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라크의 최고행정관 제리 브리머가 자신의 영지에 도착했다. 코네티컷 주의 하트퍼드 출신인 그는 필립스 아카데미 고등학교와 예일 대학 사학과를 나왔다. 이후 하버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땄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하다가 프랑스의 정치과학 그랑제꼴을 졸업하여 프랑스어와 프랑스요리에 능했다. 프랑스에 치를 떨던 부시 행정부의 유일한 친불파였던 셈이었다.
키신저가 '지배광'이라 평한 그는 이라크에 도착하자 이라크의 민심을 수습하는 행보를 보였다. 방법은 간단했다. 이라크인들을 만나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이라크인들은 파괴된 인프라의 복구와 치안 회복 등에 대해 하소연했고 브리머는 이 모든 것들을 수습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지배광이라 불리던 그의 성격이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어떠한 문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훗날 브리머는 회고록에서 이라크를 통치하기 위해 50만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고백했지만 정작 이라크 최고행정관으로 근무하던 시기에는 이라크에 병력이 충분하다고 큰소리쳤다. 그래서 그는 최고행정관 시절에는 이라크 경찰력만으로 치안을 회복하려 했다. 브리머는 치안 문제는 범죄자들을 길거리에 풀어넣은 후세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브리머가 이라크에 오기 전부터 이라크 상황은 엉망진창이었으니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과연 브리머가 온 후론 상황이 나아졌을까? 브리머는 자신의 이라크 통치의 3대 과제에 대해 설명했다.
1. 전기, 수도, 기본 시설의 복구.
2. 은행을 열고 대출, 월급 지급을 재개함으로 현금 유동성을 확보.
3.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이걸 대기업으로 발전.
후세인 정권은 24년간 이라크를 통치했는데 사회주의적인 방법이 많았다. 예컨대 석유, 전기, 비료는 무료였고 수백개의 국영공장은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배급해주었다. 브리머의 눈에는 이 빨갱이스러운 정책은 존속되어선 안됐다. 브리머는 이라크가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받을 것이라면서도 이를 강행하려 했고 이라크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면 안되냐는 주변의 지적에 대해서 이라크인들이 경제개혁을 하지 않으면 민주개혁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리머는 이라크인들의 발전을 위해 열정만은 대단했다. 브리머는 이라크가 서독, 일본처럼 미국의 지원으로 발전하길 원했다. 브리머는 우선 연합군임시행정처 명령 8호를 통해 해외유학을 금지한 후세인의 정책을 폐지했다. 이 조치는 브리머의 서명 한번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랬다. 브리머는 이름을 써갈기는 것만으로 이라크의 미래를 뒤흔들 조치들을 마음대로 내렸고 그 과정에서 어떤 구속은 물론, 이라크인들의 의견 수렴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혔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한 우리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기 거북하실지도 모르지만 이는 사실입니다."
이 말에 그린존의 저자인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은 혹시 자신을 맥아더로 여기냐는 질문을 했고 브리머는 자신은 맥아더가 아니며 다른 누구도 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브리머는 일찍이 부시와 면담에서 자신에게 전권을 요구했다. 그는 13000킬로미터 떨어진 백악관이 자신을 간섭하는 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라크에 도착하고 나서 브리머는 국무부의 스티븐 해들리에게 자신이 미국의 어떤 기관의 구속도 용인하지 않으며 그들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 통보했다. 즉 관료주의적 안정장치인 '각 기관 간 과정'을 묵살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안하무인격의 요구를 부시는 정말로 큰일은 미국 정부에게 물어보고 행한다는 조건으로 모두 승인해주었다. 브리머는 이렇게 마음대로 굴었지만 자신의 부하들은 매우 엄격히 단속하였고 부하들과 미국 정부의 접촉에 쌍심지를 돋우었다. 브리머는 공식적으로 각 기관에게 직접적인 업무를 받지 말라고 경고했고 이 때문에 국무부는 임시행정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가히 첩보 행각을 벌여야 했다. 브리머는 주 이라크 미국 대사 칼릴자드와 같은 이라크의 인맥과의 접점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보고 철저히 배제했으며 오로지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자들만 곁에 두었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너무 가혹한 조치를 취하지 말라는 토니 블레어의 조언 따위야 브리머는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브리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서류들은 순식간에 처리되었고 브리머는 수많은 보고문들에 시간이 남으면 코멘트까지 달아서 돌려보냈다. 그의 안목도 일단은 탁월해보였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일이 다름아닌 이라크 군대의 해산과 바트당원 숙청이었다. 자신이 곧 이라크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으스대던 아흐메드 찰라비, 아야드 알라위 등의 이라크 망명자들은 수니파 일원으로 이라크 외무장관 출신의 80노인인 아드난 파차치를 영입했다. 그들은 브리머가 곧 자신들을 부를 것이라 예상했으며 고급 클럽에서 사병들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며 미리 아부해두려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브리머는 그들에게 임시정부 따윈 없다고 통보했다. 경악한 망명자들은 이라크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맡고 싶어 한다고 하자 브리머는 이라크인의 대표도 아닌 주제에 뭔 소리냐고 크게 화를 냈다. 브리머는 이것이 백악관의 결정이라고 통보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독단이었다. 망명자들의 정부를 세우라고 브리머에게 독촉했던 국방부도 경악했다. 부시도 임시정부의 수립을 권고했지만 브리머에겐 대통령도 국방부도 국무부도 성가신 간섭꾼이었다. 브리머는 찰라비 등이 이라크인에게 인기도 없고 자신들이 다 해먹는 정권을 세우려 한다는 것은 간파했다. 이건 국방부가 줄곧 무시해왔던 것이었으니 이걸 파악한 것은 나쁘지 않은 안목이라 할 수 있었다.
브리머는 대신 망명자, 이라크 내부인사, 여자, 남자, 수니, 시아, 아랍, 쿠르드를 망라한 25인의 위원회 설립을 제안했다. 이 위원회는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라크 신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과도단계였지만 실제로는 브리머가 이라크를 지배하기 위한 방패막이였다. 브리머는 헌법을 제정하고 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자신이 이라크를 통치하겠다고 선포했고 그 과정을 최소한 2년으로 잡았다. 망명자들은 시끄럽게 보이콧하겠다고 난리를 쳤으나 모두 위원회에 들어왔다. 2003년 7월 13일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3명의 시아파, 11명의 수니파, 기독교도 1명으로 구성되었다. 수니파 중엔 쿠르드족이 5명, 아랍인이 5명, 투르크메니스탄 인이 1명이었다. 이중 3명이 여성이었고 9명이 망명자였다. 브리머의 제멋대로의 방침에 이라크 전역은 물론 미국까지 경악했다. 콘돌리자 라이스도 미국 정부에 조언도 구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2.
2003년 9월 8일 브리머는 워싱턴 포스트에 이라크가 자치를 할 수 있는 7가지 세부사항이 담긴 로드맵을 공개했는데 헌법을 이라크과도통치위원회가 만들 것이란 말에 시아파가 반발했다. 이라크 시아파의 최고 거물인 아야톨라 올 오즈마 알리 알 시스타니는 미국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헌법을 마음대로 만들 것을 우려했고 설상가상으로 뉴욕대학 로스쿨 교수 노아 펠드만이 헌법 자문관으로 선출되자 그들의 우려는 극에 달했다. 펠드만 교수는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아랍 전체가 유대인이 이라크의 신헌법을 만든다고 알리며 소란을 피웠고 결국 알 시스타니가 나섰다. 시스타니는 콘돌리자 라이스가 시아파의 바티칸이라 평한 시아파 성도 나자프에 거주하면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그의 권위는 실로 대단했고 그는 정교 분리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겠다는 미국의 발상에 호의적이었고 미국 정부는 시스타니를 이라크의 벤저민 플랭클린이라 부르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브리머는 시스타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연합군임시행정처 전체가 다 그랬다. 그들은 몇달만에야 시스타니의 중요함을 알고 시스타니와 협상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스타니는 외국인과 이교도는 일절 만나주지 않는 사람이었고 이에 브리머는 플로리다에 사는 이라크계 미국인 비뇨기과 의사를 보냈다. 그 다음에 보낸 외교사절은 제약회사 직원이었다. 이걸 보고 이라크의 시아파 정치인들은 기가 막혀 하면서 교황과 협상할때 의사를 보낼 생각이냐고 항의했지만 브리머는 시스타니를 설득하는데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CPA(연합군 임시행정처)가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을 동안 시스타니는 파트와를 선포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뽑은 헌법 작성 위원회가 '이라크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이라크인들의 국가적 정체성과 고귀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시스타니의 요구는 이라크인들이 직접 뽑은 대표자들이 새로운 헌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시스타니의 완강한 반대에 브리머의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워싱턴에서 NSC 회의가 소집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시스타니의 선거를 열자는 주장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시스타니를 지지했지만 브리머는 대통령이 뭐라건 아야톨라 올 오즈마가 뭐라던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지지할 파트와를 선포해줄 다른 성직자를 찾아올 것을 명령했다. 그에게 알 시스타니는 그저 검은 터번을 두른 늙은이였을 뿐이었다. 알 시스타니의 영향력을 아는 미국인들도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알 시스타니의 의견이 옳았음에도 깔아뭉개버렸다.
브리머는 최소 자신이 2005년까진 집권할 거라고 천명했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빠져나가는 안에 대해선 일부로 무시했다. 브리머의 이 7가지 계획안은 미국 정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국무부의 콜린 파월 등은 브리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브리머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떠벌리고 나서야 알았다. 브리머는 이라크의 선거법과 유권자 명부가 없다는 구실로 선거도 열지 않았다. 선거를 열면 바트당과 종교극단주의자들만 좋아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그렇다고 이라크인들이 포함된 통치위원회에게 권력을 주지도 않았다. 그들이 민주적으로 선출되지 않았단 이유였다. 브리머는 자신이 이라크의 권력자로 군림하는 것만이 이라크를 위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결국 미국 정부도 브리머가 너무 안하무인으로 날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는 NSC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사항들이 바그다드에서 곧바로 외부에 공개되는 바람에 문제가 일어난다고 항의했다. 제리 브리머는 자신도 국방부와 연락하고 싶었지만 럼즈펠드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제멋대로 정한 결정 때문에 워싱턴이 뒤집히는 일은 계속 벌어졌다. 결국 2003년 9월말 라이스는 부시에게 바그다드와 워싱턴을 조율할 기관이 필요하다고 했고 부시도 동의했다. 책임자로는 전 인도 대사인 로버트 블랙윌이 정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국무부가 국방부를 몰아내고 이라크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고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생어 등의 보도에 펜타곤은 분노에 미쳐 날뛰었다. 결국 부시는 계획을 번복하고 CPA의 통솔권을 국방부에 남기기로 했다. 도널드 럼즈펠드는 라이스에게 당신이 대통령에게 얼마나 누를 끼쳤는지 아냐고 따졌고 라이스는 이라크를 이렇게 망친 거야 말로 진짜 누라고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그나마 럼즈펠드라도 이라크를 통제했으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럼즈펠드는 이번 일 이후 이라크에서 아예 손을 놔버렸다.
CPA와 브리머가 아야톨라 올 오즈마를 무시했던 것은 이라크의 시아파 통치위원들이 자신들이 아야톨라 올 오즈마를 설득시킬 수 있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은 것도 컸다. 당연히 아야톨라 올 오즈마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던 전문가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뜯어말렸지만 브리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브리머의 주권이양 프로젝트는 대혼란에 빠졌다. 아야톨라 올 오즈마의 파트와 때문에 통치위원회는 알 시스타니가 말했던 것 외에는 미국과 어떠한 조건에도 합의하지 않으려 했다. 이미 10월에 전문가들은 그의 계획이 실행될 수 없음을 알고 11월부터 브리머를 설득했으나 그가 인정한 것은 11월 10일이 된 후였다. 브리머는 럼즈펠드와 라이스, 파월에게 자신의 계획을 재조정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시아파 위원들에게 아야톨라 올 오즈마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던 것을 실수라고 시인했다.
출처: https://blog.naver.com/dk01337
병신들만 계속 기용하는 거 보면 개꿀잼이지
브리머인가 그 1편에서 이라크군해산이나 하는 멍청이가 문제인사 그런 머저리를 사용하자고 해놓고 통제 못하는 부시가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