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과 만주국의 건국, 그리고 관동군의 만주 배치는 소련의 러일전쟁 트라우마와 안보불안증을 강하게 자극하는 행위였습니다. 그 결과 소련은 1929년에 두둘겼던 허약한 장쉐량 군벌이 아닌, 훨씬 잘 무장되고 강력한 관동군을 극동 국경지대에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런 사태에 대해 상당히 유화적으로 일본을 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만주국이 불승인되었음에도, 소련은 만주국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승인하지 않는 묘한 노선을 취했습니다. 만주국 내에서 공산주의운동이 무자비하게 탄압당해도, 소련은 이에 대한 비판과 논평을 자제했습니다. 대일유화책의 절정은 1935년에 소련이 운영권을 가진 동정철도를 일본에 매각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일 유화책은 전간기 스탈린 외교가 대외팽창과 무력행사보다는 5개년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존버하며 제국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먼저 긴장조성을 하지 않는다는 노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관동군은 소련의 대일유화책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유화책을 사용하는 동시에 관동군에 대비해 극동에 병력증강을 하고 있었는데, 관동군은 소련의 병력증강을 명분삼아 관동군의 병력증강과 세력확대 및 무력도발을 정당화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소련은 일본과의 충돌을 당장은 회피하거나, 하더라도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 쌓이다가 터진것이 하산 호수 전투와 할힌골 전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