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1944년 9월 25일 국민돌격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관련 법령 발표를 미루다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등으로 이뤄진 대프랑스 동맹군이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을 꺾은 기념일이었던 10월 18일에 맞춰 국민돌격대법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히틀러는 선전의 목적이든, 아니면 자신만의 과대망상을 충족하기 위한 목적이든

프로이센의 역사에 영광스러운 날들에 맞추어 자기 자신과 그의 행동을 부각시키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1806년 예나-아우스터리츠에서 프로이센이 겪었던 크나큰 치욕을 갚아 준 중요한 전투였고

그렇기에 이 날에 맞춰 법령을 발표한 것은 비록 양면전선에서 위기에 처했지만

독일해방전쟁 당시의 프로이센처럼 결국은 제 3제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제3제국 전체가 전투태세에 돌입하면 나폴레옹에 맞서 국가를 개혁하고 군을 재건한 프로이센의 위업을 다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돌격대의 현실은 1813년에 나폴레옹에 맞서 프로이센군 재건의 주축이 되었던 란트베어(국토방위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16세 미만의 히틀러 유겐트들과 1차 대전의 참전용사들은 징집될 때 그들의 고향을 지키게 되리라 믿었지만

많은 이들이 연합군의 멈출 줄 모르는 진격에 맞서라고 등을 떠밀려 동부와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시 노동이 여전히 최우선 순위였기에, 일요일마다 4시간씩 받는 훈련이 고작이었다.

군복이 없으면 평상복을 입고, 챙이 좁은 중절모나 납작한 운동모를 쓰는 것으로 "제복"을 대신했다.

무기와 탄환이 턱없이 부족해, 전쟁 막바지 몇 달 동안은 소위 국민돌격소총을 생산했다.

이 총은 대부분 조잡하게 급조한 수동 노리쇠식 소총이었는데

일부는 탄창이 없어서 한 발 쏠 때마다 새 탄환을 일일히 장전해야 했고, 일부는 아예 가늠쇠를 조절할 수가 없었다.



- "2차 세계대전 시크릿 100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