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1월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줄곧 대소련전을 외쳤고, 그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소련군이나 몽골군의 국경 침범을 지적하면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고봉 사건에서 조선군이 소련 측에 철저하게 패한 것을 두고 “저들은 조선군이어서 그렇다. 관동군이라면 절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 언제가 기회가 오면 소련군을 공격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노몬한 사건의 발단은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후인 1939년 4월 관동군이 정리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이었다.

이 요강은 관동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시달되었는데, 실제로 이 요강을 기안한 사람은 쓰지였다. 일본의 판단만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그곳에 소련군이나 몽골군이 들어오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초원이나 강, 산 등에는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방이 그곳에 진입해오면 “주도면밀한 준비 아래 철저하게 응징하여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게다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소련 영토에 진입하거나 소련 병사를 만주국 영토로 끌어들여 머물게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소련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소련령으로 들어가거나 소련 병사를 포로로 삼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요강에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선 부대에 명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대소 군사 충돌 대망론’은 장고봉 사건의 교훈이 전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장고봉 사건 후 참모본부는 현지 군의 군사 행동에 제동을 거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과도 완전히 모순된다. 참모본부에서는 이나다 마사즈미 작전과장을 비롯한 참모들이 이러한 방침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요강을 전달받은 현지 군은 당연하게도 소련군과의 군사 충돌을 대망하게 된다. 만약 군사 충돌이 없었다면 현지 군은 “국익도 생각하지 않는 오합지졸”이라는 비난을 받을 터였다.

이 요강이 시달되고서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게 노몬한 사건이었다.

-알라딘 eBook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중에서


자나깨나 북진을 외치는 군붕이의 심정으로 대소련전을 외쳤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