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모두들 알다시피 전쟁 초 육군은 북한군의 기습 총공세에 의해 한강 북쪽에서 붕괴해 버리는 대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음. 그럼에도 국군이 한강 남쪽에서 전력을 수습하고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치면서 UN군이 도착할때 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쟁 초 해/공군의 활약이 두드러졌기 때문임.

(내 뇌피셜이 아니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판단한 내용임.)


1. 해군의 초기 작전

한국 해군은 당시 병력 7천여명, 함정이 71척이었으나 전투력으로는 매우 빈약했고 장비도 열악했다. 그나마 다행인건(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진짜 서술한 내용.) 북한 해군 전력도 빈약하긴 마찬가지였다는거. 북한 해군 또한 연안방어나 육전대나 게릴라를 한국 후방에 몰래 상륙시키는 것 까지만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고 함.


6.25일 대대적인 공세를 보고받은 해군본부는 예하 전 해군부대에 비상경계령과 전투준비를 명령하였으며 더불어 각 정대 사령관들에게 적 함선 발견시 발포 및 격침 할 것을 지시함.


당시 2 정대는 동해, 1/3 정대는 서해를 담당하고 있었음. 해군은 하루 평균 21척의 경비정을 출동시켰다고 함. 해군은 육군의 작전과 철수를 돕기도 했는데 육군 제17연대가 백령도 웅진지구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돕고, 철수에도 도움을 줬다고 함.


또한 대한해협에서는 PC701 백두산함이 600여명 가량의 게릴라가 탑승해있던 북한 해군의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켜 적의 후방 교란 시도를 좌절시켰음.


한편 27일, 미 극동해군사령관 죠이 제독은 워싱턴으로부터 한국군 지원을 명령받고 이를 수행하기 시작함. 지정된 한국지원전대는 한국 해군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작전과 동일한 작전일 시행함. (해상 초계, 상륙 거부 및 함선 격퇴) 미 해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6월 30일 수원에서 미 해군과 한국 해군의 담당 섹터를 구분했는데 미 해군이 동-서해상에서 37도선 이북의 작전을, 이남은 한국 해군이 전담하기로 함.


2. 공군의 초기 작전

개전 당일 북한 공군은 한국 공군 소속의 김포, 수원 비행장을 타격하여 한국 공군의 무력화를 시도하였음. 문제는 한국 공군이 이를 저지할 전력이 전혀 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육군의 작전수행을 지원을 위한 정찰 및 연락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장비밖에 없었다고 함.


일단 한국 공군도 응전해야 하기에 연락용 및 연습용 항공기 18대를 출격시킴. 연락형 항공기들은 후방석에 정찰대원들이 30파운드 짜리 폭탄 2개를 앉고 같이 나갔다고 함. (폭탄 1개당 대략 13kg이니 총 26kg) 연습용 항공기는 그나마 폭장량이 컸는지 각각 8~10개의 폭탄을 탑재하고 출격했다고 함. 한국 공군은 26일까지 총 48회의 출격을 하였으나 27일에는 비축 폭탄이 다 소모되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고 함. 결국 6월 28일 북한 육군이 김포 공항을 접수하게 됬고 북한은 전투기의 일부를 김포 공항으로 이동시켜 이곳에서 출격, 육군의 지상작전을 돕게 함.


한국 공군이 반쯤 무력화 되었을 때 미 극동해군과 바로 동시에 미 공군이 같이 전개되고 한국 공군에 긴급히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7월 2일 한국 공군은 미 공군으로부터 F-51머스탱(군사편찬연구소에는 이렇게 써져있음.) 10대를 지원받고 다시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함. 작전내용은 대부분 소규모 근접항공지원이었다고 함. 아마 이때는 수원 비행장이 함락되기 전이었거나 일본에서 출격해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


이때 한국을 지원한 미 공군은 제5공군과 미 극동해군 소속 함재기들로 이들은 김포 공항을 포함, 이북의 평양, 평강, 온정리 등에 위치한 북한 공군기지를 공격하였고 7월 22일에는 북한 공군을 궤멸시켜 더 이상 북한 공군이 한국 및 미 해군 항공모함을 위협하지 못하게 함.


이 덕분에 국군은 전력을 보존하면서 퇴각에 성공, 이후 지연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고 이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