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남부군'은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지식인 이태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빨치산들은 남한의 토벌부대에 쫓겨 산속을 헤매면서도 배낭에는 조선은행권을 담아 다녔다. 잠깐 쉬는 동안에는 물과 땀에 절어 엉겨 붙은 돈을 정성스럽게 한 장 한 장 펴서 널어 말렸다. 4명밖에 안 되는 낙오병들은 산속에서는 쓸 수도 없는 그 돈을 서로 훔치기까지 했다. 사유재산이 없는 공산사회를 꿈꾸던 그들이 화폐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돈은 어디서 구한 것일까?
해방 직후 남북한은 화폐문제에 관해 접근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은 북조선중앙은행을 세운 뒤 47년 12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 교환비율과 한도를 달리해 일제강점기 때 쓰던 돈을 인민권(북한 화폐)으로 교환했다. 극심한 저항과 재산권의 변동이 뒤따르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1951년 7월 정부에 보고된 한국은행 지하금고 피탈 경위서. 은과 미발행 조선은행권을 ‘빼앗긴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은 운반 능력이 없어 ‘포기한 것’이었다. [사진 한국은행]
이에 비해 남한은 현상유지책으로 버텼다. 북한의 화폐개혁 직후 미 군정청도 화폐개혁을 검토했지만, 사회 혼란이 걱정돼 차일피일 미뤘다. 46년 초 공산당원들이 100원권 위조지폐를 만들어 온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구 화폐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도 화폐개혁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신설되는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의 이름이 적힌 화폐를 발행하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렸다(최초의 한국은행법 제117조).
북한은 2년 전 북한지역에서
회수한 조선은행권을 남한에서 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조선은행권을 제조하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임직원들이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쇄기와 인쇄원판들을 내팽개치고 피난 갔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5전부터 1000원까지 6종의 지폐 중 제일 많이 쓰는 100원권 인쇄원판을 골라 돈을 찍기 시작했다(1910년부터 59년까지 우리나라에는 동전이 없었다). 이것이 화폐대란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그런데 6월 28일 한국은행 본점을 접수한 북한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하금고에 가보니 수송작전의 차량부족으로 남겨진 금괴 260㎏과 은괴 16t이 있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서 105억원에 이르는 미발행은행권이 고스란히 있었다. 국군에 쫓기는 빨치산 이태의 배낭에 있던 지폐가 바로 그 돈이었다. 이것이 화폐대란의 두 번째 원인이었다.
[인천상륙 맞춰 조선은행권 퇴출 결정]
보고가 올라온 다음날 ‘금융기관 예금지급에 관한 특별조치령(긴급명령 제2호)’을 발표했다. 한 세대 당 1주일에 3만원, 한 달에 7만원으로 예금인출액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은행도 비상대책을 세웠다. 한국은행의 6개 지점을 통틀어 미발행은행권은 40억 원에 불과했고, 그것이 고갈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29일 구용서 한은총재는 한국은행 도쿄지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본 대장성 인쇄청을 통해 1000원권과 100원권을 새로 제작할 것을 지시했다. 만일 보름 안에 그 일을 끝내지 못하면, 대전 시내 은행들의 자기앞수표 용지를 회수해 그 위에 한국은행 총재의 도장을 찍고 임시화폐로 써야 한다고 다급함을 알렸다.
지시를 받은 김진형 도쿄주재 부총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를 찾아가 통사정을 했다. “1초가 아까운 지경”이라는 말을 들은 최고사령부는 일본 관료들을 압박했다. 노동자들이 툭하면 파업을 해서 최고사령부가 골치를 썩일 때였다. 7월 1일 대장성 인쇄청의 이지치 타츠오(伊地知辰夫) 장관은 “이런 상황에 최대한 협조하는 것이 (연합군에게서) 일본이 살 길”이라는 비장한 훈시와 함께 무기한 철야근무를 명령했다. 지시를 받은 일본 기술자들은 일요일인 2일 하루 만에 도안을 완성했다. 도안을 본 김진형은 대통령과 광화문의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며 집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그것을 토대로 도안이 수정되자 살인적인 강행군이 뒤따랐다. 미군이 작업자들에게 총을 겨누며 쉬지도 못하게 보채는 바람에 보통 6개월 걸리는 작업이 열흘 만에 끝났다.
7월 13일 김해공항에 새 돈이 도착했다. 해방 직후 군정청 시절 조선식산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해리 로빈슨 해군 소령이 공수했다. 7월 20일 새로운 은행권 발행이 공고되고, 22일 대구에서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새 돈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21일 미 공군이 서울 원효로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폭격했지만, 북한은 여전히 엄청난 양의 100원권을 갖고 있었다. 그 돈이 워커라인(포항-영천-창년-마산-통영에 이르는 저지선) 안쪽으로 넘어와 남한의 화폐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전쟁도 승산이 없다.
8월 28일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긴급명령 제10호)’을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100원권 조선은행권을 강제 퇴출시켰다(다른 종류의 지폐들까지 퇴출시킬 여력은 없었다). 처음에는 워커라인 이남과 제주도에서만 실시되다가 유엔군의 북진에 따라 점차 확대했다. 서울-경기-강원(10월)과 충청-전라-경상(11월) 지역에 이어 빨치산 출몰지역(1951년 4월)까지 확대되면서 남부군 이태가 경남 함양의 어느 산자락을 헤맬 때 그의 배낭에 있던 100원짜리 조선은행권은 시나브로 쓸 수 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경떡이면 삭제하겠음
전쟁이 총과 포만으로 하는게 아니라는걸 알려주는 유익한 글이었읍니다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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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전쟁이면 이런 문제도 있겠네.
대장성 직원들 ㅂㄷㅂㄷ거렸겠네ㅋㅋㅋㅋㅋㅋ
인쇄기는 파기하고 원판은 파손하던지 강물에다 버리거나 했어야. 금괴나 은괴는 아깝지만 포기하더라도 미발행권은 태워버리거나.
전글 보면 한강다리 폭파 20분 전에 한국은행 직원들이 건넜다는데 그럴 시간이 아예 없었을듯
전쟁범죄를 밥먹듯이하는 북괴새끼들
북괴가 애미뒤진 새끼들이고 개일성 혹부리 새끼들인거는 둘째치고 이 내용 중에 전쟁범죄가 있음? 위조지폐 뿌리는 작전은 2머전 때 여러나라가 하거나 시도했는데
와 기사 재밌게 잘썼다
금괴하고 은괴가 무지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