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선생이 1808년부터 1817년에 걸쳐 집필한


경세유표를 보자




10명이 1대 (분대)

3대가 1기 (소대)

3기가 1초 (중대)

5초가 1사

5사가 1영

5영이 1군


이다.


여기에

1대(분대)에 대장(隊長) + 화병(火兵) 을 더해 12명이라고 한다.

1기(소대)는 36명이니

1초(중대)는 108명이고 여기에 기총(旗摠)(소대장) 3명을 더해 111명이라고 적었다.

1사(대대?)는 555명이 되고

1영이 2775명이란다.


보병만 이렇고



기병, 기술행정, 표하군들은 저 편제에 들어가 있지않다



보병 + 기병 + 표하군 + 기술행정부대 를 포함한 병력이 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총 인원수 였다.


이 편제를 토대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신미양요때 진무중군으로 임명된 어재연장군이 이끌던 부대의 규모를 계산해보자.




훈련도감의 보군(步軍) 2초(哨), 화약 1000근, 수노궁(水弩弓) 10장, 구전(具箭) 300지(枝), 별파진(別破陣) 30명, 그리고 금위영의 보군 1초, 화약 1000근, 수노궁 10장, 구전 300지, 별파진 10명, 그리고 어영청의 보군 1초, 화약 1000근, 수노궁 10장, 구전 300지, 별파진 10명, 그리고 총융청의 아병(牙兵) 1초, 불랑기(佛狼機) 30문(門), 구환(具丸) 2000개, 대포 3좌(坐), 화약 1000근을 지금 내려 보낼 것입니다. 네 영의 보군 각 1초는 새로 차임된 중군(中軍)에게 배속시키고, 훈련도감의 보군 1초는 새로 차임된 판관(判官)에게 배속시켜 금방 출발할 것인데, 각자 단속하여 임기응변하여 응원하게 하소서. 그리고 군량미 1000석은 호조의 저축창고에 있는 쌀을 떼어 주되 주교사(舟橋司)로부터 배로 운반하여 수령해 가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삼군부가 강화도에 증강시킬 병력은 총

훈련도감 보병 2초 + 별파진(포병)30명
금위영 보병 1초 + 병파진 10명
어영청 보병 1초 + 별파진 10명
총융청 아병('어금니 아'를 쓰는 군영의 중요병사) 1초

약 600여명이다.

여기서 '네 영의 보군 각 1초는 새로 차임된 중군(中軍)에게 배속' 시킨다고 되어있는 병력이 어재연이 실제로 이끄는 병력이니

어재연은 실제로 보병 약 440여명을 이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련도감 + 어영청 + 금위영 병력을 합치면

최소 1만명 이상의 전투병력이 나오는걸 감안하면 이런 소규모 증원으로 추정컨대

조선수뇌부의 서양세력에 대한 인식은 국경에서 깔짝거리는 해적정도 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손돌목 포격사건은 6월2일(음력 4월15일)에 있었고.

삼군부의 증원결정은 6월1일(음력 4월14일)에 있었다.

증원결정후 8일후 (4월 23일)에 상륙이 시작되니

병력배치하고 전투준비하기엔 너무 시간이 빠듯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6월10일(음력 4월 23일)에 미군이 상륙해서 초지진을 하루만에 박살내버린다.


11일 (음력 4월 24일)에 조정이 보고를받고


덕진만호자리가 비어있으니


빨리 임명된 인물을 보내자는 기록이 보인다.


(이미 11일에 덕진진은 박살나고 다음날 광성보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미군의 작전도(?) 6월 10일에 (음력 4월 23일)에 상륙해서 6월 12일(음력 4월 25일) 에 광성보까지 밀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상륙병력은 600여명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어재연이 거느린 부대는 많아야 500으로 추정되니


압도적인 병력차로 찍어누를수도 없었고


강력한 화력이 있는것도 아니니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야 이길수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미군의 포병대가 광성진을 두들긴다.



광성보옆에 대모산. 미군 포병부대가 저기서 방열함.



미군의 포병대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도


전열붕괴없이 백병전까지 벌인 조선군이 사기는 높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광성보마저 박살이나고


12일 (음력 4월25일) 진무사 정기원의 장계가 올라오는데


'광성 못지켰어요! 중군을 파견해주세요!' 라는 내용이다.


이에 경기중군 김선필이라는 자를 진무사중군으로 임명과정생략하고 빨리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13일 (4월 26일) 의정부가

'자세히는 몰라도 지키는신하가 다른 중군으로 보내달라는 청을 한걸보니 어재연이 죽은 모양입니다 아들이 있는데 불쌍하네요..... '

라는 이야기를 한다.





14일(4월 27일)에 다시 진무사 정기원이

'초지진이랑 덕진을 못지킨것도 죄송한데 광성에선 장수와 군사가 죽었으니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ㅠㅠ' 하는 장계를 올린다.

여기서 미군이 잠시 물러나며 소강상태에 들어간걸 알 수 있다.



그리고 15일(4월 28일) 구체적으로 피해상황을 보고받았는지.


초관(중대장)급 인물의 전사과정도 언급되어있다.


이렇게 신미양요는 끝나고.


신헌으로 대표되는 훈련도감의 신무기제조와 본격적인 쇄국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