林)과 두 번째 전쟁을 치르던 중 부하인 제3군 군장 풍옥상(馮玉祥)의 배신으로 몰락한 바 있었다. 오패부는 천진(天津)에서 배를 타고 장강 중류인 호북성 무한에서 자기 세력을 재건했다. 비록 대륙을 제 손에 쥐던 과거와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오패부는 여전히 중국에서 제일 가는 군략가였다. 후자는 1920년 상악전쟁(湘鄂戰爭)에서 조항척(趙恒惕)이 이끈 상군을 막아내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장강상류경비총사령을 거쳐 1923년 복건성을 자기 영토로 만들었다. 1924년 화북에서 오패부가 몰락하자 장강 하류 5개 성의 직계 군벌을 규합해 오성연군(五省聯軍)을 조직하여 남하하는 봉계 군벌에 맞섰고 이 과정에서 한때 상관이었던 오패부에게서 독립을 이뤄냈다. 손전방 역시 중국에서 손에 꼽히는 군략가 중 한 명이었다. 이에 비하면 장개석이나 1926년 6월에야 국민혁명군에 가담해 전적총지휘(前敵總指揮) 겸 제8군 군장에 임명된 당생지(唐生智)의 군사 경력은 부족했다. 병력의 양적, 질적 차이는 전편에서 짧게 쓴 바 있었다.
상황이 이러므로 장개석은 맞서야 할 군벌을 토벌하기 보단 회유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방법은 쓸모가 있어 국민혁명군의 규모를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늘리게 되지만 모든 군벌이 순순히 고개를 숙이진 않았다. 거대 군벌일 수록 그랬고 당장 맞서야 할 오패부가 그랬다. 제1군 부군장 왕백령과 참모장 장백성이 지휘하는 제1, 제2사는 호남성으로 향했다. 공산당원 엽정(葉廷)이 이끄는 제4군 독립단이 장사(長沙)를 점령하고 호남성이 손에 들어오자 다음 목표는 호북성이었다. 호북성을 손에 넣기 위해선 반드시 무한을 손에 넣어야 했다. 8월 26일 북벌군은 호북성에 진입했다. 무한에서 남으로 80 킬로미터 떨어진 철교인 정사교(汀泗橋)를 점령할 때 제1군은 제4, 제7군과 함께 투입됐다. 다리는 24시간 만에 점령됐지만 전투는 치열했다.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으며 오패부가 배치한 수비대 1만 명 중 2/3가 전사했다. 오패부는 직접 현장을 지휘하며 후퇴하는 장교들을 즉결 처분하는 등 다리를 사수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오패부의 직군 일부는 오패부의 열차가 무한으로 후퇴할 때 깔려죽었다고 전해진다. 9월 2일, 북벌군은 무한 남단에 도착했고, 무창성 공격에 들어갔다. 장개석은 최초 공격에서 200명을 잃고 8개 단으로 다시 공격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공성전이 길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무한 삼진을 이루는 다른 두 도시인 한양과 한구의 상황은 기나긴 공성전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무창만 외로이 남게되자 부군장 왕백령이 이끈 제1군 2개 사는 강서성으로 재배치됐다.
북벌을 진행하는데 있어 오패부와 손전방은 조금 달랐다. 오패부는 북벌의 발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상계 군벌 당생지가 호남성 내분에 휩싸여 국민정부에 개입을 요청했고 개입의 목표는 오패부를 막는데 있었다. 하지만 손전방은 직접적인 적대관계는 없었다. 장개석도 손전방을 회유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손전방은 국민혁명에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 충돌이 불가피해지자 장개석은 북벌군을 강서성으로 보냈다. 성도 남창(南昌)이 빠르게 점령되었다. 하지만 손전방도 앉아만 있진 않았다. 철로와 수로를 이용해 반격에 나섰다. 북벌군은 남창에서 쫓겨났고 손전방은 교사와 학생, 북벌군 포로를 효수했다. 강서성 남부에서 북벌군과 오성연군이 벌인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어떤 부대는 영장과 배장 8할이 사상자였다. 강서성에서 북벌군이 입은 손실은 1만 5천명으로 추정됐다. 제1차 북벌에서 북벌군의 사상자는 2만 5천 명으로 추정됐다. 남창이 함락되자 제1군 부군장 왕백령은 책임을 지고 면직됐다. 이런 상황에서 북벌군을 살려낸 건 국민당에 대한 인민의 지지와 오성연군의 내분이었다. 북벌군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들이 오성연군의 보급선을 방해했다. 10월 18일, 절강성장 하초(夏超)가 반란을 일으켜 오성연군의 후방을 어지럽혔다. 비록 반란은 실패하고 하초는 총살 당해 수급만 손전방에게 보내지는 신세가 되었지만 북벌군이 다시 기회를 잡기엔 충분했다. 북벌군은 오성연군 주력이 파양호(鄱陽湖) 유역에 머무르도록 강요하면서 남창과 이어지는 철도선, 곡창지대를 모두 차단했다. 11월 8일 남창은 점령되었고 오성연군 4만 명이 포로가 됐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인 앙드레 말로(Georges André Malraux)는 자신이 쓴 소설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에서 상해 점령 전후와 4.12 사건을 다뤘다. 공산당 입장에서.
동로군 총지휘 겸 군장 하응흠이 이끈 제1군 제3, 제14, 독립 제4사는 강서성보다 동쪽인 복건성으로 향해 오성연군 주음인(周蔭人) 부대를 상대하게 됐다. 오성연군의 주력은 손전방을 따라 강서성으로 투입되어 현지에 남은 군대는 잡군에 불과했다. 하응흠은 저항은 물리치고 항복하는 부대는 흡수하며 북진했다. 해가 바뀌어 1927년 1월이 됐을 때 북벌군은 강서성과 안휘성 경계, 복건성과 절강성 경계에서 각각 동쪽과 북쪽으로 진격하며 오성연군을 압박했다. 산동성을 영토 삼은 포악한 군벌 장종창(張宗昌)이 손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장갑열차와 러시아 내전의 백군 패잔병들을 남하시켰으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1군은 예하 제1, 제2사가 안휘성에서 장강을 따라 동진했고, 제3, 제14사가 남경을 노리고 북진했다. 멸망이 다가오자 손전방의 지배는 더 약화되어갔다. 북벌군이 항주(杭州)에 도달했을 때 상해에서 노동자 10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다. 3월 18일 북벌군이 상해 남쪽의 방어선을 돌파하자 노동조합 연합인 총공회(總工會)가 주도한 봉기가 일어났다. 훗날 공산당 선전이 묘사하듯 '무산계급이 혁명을 일으켜 상해를 장악'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방어군을 혼란시키기엔 충분했다. 제1군 제1, 제2사를 포함한 계계 군벌 백숭희(白崇禧)의 북벌군 동로군이 상해를 점령했다. 하음흠이 이끈 제1군 제3, 제14사는 상해가 점령된 다음 날 남경을 점령했다.
왕정위다. 그닥 매력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장개석에 비해 언변도 좋고 생긴 것도 괜찮다고 평가를 들었지만 큰 인물은 아니었다. 권력을 잡은 장개석과 합작, 분열을 반복하다 끝내 최악의 매국노가 되어 지금은 중국의 이완용 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게 북벌의 진행은 순조로웠지만 진행하는 주체인 국민정부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원래 국민당은 손문이 만들었다. 그리고 손문만이 국민당을 이끌 수 있었다. 우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공합작을 이뤄낸 사람이 손문이고 좌파의 당권 장악을 막아낸 사람도 손문이었다. 1925년 손문이 죽자 국민당 내부는 곧바로 갈라졌다. 왕정위, 호한민, 요중개 등 얼마 전까지도 혁명동지로서 함께한 인물들이 권력투쟁에 있어서 적으로 변했다. 손문 사후 권력투쟁에서 장개석이 허숭지를 쳐내고 당내 좌파와 공산당을 공격하며 군권을 장악한 건 전편에서도 다뤘었다. 장개석은 어느 정도 집안정리를 마치고 그토록 원하던 북벌에 나섰다. 그리고 새로운 경쟁자를 만나게 됐다. 상계 군벌 당생지였다. 국민혁명군 전적총지휘 겸 제8군 군장으로 합류한 당생지는 북벌 초기 양호(호남, 호북)에서 진행된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장개석이 강서성에서 손전방의 오성연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일진일퇴를 벌이는 동안 당생지는 회유와 공격으로 오패부의 직군을 무력화시켰다. 무한 삼진의 함락은 당생지가 이뤄냈다고 봐도 좋았다. 당연히 장개석의 명성이 떨어지는 동안 당생지의 명성은 올라갔다. 야심도 커졌다. 당생지는 반장(反蔣)하는 당내 좌파와 손을 잡아 국민혁명군 총사령 자리를 가져가려고 했다. 광주 국민정부는 무한으로 천도했다. 이 과정에서 장개석은 완전히 배제됐고 무한정부는 장개석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갖은 애를 썼다. 장개석은 당내 좌파와 공산당이 장악한 무한정부가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방관할 인물이 아니었다. 4월 12일, 상해에서 장개석이 사주하고 현지 폭력 조직이 행동대로 나선 전면적 공격이 실행됐다. 하송림(何松林)이라고도 알려진 노동자 규찰대(糾察隊)의 지도자 왕수화(汪壽華)는 구타 당한 끝에 모래밭에 생매장되었다. 거리에서 총살과 참수가 집행됐다. 어떤 이들은 산채로 기관차 화통에 던져졌다. 훗날 '4.12 반혁명 정변' 또는 '4.12 청당(淸黨)'으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은 아예 무한정부와 결별했다. 장개석은 추방됐던 국민당 우파의 거두 호한민과 손을 잡고 남경에서 다른 국민정부를 세웠다. 이를 무한과 남경의 옛 이름 강녕(江寧)에서 한 글자씩 따와 '영한분열(寧漢分裂)'이라 부른다. 장개석은 남경정부의 국민혁명군을 3개 로군으로 재편했다. 제1군은 제1로군 예하 부대가 되어 장강을 넘어 강소성을 공격했다. 북진하며 양주(揚州), 연수(連水), 해주(海州), 명현(名縣), 서주(徐州)를 차례로 공격했다. 곧 있으면 산동성도 눈에 들어올 법했다. 하지만 무한정부가 동정을 선언하고 당생지가 자기 군대를 이끌어 남경을 노리자 장개석은 장강 이남으로 부대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손전방과 장종창이 기회를 잡았다. 북벌군이 서주에서 패배하자 순식간에 전선은 장강까지 수백 킬로미터 후퇴했다. 이런 실패에 장개석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 장개석의 빈 자리는 이종인을 수장으로 하는 계계 군벌이 메꿨다.
용담 전투 당시 계계 군벌의 주요 지휘관들이다. 왼쪽이 국민혁명군 총사령 대리 이종인, 가운데가 동로군 총지휘 백숭희, 오른쪽이 제7군 군장 하위
8월 26일, 손전방이 8개 사, 6개 혼성 여 7만여 명을 이끌고 장강을 도하했을 때 제1군은 용담(龍潭) 동쪽에 있는 진강(鎭江)에서 상해, 항주에 이르는 철도를 지키고 있었다. 용담은 남경성 태평문(太平門)에서 30 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남경시에선 훨씬 가까웠다. 제1군은 통신선이 끊어져 남경과 연락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상급부대 지휘관인 백숭희는 군비 조달 문제로 상해에 가있었다. 백숭희는 손전방의 도강을 인지하고 당일 03시 용담역을 확보하여 손전방이 상해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했다. 항주에 있던 류치(劉峙)의 제1군 제2사가 급히 증원됐다. 상황이 바뀌어 손전방이 용담역을 점령하자 호항로(滬杭路, 상해-항주 철도)에 배치된 제1군 제1, 제3, 제21사도 용담 방면으로 증원됐다. 제1군은 예하 사장 중 하나인 류치가 부상당할 정도로 격렬히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했다. 제1군 제22사가 탈취당했던 서하산(栖霞山)은 최대의 격전지가 됐다. 계계 군벌 하위(夏威)가 이끄는 제7군이 이제는 안국군(安國軍) 제1방면군이라 불리게 된 오성연군과 고지전을 벌이는 동안 제1군은 남경 외곽에 집결해 태세를 정비했다. 손전방의 편의대(便衣隊)가 남경성 요화문(堯化門)에 나타났단 소문이 돌자 정부는 패닉에 빠졌다. 장개석 하야 이후 영한의 통일을 위해 남경에 왔던 담연개와 손문의 아들 손과(孫科)는 하루에 몇 번이고 국민혁명군 총사령 대리였던 이종인에게 전화를 걸어 전황을 물었다. 29일, 이종인은 도망치려던 하응흠을 붙잡고 반격 작전을 논의했다. 제1군 군장 하응흠은 자기 부대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제1군은 서하산 전투에선 제외되는 대신 진강에서 대기하다 둘로 나뉘어 하응흠이 제2, 제21, 제22사를 이끌고 백숭희가 제3, 제22, 제14사를 이끌어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제1군과 하위가 이끄는 제7, 제19군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가하자 이미 서하산을 포함해 여러 지점을 놓고 국민혁명군과 일진일퇴를 벌이던 오성연군은 용담 일대에 모두 모여있었고 병력은 6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기세는 꺾이지 않아 30일 새벽 국민혁명군이 공격에 나섰을 때도 오히려 역습에 나서기도 했다. 서하산, 청룡산(靑龍山) 같은 고지대를 장악한 오성연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후방에 장강이 있어 보급이 쉽지 않았다. 특히 북벌군에 가담하고도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해군이 작정하고 장강을 차단하자 굶어죽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31일 05시부터 시작된 교전은 손전방이 지휘소 삼은 시멘트 공장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히 벌어졌다. 제1군은 계계 군대와 함께 결국엔 용담역을 탈환해냈다. 손전방은 일부 지휘관만을 데리고 간신히 장강 이북으로 빠져나갔다. 북벌군은 최악의 위기를 넘겼다. 거기엔 제1군이 있었다. 비록 지기도 했고 패잔병들이 남경성 인근에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며 군장 하응흠이 중간에 싸울 수 없다는 소리까지 했다. 참전했던 황포군관학교 5기생들 중 500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제1군과 북벌군은 승리했다. 도강한 안국군 7만명 중 5~6만 명은 사상자 내지 포로가 됐다. 1910년대부터 손전방 아래 최정예 부대였던 북양군 제2사는 공중분해 됐다. 손전방과 안국군 잔존 병력이 7~8리짜리 포켓에 모였을 때 제2사와 제4, 제7, 제9, 제10, 제11, 제12, 제13, 제14사, 제15, 제27, 제29보충여, 제1혼성여 등 6만여 명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부대는 손전방이 다시 강북으로 돌아갔을 땐 남아있지 않았다. 손전방은 재기할 여지를 잃어버렸다.
전임자와 후임자. 왼쪽이 하응흠이고 오른쪽이 류치다. 황포계의 핵심 일원으로써 이후 승승장구하지만 둘다 결말이 마냥 좋진 않았다.
용담 전투가 끝나고 제1군 예하에 9개 사가 있었다. 각 사의 주둔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지휘에 불편함이 생겼다. 이미 북벌이 시작될 때부터 제1군은 둘로 나눠져있었다. 그래서 9월 26일, 제1군은 제1, 제9, 제32군으로 분리됐다. 용담 전투에서 제2사를 지휘했던 류치가 군장을 겸임하게됐다. 보정(保定)육군군관학교 제2기 보병과를 졸업한 류치 역시 황포군교의 교관이었다. 예하의 다른 2개 사 중 제1사 사장은 호종남(胡宗南)이었다. 황포군교 1기생으로 1924년 11월 소위로 임관했으며 이듬 해 2월 중위로 진급했다. 이후 상위(대위), 소교(소령), 중교(중령), 상교(대령)를 거쳐 1927년 5월 소장(준장~소장)으로 진급하며 제1군 제1사 부사장 겸 제2단 단장에 임명됐다. 소위에서 장군까지 30개월 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시대상과 출신을 감안해도 호종남의 진급은 빨랐다. 기수 내에서도 1등이었다. 호종남에 대해선 이후에도 할 말이 많다. 제22사 사장은 장광내(蔣光鼐)였다. 장광내는 제대로 된 군관학교 출신은 아니었다. 청말 기초교육과 군사교육을 병행하던 육군소학당과 육군중학을 거친 인물이었고 오랜 세월 혁명에 투신해왔다. 장광내는 황포계가 아니라 월계 군벌의 일원이었다. 1925년 7월 건국월군 제1사가 국민혁명군 제4군으로 개편되자 제10사 부사장을 지냈다. 5년 뒤 상해에서 일본군에 맞선 중국 측 주요 지휘관 중 하나가 된다.
재편된 제1군은 후퇴했던 옛 길을 따라 다시 북진에 나섰다. 천진과 포구(浦口)를 잇는 철도 진포로(津浦路)를 따라 강소성을 가로질렀다. 한때 오패부를 배반하며 '동북왕' 장작림에 비교되는 '서북왕'으로 떠올랐다 몰락했던 풍옥상이 수원(綏遠)성 오원(五原)에서 손문의 동맹을 자처하며 자기 군대를 국민연군(國民聯軍)으로 칭하며 다른 방향에서 안국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신해혁명 이래 산서(山西)성을 장악하고 대륙의 패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진(晉)계 군벌 염석산(閻石山)도 산서성 밖으로 나와 안국군을 공격했다. 염석산보단 남쪽에서 안국군에 맞서던 국민연군이 하남성을 장악하고 동진하여 제1군과 만났다. 두 군대는 함께 강소성 서주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한때 러시아 백군 잔당과 장갑열차로 대표되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군벌 장종창도 확실히 몰락했다. 상황이 좋아지면서 장개석은 다시금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복귀했다. 해가 넘어가 1928년 1월 류치가 제1군단 총지휘를 겸하게 됐고 부군장엔 장정문(蔣鼎文)이 임명됐다. 절강육군강무당 출신으로 1917년 손문이 북양군벌을 상대로 진행한 북벌 중 하나였던 호법전쟁에도 참전한 인물이었다. 1923년엔 상교였지만 1924년엔 상위였다. 병참 업무를 맡고 있었으나 직무에 성실치 않고 부수입에 열중한 것이다. 황포군교에서 제1기 제2구대 구대장을 맡다가 군사교관으로 옮겼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덕에 장개석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기회가 많았으며 장개석과 같이 훈련을 살피던 '갈렌(Galen)'이란 가명의 소련 군사고문 바실리 블류헤르(Vasiliy K. Blyukher)가 즉석에서 던진 질문에 잘 대답하여 블류헤르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덕에 중용됐다.
1928년 4월 7일, 장개석은 '제2차 북벌'을 선언하고 4개 집단군으로 이뤄진 모든 국민혁명군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장개석의 제1집단군이 29만 명, 풍옥상의 제2집단군이 31만 명, 염석산의 제3집단군이 15만 명, 영한분열과 재통합 과정에서 무너진 당생지의 군대를 흡수한 이종인의 제4집단군이 24만 명이었다. 여기에 어느 집단군에도 속하지 않은 사천성이나 귀주성의 소규모 군벌 군대도 합하면 1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5월 1일 북벌군은 황하 남안에 도달했다. 5월 30일엔 북경에서 100 킬로미터 떨어진 보정이 함락됐다. 6월 4일 장작림은 북경을 버리고 자기 근거지인 동북으로 돌아갔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장작림이 탄 열차는 북경을 빠져나와 황고둔(皇姑屯)역을 출발했을 때 폭발이 일어나 교량째로 열차를 날려버렸다. 장작림과 같이 있던 심복 오준승(吳俊陞)은 즉사했다. 장작림은 살았지만 부상이 심했고 4시간 뒤에 죽었다. 6월 6일, 북벌군이 북경에 진입했다. 이로써 북벌은 끝났다. 아직 동북은 봉계 군벌의 손아귀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자리를 이은 장학량(張學良)은 국민정부와 일본 사이를 오가다 국민정부를 선택했다. 동북역치(東北逆幟)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중국은 다시금 한 깃발 아래 통일됐다. 장개석은 북경 벽운사(碧雲寺)에 안치된 손문의 유해를 찾아갔다. 손문의 영전에 북벌의 성공을 알리는 글을 읽은 장개석은 그대로 관을 부여잡고는 펑펑 울었다. 풍옥상이 장개석을 부축여 현장을 빠져나왔다. 수십 년을 따랐던 손문이 평생 해내지 못한 일을 장개석은 2년 만에 해냈다. 얼마나 감정이 복받쳤을까. 이런 행동에 정치적 계산이 없다곤 못해도 이때 장개석의 오열이 완전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벌을 성공으로 이끈 장개석은 남경 자금산(紫金山)에 중산릉(中山陵)을 만들고 손문의 유해를 북경에서 옮겨왔다. 1937년 일본군의 점령 이후에도, 1949년 공산화 이후에도 손문의 유해는 자금산 중산릉에 남아있다.
어쨌든 이렇게 북벌을 완수했으니 이젠 새 나라를 만들 때였다. 가장 큰 문제는 비대해진 국민혁명군을 줄이는 일이었다. 1926년 7월 북벌 개시 당시 8개 군이었던 국민혁명군은 1927년 8월 37개 군으로 급격히 늘었다. 1928년 초엔 4개 집단군이었고 앞서 언급했듯 병력은 1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투항하거나 회유한 군벌 부대로 제대로 된 군인들은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1928년 7월 작성된 '군사정리안'은 이런 잡군을 최대한 없애고 50~60개 사 규모의 소수 정예 군대를 만드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많은 부대가 감축되었다. 이렇게 줄여도 150개 사와 30개 독립 여가 있었고 연말엔 장학량의 봉군이 '동북변방군'이란 이름으로 편입되면서 오히려 더 늘어났다. 제1군도 이런 흐름에 맞춰 제2사, 제22사 일부와 제33군 제2사를 통합해 제1사, 제1, 제22사 일부, 군 교도단 일부와 제33군 제3사를 통합해 제9사로 편성했다. 당시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제1군
- 제1사 사장 류치, 부사장 장극요(張克瑶)
- 제1여 여장 서정요(徐庭瑶)
- 제2여 여장 호종남
- 제3여 여장 장승치(張承治)
- 제9사 사장 장정문, 부사장 악상여(岳相如)
- 제25여 여장 감려초(甘麗初)
- 제26여 여장 이연년(李延年)
- 제27여 여장 겸임 악상여
서정요는 보정군교 3기생으로 한때 환계 군벌의 사병인 참전군에서 복무한 적 있고 1920년엔 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했다. 1922년부터 월군에서 활동하여 연장, 영장을 역임했고 1925년 8월 제1군 제3사 제8단 단장에 임명되면서 제1군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불과 몇 년 뒤 항일전선에서 싸우고 독일, 프랑스, 소련 등을 유학하며 통신, 기갑 병과 등에서 활약하게 된다. 악상여는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적은 없는 사람이다. 1894년 사람을 모아 지주의 곳간을 털어 빈민을 구제하다 체포된 경력이 있었다. 1905년 반청 혁명 조직인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고 1911년 손문이 이끄는 혁명파 조직이 광주의 양광총독부를 공격하려다 실패로 끝난 황화강(黃花崗) 봉기에도 참가했다. 황화강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갔고 혁명파와는 크게 연을 두지 않았다. 1923년엔 고향에서 회상자위군(淮上自衛軍)이란 조직을 만들어 2천 명을 소집해 환계 군벌 마련갑(馬聯甲)에게 맞섰다. 이후 국민혁명군이 창설되자 제4군 제7여 제3단 단장을 역임했다. 4.12 사건이 일어났을 땐 반장 성향을 보였다. 악상여는 당시 장정문의 제9사 부사장 겸 제1여 여장이었지만 상해로 가 반장 제1종대 사령을 자처했고 중공의 초기 근거지를 보호하는데 기여했고 줄곧 친 공산당적 행보를 보이게 된다. 감려초는 황포군교 1기생이다. 제1군 제1사가 감려초의 자대였다. 동기생인 호종남에 비하면 진급이 느려 1936년에야 소장으로 진급하게 되고 나중엔 제5군 군장이 되어 1942년 스틸웰(Joseph W. Stillwell)이 거하게 망친 버마 진입 작전에 동행하게 된다. 이연년 또한 감려초와 동기다. 북벌 중 일제가 자신들이 후원한 북양 안국군정부가 불리한 상황에 놓이자 북벌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제남(濟南) 사건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경력이 있었다. 이후 당연히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 사장, 군장, 집단군 사령, 병단 사령을 모두 지내고 국부천대를 함께하게 된다.
제1군은 북벌 과정에서 진정한 정예부대로 활약했다. 무한, 남경, 상해, 서주 등 북양 세력의 여러 요충지를 공격하는데 있어 제1군은 자리를 비운 적이 없고 끝끝내 맡은 임무를 모두 완수해냈다. 이제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북양 세력이 떠난 자리엔 북벌을 거치며 지나치게 커진 세 집단군의 수장들이 장개석과 마찰을 겪고 있었고 해결책은 무력 밖에 없다는 것과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을 거치며 군국주의화 되어가는 일본이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되는지 말이다.
정보추
공산당 진짜 한심하게 팽당했네
군벌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