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갤럼들. 한동안 갤에서 뻘짓만 하다가 드디어 정보글을 가지고 갤에 오게 되었음. 이번에 이야기할 주제는 2대전기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임

사실 이 전에 1편을 써서 갤에 올렸지만, 스스로 글을 살펴 보고 보강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다시 글을 써서 오게 되었음

우선 첫번째로 할 이야기는 원래대로 전간기의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로, 아프리카에 변화를 가져온 세가지 사건들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임.



 아프리카의 변화 그 첫번째는 바로 세계 제 1차 대전의 종전이었음

1차 대전의 패전으로 독일은 많은 식민지들을 승전국들에게 내놓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들도 그 주인이 바뀌게 되었음.

첫번째로 가장 빠르게 독일군 세력이 진압되었던 서아프리카의 경우 토고와 카메룬을 영국과 프랑스가 양분해서 가지게 되었음

그 다음으로는 1915년에 영국이 뤼데리츨란트, 나미비아를 점령했고, 이는 남아공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931년 남아공이 독립할 때도 함께 떨어져 나갔음

두번째로는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탄자니아는 영국의 것이 되었고, 전쟁 중간에 약삭빠르게 끼어든 벨기에는 루안다와 우룬디, 오늘날의 르완다와 부룬디를 가져가게 되었음.


두 번째는 대공황이 아프리카를 휩쓸었다는 점임. 갤럼들도 중학교 고등학교 때 제국주의 시기에 대해 배우면서 

유럽 열강들이 원자재를 수입하고 이를 이용해 만든 물건들 중 잉여품을 식민지에 내다 팔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임.

실제로 북아프리카의 농부들부터 남아프리카의 광부들까지 대부분의 아프리카인들은 농업과 광업 생산물을 유럽의 식민 모국에 수출하는 곳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그러한 업체들에 고용되어서 봉급을 받아가면서 살아갔음. 이 때문에 유럽에서의 수요가 큰 일부 산업들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었음.

 하지만 대공황이 불어닥치자 수요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이들의 수입도 줄어들게 되었음

수출품들의 가격이 적게는 50% 많게는 75%가 감소했고, 일꾼들의 봉급도 비슷한 수치로 감소했으며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실직자 신세가 되었으며 개개인에게 가중되는 노동 부담은 더욱 커지게 되었음

하지만 이 와중에 이를 어느 정도 비껴나간 곳이 있었음. 첫번째는 영국의 동남아프리카 식민지로

어느 정도 공업 기반이 갖춰져 있던 남아공이 경제 기반을 제공했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완충 효과를 볼 수 있었음

두번째는 얌과 같은 식민지 내부에서 소비되는 작물들을 기르던 농부들로, 가계 수입 자체의 감소로 인해 타격이 가긴 했지만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다른 작물들보다는 상태가 더 나았음.


이집트의 자글룰 파샤


세번째는 아프리카에 저항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음. 250만명이 넘는 아프리카인들이 1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이는 아프리카 인들의 의식 변화를 일으키는데 충분한 양이었음. 우선 민족주의의 물결들이 퍼져나가면서 이집트는 자글룰 파샤의 와프드당에 의해서 1922년 독립을 이루게 되었음

이집트와 묶여 있던 수단도 같은 권리를 요구했지만, 이는 묵살되었고 이집트와 수단은 이로 인해 분리되게 되었음

이와 비슷하게 튀니지에서는 데스투르당이 결성되어 독립 헌법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음

또한 알제리에서는 종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들과 권리 요구들이 이루어져 무슬림들의 시민권 확대 요구가 이어졌고

벨기에에서도 시몬 킴방구라는 기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저항 운동들이 이루어졌음.

또한 공산주의의 세례가 아프리카 전역에 쏟아지기도 했음. 우선 알제리에서는 공산당원 메살리 하지에 의해서 북아프리카의 별 이라는 단체가 세워졌음

또한 가나의 크와메 은크루마, 케냐의 조모 케냐타, 세네갈의 레오폴 상고르와 같은 훗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성립에 큰 기여를 하는 범아프리카 운동가들이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활발한 저항 운동을 펼쳐나갔음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공산주의를 반 식민주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용도로 활동하였음

또한 개중에는 공산당을 창건하면서 소련의 도움을 받으려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음.


 끌려가는 리비아인들


 네번째는 파시스트의 발길이 아프리카에도 미치게 되었다는 점임

우선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루돌포 그라치아니를 사령관으로 하여 원정군을 꾸려 리비아 평정 작전을 수행했음.

본디 리비아의 사누시파와는 1918년의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확실히 했었지만, 이 협정은 얼마 가지 못했고, 사누시파들이 이탈리아에 반발하였음.

이들은 게릴라전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 때 그라치아니는 게릴라전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사누시파 원주민들을 집단 수용소에 수감하였고,

이 수용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기아로 인해 죽어갔음.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10만 명을 넘겼고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음.

이러한 이탈리아의 잔학 행위는 1932년까지 이어졌음.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이탈을 우려하여 

1935년 차드와 리비아의 접경 지대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었음. 하지만 이탈리아의 군홧발은 에티오피아를 향했음.


 1935 10 3일 이탈리아는 40만의 대군을 몰고 오가덴 고원을 시작으로 하여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음

당시 에티오피아는 이미 서방의 외교 환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가였으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군대를 육성하고 있었으며

다수의 엘리트들을 육성하고 있었음.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5 5일 아디스 아바바가 점령당하고 황제가 수단을 통해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손아귀로 떨어졌음.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끈질기게 펼치면서 영국군의 동아프리카 점령 때까지 저항했고 왕은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으며

이탈리아 식민 관료들에 대한 암살 시도들도 펼쳐졌지만 자국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음.


이탈리아의 잔학 행위에 대해 항의하는 미국인들. 에티오피아가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만큼, 다수의 서구인들이 이들을 도우려 했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서 수많은 잔악 행위들을 벌였음. 우선 비행기를 이용하여 독가스탄들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하여 수많은 에티오피아 양민들을 학살했음

1937년에는 그라치아니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일어났는데, 그라치아니는 리비아에서 보여 줬던 편집증적 면모들을 보여주면서 보복으로 검은 셔츠단을 시켜 사흘 동안 3만 명이 넘는 에티오피아인들을 아디스 아바바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으며

이탈리아인들에게 고용되었던 그리스인들이나 아르메니아인 일부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함

그 이후에는 자신의 암살 시도와 연관되는 곳들을 닥치는 데로 뒤져가면서 연루자들을 가차없이 죽였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 사건들이 시작된 2 19일의 에티오피아력 표기에서 따 온 이름인 예카티트 12 라는 이름으로 에티오피아 역사에 기록되었음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