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본부와 관동군이 구체적으로 대소작전계획(연도작전계획)을 작성하게 된 것은 1933년부터이다(기안은 1932년 여름).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전장은 소련 영내로 하며 우선 만소 국경 동부(둥안, 무단장 방면)에서 소련 영내로 급속히 진격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지상전력과 항공전력을 격파한다. 그 후, 그동안 전력을 유지하고 있던 국경 서부(다싱안링, 외몽골 방면)에서 공세로 나와 소련군에 결전을 강요하고 이를 격파한 뒤,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 방면으로 진격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동정면에서의 제1기 회전, 서정면에서이 제2기 회전, 바이칼 호 방면으로의 진격 순인데 이 순서는 1936년도의 작전게획까지 이어졌다. 동정면의 공세는 동원개시(개전결의)로부터 약 2개월 후에 시작하고, 대략 2개월 저도에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동정면에서 공세로 나온 뒤, 허를 찔러 서정면에서 결전한다는 이 작전의 최대 포인트는 최초 동정면에서의 공세가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을지의 여부였다. 망냑 개전 직후에 행하는 동정면에서의 대공세가 좌절된다면 그 후의 결전도 진격도 불가능했다.


관동군의 1935(쇼와 10)년도 대소작전계획은 '소수로서 다수를 치는' 일본 육군의 전형적인 작전이었다. 우선 전쟁이 시작되면 전력을 다해 만소 동부국경(동정면)에서 항공전력을 격멸해 제공권을 확보하고, 지상군 주력(10~11개 사단)은 국경선을 돌파해 공세를 취한 뒤 소련의 주둔군을 격멸한다. 1935년도부터는 그 시점에서 북정면(흑하 방면)에서 지원작전(4개 사단 정도)을 펼쳐 국경선 부근의 시베리아 철도를 분단시킨다는 계획이 추가되었다(철도를 분단시키면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보급이 불가능하게 된다.) 동정면에서의 작전이 성공하면 그곳의 6개 사단 정도를 서정면(외몽골)으로 전용하고 신규 병력을 합쳐 모두 18개 사단을 편성한다. 이렇게 편성된 18개 사단은 소련군 주력과 결전을 벌이고 이를 격파, 바이칼 호 부근까지 진격한다. 이것이 참모본부와 관동군의 대소전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관동군의 판단에 따르면 소련군 주력이 서정면에서부터 진군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정면에서의 공세가 실패한다면 시나리오는 어그러지고 전선은 붕괴되는 것이었다. 또 동정면에서의 공세가 보기 좋게 성공할 때까지 서정면이 잘 버틸 수 있을지의 문제도 있었다. 


동서 양면의 정면공세계획을 포기한 것은 1937년도의 대소작전 계획부터이다 여기서는 동정면의 병력 전용을 전제로 한 서정면에서의 결전계획이 치소되었고, 동부에서의 결전만이 채택되었다. 또 동부에서의 공세계획이 더욱 면밀해지고, 대규모 공세 전이 초동작전도 설정되었다. 초동작전에서는 미리 국경지대에 전개한 기습 병력이 소련 측 국경 거점이ㅡ 취약한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돌파하게 했다. 그렇게 소련군을 교란시켜 공세작전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다. 이렇게 초동작전이 성공하면 틈을 주지 않고 주력공세(15개 사단을 기간으로)를 가해 일거에 동정면의 소련군을 격멸한다는 계획이었다. 동정면에서의 공세 완료 후 서정면으로 병력을 전용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결전을 피하고 시종일관 지구전 태세를 갖추며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관동군 자신이 병력 부족으로 서졍면에서의 결전과 진격이 불가능하단느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작전계획은 그 후 북정면으로의 공세안이 대두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1940년도까지 유지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 육군은 1936년부터 포병 화력을 다소 증강하고 사단 내의 지원 전력을 강화했다. 이것으 극동 소련군과의 병력 차이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참모본부와 관동군이 대소작전구상의 붕괴를 막기 위해 내놓은 대책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육군 내 대소 강경파를 안심시킬 수 없었다.


야마다 아키라 (윤현명 옮김),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일본군의 팽창과 붕기』(어문학사, 2015), pp. 180-182.


한줄 요약: 상대가 누구던간에 아무튼 선빵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