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16일 베를린을 노린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이 공격당함.
소련군의 병력은 약230만명이었고, 전차 및 장갑차 6,520대, 항공기 7,500기, 화포 41,600문이었음.
반면에 독일군은 병력 약 766,000명에 전차 및 장갑차 1,500대, 항공기 2,200기, 화포 9,300문정도였음.
소련군의 막대한 전력은 군대라고 불리기도 힘든 나치 찌끄래기들을 격파하며 4월 23일 베를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함.
독일놈들이 아무리 발악해도 소련군을 이기기는 힘들었지만,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고, 중심부로 갈 수록 전투가 격렬해짐.
4월 28일 베를린 중심가로 연결된 몰트케 다리를 독일군이 폭파했으나, 화약 조절에 실패하여 다리가 멀쩡했고, 소련 제3충격군이 다리를 건너 옴.
치열한 교전끝에 제국 내무부 청사와 구 스위스 대사관을 점령한 소련군은 제3제국의 상징인 크롤 오페라 하우스와 제국 국회의사당을 노림.
1945년 4월 30일 아침 6시 크롤 오페라 하우스와 제국국회의사당 사이의 쾨니히플라츠 광장에 소련군의 압도적인 포격이 떨어짐.
제국 국회의사당과 크롤 오페라 하우스, 쾨니히플라츠를 수비하는 병력은 빌헬름 몽케 SS소장이 지휘하는 전투단으로 구성이 뒤죽박죽이었음.
제국 해군 소속 육전대
제국 공군 레이더 관제 병력과 대공포 병력
히틀러 유켄트 병력
무장 SS 병력은 다국적이었는데, 노르드 란드 사단 소속 덴마크, 노르웨이, 샤를마뉴 사단 소속 프랑스, 벨기에, 라트비아 사단, 소수의 푸른 사단 소속 스페인인들이었음.
국민 돌격대의 늙은이들과 부상자들까지 포함한 병력이었는데, 영문권 자료마다 다르지만 최대 1천명에서 최소 600명 수준이었음.
소련군 제3충격군 소속 제150소총 사단이 쾨니히플라츠의 몽케 전투단의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제국 국회의사당 전투가 벌어짐.
제12군단 소속 제66근위 전차 여단의 T-34 전차들의 지원아래에 시작된 전투는 격렬했음.
소련군 상부에서는 5월 1일까지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린터라 소련군은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것이었음.
몽케 전투단을 지원하는 것은 베를린 동물원 대공타워의 12.8cm 대공포의 화력과
무장 SS 제503중전차 대대 소속 게오르그 디어스 하사가 지원하는 314 타이거 2 중전차였음.
게오르그 디어스 준위의 전차는 이날 하루동안 30대의 T-34를 격파하는 위용을 보였으며, 괴니히플라츠 전투가 끝날때 까지 격파되지 않았음.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고 쾨니히플라츠 교두보는 격렬한 전장이 되었음. 4시간동안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방어선 돌파를 실패하자 소련군은 압도적인 포병화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음.
약 90문의 중화포가 지원사격을 퍼부었는데, 203mm포와 카츄사 다련장포가 주축이었음. 소련군의 포격으로 저항이 약해진 틈을 타 네고다 대령이 지휘하는 제171소총 사단 병력들이 지원하러 내려옴. 소련측 병력은 약 1만명으로 늘어남.
전투가 한창이던 4월 30일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에 제3제국의 영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부인 에바 브라운이 자살함.
히틀러가 죽은 사실도 모른체 전투는 계속되고, 오후 4시경 소련측 폴란드군 제1연대, 제2연대, 제3연대가 쾨니히플라츠 방어선 돌파를 시도함 자살에 가까운 임무였지만, 폴란드인들은 성공함.
오후 6시경 어둠이 내려왔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독일군은 제국 국회의사당안으로 들어가서 방어를 준비함.
제국 국회의사당안으로 들어가는 소련군은 각종총탄세례와 날아오는 수류탄등에 막대한 희생을 겪었음.
메인 홀부터 방 하나하나까지 각종 바리게이트와 장애물로 가득했음. 총탄이 떨어진 독일군은 야삽과 총검으로 덤볐으며, 독일군은 말그대로 죽을때까지 격렬하게 저항했음.
외국인 의용병들은 돌아갈 집이 없었으니 말그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음.
하여간 격렬한 백병전 끝에 22시 50분경 소련군은 옥상까지 올라오는데 성공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고, 다음날인 5월 1일 아침 퇴각하는 독일군을 보고 전투가 끝난 것 처럼 보였으나, 크롤 오페라 하우스 잔존 독일군이 탈환을 시도하면서 작은 교전이 벌어짐.
독일군은 결국 포기하고 떠남.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공군과 해군은 다음날 항복하지만, 무장 SS 생존병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탈출함.
약 300명이 항복했고, 200명이 전사했으며, 약4~500명이 중상을 입고 죽어갔는데, 소련군은 거들떠도 안봤음.
베를린 전투의 상징인 제국 국회의사당 깃발 게양 사진은 5월 2일에 찍힌 것임 당일이 아님.
결론 - 영화 몰락봐라 2번 봐라 더많이 봐라 명작이다.
썬더 베를린맵이 저거 약간 바꾼 거였네 - Fire at will!
콯2 켐페인이랑 비슷한거 같기도하고...?
비슷한게아니라 거기서 따온건데
꼴좋네 낄낄
네다빨
이거보고 네다빨이란 새끼는 팬티에 하켄크로이츠 그려져있음?
국회의사당 전투 하면 월앳워밖에 생각이 안나네 - dc App
스위스대사관 아직도 그자리에 알박기중
외국인 의용병 돌아갈 곳 없다는거 보고 꼴 좋다고 해야할지 불쌍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나치쉑들이 꼴 좋다고 해야되나 - dc App
발트3국처럼 뽈갱이들한테 당한 나라들 출신이거나, 현지에서 징병된 거 아니면 그냥 나치쉑들 맞음 - 서명 수집가(기네스 덕후)
베를린 공략전도 압도적인 전력차를 두고 독일군과 소련군의 교환비는 전쟁내내 나온거와 별차이 없었다던가 - dc App
띠용
소련도 베를린 공략 빨리 끝내려고 대공세 펼친것도 있지만 시가전 특성상 뚫기 어려우니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함
소련의 어떻게든 빨리 점령하려는 성급함+ 방자의 잇점+시가전 때문
신사(노인) 숙녀(여자) 어린이(유겐트) 동무(소련군 포로)여러분!
뻘한 얘기인데, 저 쾨니히스티거의 게오르크 디어스(Georg Diers)는 2016년까지 생존해있었음 - 서명 수집가(기네스 덕후)
치열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