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민권운동이 활발하고 그 결과로 일본 국민의 피선거권과 선거권이 부여되며 자유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사조가 들어왔던 다이쇼 시대는 일본 육해군이 가장 설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가장 큰 위협인 소련과는 1921년에 시베리아 출병을 끝내고 일본군을 철수한다고 합의를 보며 당장 충돌할 일이 없어졌고, 영미와는 외교적으로 협조하는 기조를 계속하며 런던해군군축조약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때문에 군이 정치에 개입할 소지가 없지는 않았지만, 당장 군이 힘을 발휘할 곳이 없어지며 군에 대한 민간의 통제 수준이 메이지 시대보다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이란 미증유의 대전쟁을 겪은 서구에서 반전 평화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또 대규모 군사행동이었던 시베리아 출병이 성과도 없이 사상자만 남기고 끝나자 일본에서도 반전을 외치고 군을 질시하는 조류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민간에서는 장교단이 전투만 알지 일반교양은 없는 무식쟁이들이라고 비웃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실제 일본군 장교단의 교양 수준이 낮았던 것도 사실이라 이에 육군 내부 간행물에서도 장교단의 교양을 높여서 사회의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와 해군병학교 입교 신청자는 갈수록 줄어들었고, 위관급 장교들은 박봉에 시달렸으며 장교들은 장가도 제대로 못갈 거라는 비웃음을 담은 노래가 유행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장교가 전차에 타면 장교 군복의 버클과 박차가 시끄럽게 떨걱거리니 없애 달라는 민원이 육군성에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이 주도한 군축으로 실업자가 된 장교들 중 위관급 장교들은 육군성의 주선으로 민간학교의 교련교사로 재취업을 했는데, 교련을 선택하는 학교도 별로 없었고, 또 운 좋게 교련교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동료 교사들에게 무식하다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군 하대 풍조는 만주사변으로 한 방에 뒤집혔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군부에 대한 무한찬양에 나섰고, 대공황에 허덕이던 국민들은 만주 개척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군부의 "화끈한" 행동에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관계로 일본군 장교들은 이제까지 받은 박대를 다 보상받으려는 듯 길거리에서 거들먹거리고 행패를 부리는, 현재 우리가 아는 일본군 장교의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출처: 도베 료이치 (이현수·권태환 옮김), 『근대 일본의 군대』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03)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