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2월 22일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동풍이 크게 불었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조금 멎는 듯하기에 길을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두 승장 삼혜, 의능과 의병장 성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육지로 오르려는 것 같이 하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은 부실한 것을 골라 동쪽으로 보내어 역시 육지에 오르려는 것 같이 하였다.

왜적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할 때 전선을 모아 곧바로 돌파하니, 적들은 세력이 나뉘고 약해져 거의 다 섬멸되었다.

발포 2선과 가리포 2선이 명령도 없이 돌입하다가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당한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 일본 측 기록 "협판기(와키사카 전기)"에 따르면, 이 때 와키사카가 조선 수군의 무기를 탈취했다고 함)

얼마 후 진도의 지휘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는 짓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매우 통분하다. 이 때문에 원 수사를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 때문이다.

돛을 펴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그 충무공을 상대로 일본 수군 최초로 판옥선 1킬을 따내기 직전까지 간 일본 제일의 명장 겐킨

충무공을 이렇게까지 분통해하게 만든 다이묘는 실로 전무후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