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선생이 1808년부터 1817년에 걸쳐 집필한
경세유표를 보자
10명이 1대 (분대)
3대가 1기 (소대)
3기가 1초 (중대)
5초가 1사
5사가 1영
5영이 1군
이다.
여기에
1대(분대)에 대장(隊長) + 화병(火兵) 을 더해 12명이라고 한다.
1기(소대)는 36명이니
1초(중대)는 108명이고 여기에 기총(旗摠)(소대장) 3명을 더해 111명이라고 적었다.
1사(대대?)는 555명이 되고
1영이 2775명이란다.
보병만 이렇고
기병, 기술행정, 표하군들은 저 편제에 들어가 있지않다
즉
보병 + 기병 + 표하군 + 기술행정부대 를 포함한 병력이 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총 인원수 였다.
이 편제를 토대로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신미양요때 진무중군으로 임명된 어재연장군이 이끌던 부대의 규모를 계산해보자.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6월10일(음력 4월 23일)에 미군이 상륙해서 초지진을 하루만에 박살내버린다.
11일 (음력 4월 24일)에 조정이 보고를받고
덕진만호자리가 비어있으니
빨리 임명된 인물을 보내자는 기록이 보인다.
(이미 11일에 덕진진은 박살나고 다음날 광성보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상륙병력은 600여명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어재연이 거느린 부대는 많아야 500으로 추정되니
압도적인 병력차로 찍어누를수도 없었고
강력한 화력이 있는것도 아니니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고서야 이길수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미군의 포병대가 광성진을 두들긴다.
광성보옆에 대모산. 미군 포병부대가 저기서 방열함.
미군의 포병대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도
전열붕괴없이 백병전까지 벌인 조선군이 사기는 높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광성보마저 박살이나고
12일 (음력 4월25일) 진무사 정기원의 장계가 올라오는데
'광성 못지켰어요! 중군을 파견해주세요!' 라는 내용이다.
이에 경기중군 김선필이라는 자를 진무사중군으로 임명과정생략하고 빨리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13일 (4월 26일) 의정부가
'자세히는 몰라도 지키는신하가 다른 중군으로 보내달라는 청을 한걸보니 어재연이 죽은 모양입니다 아들이 있는데 불쌍하네요..... '
라는 이야기를 한다.
14일(4월 27일)에 다시 진무사 정기원이
'초지진이랑 덕진을 못지킨것도 죄송한데 광성에선 장수와 군사가 죽었으니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ㅠㅠ' 하는 장계를 올린다.
여기서 미군이 잠시 물러나며 소강상태에 들어간걸 알 수 있다.
그리고 15일(4월 28일) 구체적으로 피해상황을 보고받았는지.
초관(중대장)급 인물의 전사과정도 언급되어있다.
이렇게 신미양요는 끝나고.
신헌으로 대표되는 훈련도감의 신무기제조와 본격적인 쇄국이 시작된다.
이런 글 좋아요 - dc App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크흠.....알잖아.....거기까지 파고들면 군갤화력발전소 가동됨
훈련도감 신무기 제조라니 그것도 궁금하다
그건 예에전에 한번 썼었슴. 훈국신조기계도설이랑 훈국신조군기도설에 나와있는 신미양요로 촉발된 신무기 제작노력..
한강수로가 이양선에게 막히는걸 가장 신경썼는지. 수중기뢰인 수뢰포라는 부분을 가장 상세하게 적어놨음
개추박는다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거리를 제어보면 대략....1.5km 에서 2km정도 거리인데. 12파운드 곡사포면 사정거리 안이었다고 봐야....
개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