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PKKA입니다. 오늘 제가 발표할 것은 “8월의 폭풍 이전: 소련-일본 40년 관계사”입니다.
제가 이번 발표를 하게 된 계기는 제가 바로 이 책, 『8월의 폭풍』의 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청중들 반 이상 놀라서 술렁술렁)
어, 의외로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네요. 아무튼 지금 전자책으로 단돈 12,600원에 판매하고 있으니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광고는 여기까지 하고, 제가 『8월의 폭풍』 번역하면서 느낀 것은, 1905년에 러일전쟁이 종결되었고 만주작전은 1945년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대체 그 4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소련의 전면침공이라는 대파국에 이르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본 결과 다음과 같은 일들이 40년 동안 있었습니다.
제가 발표하고자 하는 것은 이 40년간의 상황을 쭉 보는 것입니다.
1. 러일 밀월 시대, 1905-1917
우선 1905년부터 1917년까지를 보겠습니다. 저는 이 때를 “러일밀월” 시대로 개인적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1905년에 러일전쟁이 포츠머스 조약으로 종결된 이후, 제정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는 전후처리가 끝나자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전쟁이라는 최악까지 갔으니, 이제 떨어질 데가 없어서 올라가는 것 밖에 없었어요. 포츠머스 조약으로 교통정리도 되었고요.
양군은 1907년, 1910년, 1912년 러일협상 남만주와 한반도는 일본이, 연해주와 북만주는 러시아가 영향권을 가지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탄을 묵인했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암살했을 때, 이토가 제정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러 갔던 것도 1910년의 러일협상과 관련해 사전협의를 하기 위해서 간 거였습니다.
(청중 한명: 어두운 표정)
러시아와 일본은 교통정리도 끝냈고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앙땅트, 즉 협상국으로 한 편이 되면서 관계가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한 편이었던 때
일본은 영국, 프랑스에 그랬듯이 제정러시아에도 물자를 신나게 팔아먹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깝다 보니 수출도 쉬웠지요. 제정러시아와 일본은 이를 넘어서서 1916년에 다른 협상국 몰래 비밀 동맹조약까지 맺었습니다. 이 조약의 목표는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면, 영국과 미국이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태를 공동으로 방지하고 중국에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현재까지 통들어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전무후무한 최고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러일밀월은 한 방에 깨져버렸습니다.
바로 레-닌이 등장한 겁니다!
(청중들: ㅋㅋㅋㅋㅋㅋㅋ)
2. 러시아 혁명과 소일 긴장의 시작, 1917-1931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은 멸망하고 전 세계에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것이라고 확신한 레닌은, 이른바 “민주주의 외교”를 내세우며 제정러시아가 협상국 국가들과 체결한 모든 밀약들을 만 천하에 공개한 뒤 이 조약은 모두 무효라고 선언했습니다. 자연히 러일동맹은 이 건으로 파기되었고,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이 사태를 충격에 가득 차 바라보았습니다.
독자적 동맹조약까지 맺은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조약파기로 사실상 적성국이 된 마당에서, 일본을 19세기 후반 내내 지배해 온 러시아혐오증이 부활하였습니다. 북방의 위협이라는 해묵은 테제가 부활한 것이죠.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견해도 힘을 얻었습니다. 데라우치 내각은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요구에 따라 시베리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극동으로 이송된 체코 군단이 봉기를 일으키고 시베리아의 백군 수장인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옴스크 정부에 가담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군사개입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들은 체코 군단의 인도적 귀환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러시아에 병력을 파견하였습니다. 한편 태평양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던 미국의 윌슨 행정부는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을 처음에는 제한하려고 하였지만, 체코 군단의 봉기로 결국 일본에 파병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파병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시베리아에 파병된 7만여 명의 일본군은 콜차크 군대를 지원하고 붉은 군대와 교전하였으며, 겸사겸사 연해주의 조선인 항일무장세력도 소탕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을 받던 콜차크는 실패하였습니다. 처음에 막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콜차크군은 우랄 산맥을 넘지 못하고 우파 전투에서 프룬제가 지휘하던 붉은 군대 동부전선군에 대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더하여 소비에트 정부는 1920년에 체코 군단의 무사귀환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무장해제와 콜차크를 넘길 것을 요구했습니다. 체코 군단은 결국 콜차크를 붙잡아 붉은 군대에 넘기고 체코로 귀환하며 사실상 시베리아 백군은 멸망했습니다.
한편 소비에트는 시베리아 백군이 거의 망해 위협이 되지 않는데다가 데니킨과 브랑겔 같은 유럽 러시아 백군 세력과의 싸움에 집중하며 시베리아에 신경쓰기 힘들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했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완충국으로 설정한 극동공화국이었습니다. 이 극동공화국은 참 특이했던 게 다당제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였습니다. 의회의 다수당은 볼셰비키지만, 맨셰비키와 사회혁명당도 있었습니다. 국내에는 극동공화국의 외무장관이 한인 여성 공산주의자인 김알렉산드라였다는 점이 알려져 있습니다.
극동공화국의 깃발
비록 시베리아 백군이 멸망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시베리아의 점령지를 강점하며 어떻게든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시베리아 점령지는 7만 정도의 병력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했고 겨울이 되면 동사자가 속출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그 때 어느 때입니까? 다이쇼 데모 데모크라시 시절입니다! 민권운동과 시민운동이 활발해지고 유럽에서 반전평화운동이 유입되며 “얻을 것도 없는 시베리아 출병은 왜 했냐? 이럴 바에야 철수하자!”하고 국내적으로 철수 요구가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1921년에 극동공화국과의 협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일본군을 철수한다는 합의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한편 소비에트는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남은 것은 국제적 고립과 전쟁의 폐허였습니다.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망했어요. 헝가리 벨러 쿤 공산정권? 망했어요. 폴란드 진공? 망했어요.
(청중들: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결국 소비에트는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국교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를 시작했습니다.
소련은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라팔로 조약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구 국가들과 관계를 회복했고, 일본과도 관계회복을 꾀했습니다.
1925년, 소련과 일본은 국교정상화 협상을 타결하여 다시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점령한 북사할린에서 최후의 일본군도 다 철수했는데, 일본이 교활해요.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 무장세력에 대한 무장해제를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소비에트야 자기 일이 급하니 결국 다 들어줬죠. 물론 아주 내준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고종이 아관파천했던 러시아 공사관이 소련 영사관으로 바뀐 겁니다. 사회주의의 침투가 강해지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옛 러시아 공사관이 소련 영사관으로 쓰이고 경성 한복판에 붉은 깃발이 계양되게 된 것은 상당한 상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소련 영사관은 경찰과 헌병의 집중감시를 받긴 했지요.
소련 영사관으로 변한 러시아 영사관과 초대 경성주재 소련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
그러나 이미 소비에트에 대한 일본의 시선은 공포와 적대감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분위기 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활발히 전개되는 상황은 일본의 기득권 세력, 특히 군부에 공포감을 일으켰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입니까? 천황제는 미신이고 재벌 해체하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하자는 사상입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일본 군부세력에 있어서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사상이자 철저히 없애버려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1925년의 치안유지법 통과로 인한 국내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1921년에서 1929년까지는 소련이 극동에서 이렇다 할 군사적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전후복구하는데 바빠서요.
또 중국의 친일 군벌인 장쭤린이 만주를 차지하며 소련과 식민지 조선 사이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소련이 쳐들어와도 일단 장쭤린이 맞아줄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 사회의 러시아혐오증은 아직 폭발적으로 팽배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1929년에 일어났습니다.
당대 만주를 지배하던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은 소련이 운영권을 가지고 있는 중동로 철도를 강제적으로 접수했습니다. 일본은 이때 소련을 싫어하고 무서워하면서도 은근히 소련 편을 들었습니다. 소련은 싫지만, 중국이 중동로 철도 이권을 되찾으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국 이권도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청중 한명: 만주철도요!)
그렇습니다. 일본의 만주철도주식회사 운영에도 위협이 갈 수 있다는 판단이 일어났지요. 또한 당대 일본은 중소갈등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장기화될 거라고 보아 이것이 일본에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졌습니다. 장쉐량 군대는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15일 만에 소련군에게 맥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중동철도를 무력으로 탈환하고 노획한 봉천군벌 깃발을 노획해 인증샷을 찍은 소련군
이는 일본에서 러시아공포증을 팽배하게 만들었습니다. 소련과의 완충지대 역할을 기대한 봉천군벌이 쉽게 무너졌다는 것은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만주 전체를 석권할 수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련의 1차 5개년 계획도 일본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련 정부의 과장이 있긴 했지만, 5개년 계획으로 소련은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갑자기 세계적인 산업국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당대 일본은 1927년 쇼와 금융공황과 1929년 경제대공황으로 경제가 엉망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 군부는 소련과의 군비경쟁과 생산력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을 했습니다. 산업 능력이 비교적 뒤떨어진 "가지지 못한 나라"였던 일본의 입장에서 소련의 급성장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봉천군벌을 날려버린 뒤 그 자리에 소련과 일본 사이의 실질적인 완충지대를 확보하고, 아울러 만주의 잠재된 자원을 통해 일본의 산업생산능력을 높여 소련과의 격차를 좁혀야 한다는 주장이 군부 내에서 대두되었습니다. 즉 만주를 차지해야 한다 이겁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냐? 만주사변이었습니다!
아조씨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그 발표회 그거 가고 시펏는디 일이 바빠 몬 갔읍니다... 흑흑... 짱재밌었을 것 가튼디요.
ㅠㅠ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그건 잘 모르오
고맙소! 고맙소!
소련 대사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되면서 철수했던 모양이오....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대사관에 묵었다는 기사를 보았으니... - dc App
당연한 결과겠지요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고오맙소!
러일밀월이라니 지식이 늘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고오맙소!
고오맙소!
조용히 개념추
고오맙소!
좋은 글은 추천. 오래오래 사셔서 좋은 논문 많이 쓰셈.
고맙습니다
예전에 군부대숙청 가지고 글 쌌던 게이인데 레퍼런스를 드디어 밝힐 수 있게 되었읍니다. Jeong-ha lee, We are the Red Cavalry, 시카고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찾아보세염
오 역시 이정하 박사님 논문이었군요! 감사합니다 ㅎㅎ
하편은 어디있나! 하편은 어디있어! 글쓴이를 잡아라!
방금 중편을 올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