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에서 축출된 지 한 달 뒤인 1969년 11월 12일에 류사오치는 독방에서 사망했다.
2년전 체포된 뒤로 매일같이 인민대회에서 매타작을 당해 골병이 든 결과였다.
당뇨병에 폐렴까지 겹쳐 너무 병약해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지만
아무도 그를 씻겨주거나, 옷을 갈아입히거나, 심지어 변기를 사용하게 도와주지도 않았다.
온몸이 욕창투성이가 된 데다 다리엔 근위축증까지 걸렸는데도
간수들은 그가 자살할까봐 죽을 때까지 천으로 묶어 놓았다.
일찌기 그의 동료였던 류사오치를 <반역자, 제국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주인으로 섬긴 배신자>라 고발했던 저우언라이는
류사오치의 시신이 화장된 후 파티를 열어 자축했다.


허나 저우언라이가 보기에 당을 약화시킬 수 있는 수정주의 반동분자들은 아직도 넘쳐났다.

저우언라이는 주석에게 쓴 편지에서 전쟁 준비를 방해하는 소수 반동분자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 1월 31일에 당 중앙 위원회는 모든 <반혁명적 활동>을 타격하라고 요구하면서

<파괴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거의 다 반혁명적 행위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일주일 뒤, 2월 5일에는 <부패와 투기, 낭비>도 단호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에서 사용된 용어 중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법적인 정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요컨대 암시장에서 계란을 팔아도, 단체 급식소에서 식용유를 너무 많이 써도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틀을 벗어난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으로서 유죄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1970년 2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된 이 운동은 통칭 <일타삼반 운동>이라 불린다.

공산당이 이처럼 모호한 용어들을 사용한 이면에는 처음부터 꼬투리를 잡아 일반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의 삶이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후베이 성에서만 17만 3천 명의 용의자가 <반혁명 활동> 혐의로, 20만 7천 명이 <부패와 투기, 낭비>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 수치는 후베이 성 사람들 중 약 50명 중에 한 사람은 일타삼반 운동의 희생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