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에 육군대신에 올라 제네바 군축협약을 준수하고 군 현대화에 필요한 비용확보를 위해 따라 육군 21개 사단을 17개 사단으로 줄이는 군축을 단행한 것, 그리고 1931년 말부터 1936년까지 조선총독으로 재임한으로 유명한 우가키 가즈시게 대장.
그의 인생은 총리대신이 되어 대권을 손에 쥐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비록 해체 대상인 4개 사단의 모든 장교와 부사관을 일괄 제대시키는 무자비한 군축으로 인해 원로 장성들의 엄청난 분노와 저주를 받긴 했지만, 우가키는 나름 카리스마도 있고 능력도 출중한 인물이라 육군 내에 추종자도 많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대 천황의 이름으로 국가의 모든 것이 철저히 통합된 완벽한 총력전 국가를 만들자고 개혁을 부르짖던 청년장교들은 우가키가 그들이 원하는 개혁을 이끌 적임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가키는 1929년에 다시 육군대신에 오르며 자신의 대권욕을 위한 일환으로 군부의 정치 관여를 막지 않는다는 의미의 훈령을 배포했습니다. 우가키는 훈령에서 원칙적으로 군인은 정치에 개입하면 안되지만, 군인에게는 국방이 정치보다 더 중요한 일이며, 만약 국방이 위협을 받는다면 군인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군부의 정치개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최초의 조치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육군 내 사조직인 사쿠라회는 1931년 3월에 육군대신 우가키를 총리로 옹립하는 쿠데타를 모의했습니다. 우가키는 사쿠라회의 추대를 받아들여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가키는 쿠데타 실행 직전에 갑자기 계획을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당시 야당인 민정당에서 우가키가 제대하여 민간인 신분이 되면 공천을 해 주겠다고 러브콜을 넣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가키는 위험부담이 큰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야당 공천을 통해 대권을 잡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때문에 3월 쿠데타는 해 보지도 못하고 무산당했고, 언론에 보도도 안된 덕분에 정부와 군부 소수 인사들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정당은 총선에서 여당인 입헌정우회에 패하고 말았고, 우가키는 결국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31년 말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는 식민지 조선을 대권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일본 본토와 함께 대공황으로 엉망이 된 식민지의 경제사정을 개선하고 대대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여 식민지의 불안을 안정시키는 업적을 세워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가키는 이리하여 "일본해 경제권"을 주창하며 흥남비료공장 건설, 나선항 개발, 남면북양 정책의 실시 등 각종 정책들을 야심차게 추진하였습니다. 우가키는 이를 통해 조선총독을 역임한 후 총리대신에 오른 데라우치 마사다케 대장처럼 자기도 총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가키 가즈시게를 암살하기 위해 1932년 3월에 한인애국단의 유진만, 이덕주를 파견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둘 다 해주에서 체포되었습니다. ㅠㅠ
그러나 우가키의 대권욕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군부 원로들은 여전히 우카기를 군축을 단행해 일본의 안보태세를 무너트린 역적놈이라고 저주하고 있었고, 3월 쿠데타에서 보여준 우가키의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에 청년장교들이 크게 실망하여 우가키가 개혁을 이끌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겁니다. 이 때문에 우가키는 당대에 총리대신 자리를 항상 노리고 총리대신으로 여러 차례 하마평이 올라도 결국 총리가 되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혹성"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쓰고 있는 소설에서 노망난 퇴역중장이 총독부 관리를 우가키의 종놈이라고 뜬금없이 폭행하는 장면은 군부 원로들이 우가키에게 가진 증오를 반영한 것입니다.
비명을 찾아서 보면 현 조선총덕이 차기 총리가 된다고 했는 데.아닌 경우도 있네
그건 대체역사물이고요. 실제 총독을 한 다음에 총리가 된 사람이 셋이었으니 그런 설정을 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