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주구장창 나오는 청야입보는 그야말로 국가대 국가가 목숨걸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리는 전면전에 특화되었고 봉건제같은 분권적 사회에서는 성립할수 없다.
청야입보는 이기는데 모든걸 몰빵해서 내가 가진 생산능력을 초토화시키는 전략이라 중앙집권제가 발달되어서 여기저기서 아이고 나죽는다 하는 곡소리를 억누를 수 있고 거대한 규모를 가진 경제능력으로 피해를 상쇄시킬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봉건제처럼 규모가 작은 단위의 연합체제로는 성립이 안됨.
하지만 이겨도 너무 피해가 커서 자주써먹을수거 없음.
고구려조차도 수나라의 백만러시에 너무 힘들어서 당나라 건국하자마자 일단 저자세로 나감.
당나라도 당태종이 실패한 뒤로 청야입보를 깰 전술을 고안하다 국경지대에서 소수병력으로 치고 빠지고 비사성에서 출격해서 소수로 뒤치기 하는식으로 히트앤런 함. 고구려의 청야입보의 맹점을 파악하고 비정규전적 성격의 전술로 고구려의 힘을 빼놓으려 한 것.
일단 이런식으로 소수로 준동해도 청야입보를 하는 상태에선 반복적으로 자신의 생산력을 깎아먹어야 하니 고구려는 점차적으로 국경지대 생산력이 고갈되면서 요동방어선이 붕괴되고 고종의 침입때부터는 압록강 청천강에서 주로 교전함.
한마디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전략.
어쨌든 전면전에는 효과적이고 고려도 거란침공때 잘 써먹음.
하지만 거란과 흡사한 전략전술을 가진 몽골군한테는 써먹어보지도 못하고 박살이 났는데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정답은 무신이 집권하면서 전시과에 기반한 고려의 국방체제가 박살이 났기 때문
쿠테타 정권은 정통성이 취약하고 기존집권세력을 뒤엎고 집권해서 기존정권과 연계된 세력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반란에 편승해 재반란을 일으키려는 세력도 방어해야함.
그래서 측근세력을 뻥튀기시키게 되고 사병강화를 시키다보니 농업국가에서 사병을 키울 돈은 땅에서 나오고 따라서 고려를 지탱하던 경제근본인 전시과가 무너짐.
전시과로 밥먹고 복무하던 고려군도 무너짐.
그래서 거란군때는 제대로 작동하던 북방의 성들이 우르르 무너짐. 1차때는 그나마 귀주성이 분전했는데 이때도 기존 거란침입때와 이질적인 무력집단이 등장하는데 이게 별초임.
별초들은 무신들의 사병집단이고. 고려의 지방군과 중앙군이 활약할 자리에 별초가 들어감.
거란침입때도 개경이 함락된적이 있고 난리가 났지만 그래도이때는 동계에서 지원이 오고 후방에서 고려군이 유격활동을 하는 등의 전략적인 움직임이 있었는데 몽골침입때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안보임.
그리고 40년에 걸친 몽골침입기 동안 붕괴된 고려군은 고립된 채 산발적으로 저항하다 무너졌고 중앙군 대신 세력을 잡은 별초들은 강화도에서 파티 경비만 섰음.
어쨌든 몽골에 항복하고 나서도 중앙군체제는 제대로 복구되지 않음. 중앙군 복구를 위해서는 토지제도 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권문새족들이 산천을 경계로 땅을 가진다고 할 정도로 소수에게 토지가 집중되어있었기 때문. 따라서 왜구나 홍건적의 침입때 그동안 한국역사에서 자주 보던 식의 산성에서 방어해서 적군을 돈좌시키고 반격해서 승리하는 중앙집권적인 전략 그림보다는 개인적으로 사졍을 거느린 무장들이 돌아다니며 야지에서 회전을 붙어 승리하는 그림을 자주 보여줌.
이는 언급했듯 중앙군이 제대로 복구되지 않고 사병들이 득세했기 때문. 그 대표가 이성계의 가별초들이다.
이 사병들은 농민들을 소집해서 얼마동안 번을 세우고 돌려보내는 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같은 동료들과 같이 훈련하고 같은 지휘관 밑에서 싸워서 팀웍 전투기술 모두 번상병들보다 우월했음.
그래서 승리할경우 붕괴된 산성방어체제에 의존하기 보다 야전에서 요격하는 그림이 자주 나옴.
그리고 그 가별초를 이끌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요동까지 찍고 돌아온 이성계 입장에야 선호하는 전술이 무엇인지도 자명함.
태조의 아들인 태종조차도 적이 쳐들어오면 나가 맞서 싸우지 성에 틀어박혀 뭐하냐고 하기도 함.
즉 수성중심의 수세적 전략이 아니라 태조의 군사적 성공경험을 바탕으로 한 공세적 전략이 국초의 조선군 가본전략이 됨.
또 고려할 것은 조선이 중앙집권에 집착했기 때문에 행정과 통제에 유리한 읍성에 집중해 청야입보에 근거한 산성방어를 선호하지 않음. 따라서 산성들을 수습하고 축성하는데 상대적으로 무관심함.
마지막으로 조선은 유례없이 안보환경이 안정적이었음. 일단 명은 비위 맞추긴 힘들어도 조선이 노력해서 안정적으로 외교를 해서 전쟁위험은 낮았고 신경쓸건 여진족이나 왜구같은 약탈자들임. 전면전 위협은 없다시피하고 비정규전이 조선이 수행할 전쟁이었다는 것.
그나마 왜구도 조선초에 요동으로 갔던 왜구들이 크게 갈려나가면서 왜구준동이 줄어들었고 조선은 여진족에 집중함. 물론 전라 경상에 수영2개씩을 설치해 왜구에 대비함.
그런데 조선의 육군이 약탈자를 막는 비정규전에 점차 특화됨. 문종때 명이 개털리는걸 보고 전면전 대비용으로 오위진법을 창안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수행하는 방식은 기병과 궁시중심의 비정규전대비용이었음. 여진족들이 빠르게 말을 타고와서 털어먹고 가니 얘들을 막으려고 어쩔수없이 그렇게 수행했던 것. 그리고 다양한 전투 상황대비를 위해 융통성을 주려고 부대원간 간격도 넓고 전투단위도 소규모화됨.
그렇지만 이런 전술에서는 부대원의 개인역량이 중요해지는데 훈련도가 높고 전투경험이 풍부했던 가별초전력과 달리 조선은 사병을 혁파하고 농민병중심의 번상체제를 주력으로 함.
따라서 전투인원의 전투능력은 떨어지고 전투원개별역량이 중요한 전술체제에서 전투력이 급감함.
그래도 조선초기에는 그나마 전투능력도 괜찮았고 주적이었던 여진족들의 무장상태가 빈약해 충분히 지키고 서서 활을 쏘고 기병을 몰아서 격퇴가 가능했음
세종대에 여진족들이 갑옷과 투구도 없이 싸우니 방패와 창을 세우면 겁많은 자도 도망치지 않고 싸운다는 언급이 있음.
여기서 조선군전술이 1선에 팽배수가 방패를 들고 서고 2열은 창병 그 다음이 사격병과라는 뜻인데 뉘앙스로 볼때 나서서 근접전을 수행하지 않는 사격병과중심의 전술임을 알 수 있음.
당시 주적이었던 여진족들을 궁시만으로 충분히 격퇴할수 있어서 갑사취재나 무과등에서 궁시위주로 과목이 개편되고 기창세 보창세등은 경시해서 중기때가 되면 창쓰고 칼쓰는 법을 잊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됨.
그런데, 이 전술에서 중요한건 1차적으로 사격병과를 보호해줄 근접병종인데 이미 중기를 거치며 군역이 요역화되고 대립이 성행하면서 군역기피현상이 횡행하면서 근접병과의 역량이 급감함.
이렇게 병사개개인의 역량이 저하되고 전술이 비정규전 중심으로 고착화 된 상태에서 조선은 매일같이 밥먹고 쌈박질하던 왜군과 전면전인 임진왜란을 펼치게 된것.
탄금대전투에서 그 비극이 극대화되는데 신립은 북방에서 여진족들을 상대로 비정규전에서는 맹활약했지만 그와 그 기병들은 왜군들에게 몰살당함. 신립의 기병들은 왜군을 상대로 돌격을 한게 아니었음. 조선기병은 여진족 격퇴에 특화된 궁기병이었고 왜군을 상대로 여진족 상대하듯 상대하듯 치사, 그러니까 마상사격을 했음. 그나마도 지형상 문제로 제대로 기동하지 못했고 전투목격담인 상촌집을 보면 좌우로 돌아들어온 왜군에게 포위되어 기동이 봉쇄되고 근접전을 강요당해 패전한 걸로 묘사되고 조총은 언급이 없음.
왜란이후 선조시기에 여진족을 상대로 싸웠을때에도 낮은 근접전투역량이 약점으로 작용했는데 교역을 통해 중국에서 갑옷을 사 입은 여진족들이 궁시를 씹고 근접하고 총통만이 효과가 있었다고 나옴. 이때 여진족 백명에게 조선군 천명이 패전직전까지 몰림.
공통적으로 사격병과만으로 적의 접근을 차단하지 못하고 근접당해 피해를 보는 그림이다. 전투원의 질적저하와 근접전무시경향이 원인임. 왜란에서 해전을 제외한 주요승첩들은 대개 유격전 기습전 수성전 등 비정규전 성격을 띄거나 아니면 근접우려가 없어 사격전 비율이 높은 전투형태였는데 위와같은 약점때문안 것으로 보임.
여말선초의 군사적 성공경험을 기반으로 한 공세적 전략 병력운용이 병력자원이 바뀌었음에도 수정되지 않았고 비정규전 중심의 안보환경이 전면전 대비의 전략수립을 무시하게 만들어 갑작스런 전면전 발생시 대참사를 불러오게 된 것이다.
조선국방의 비극은 무신집권기의 원죄와 안보안정이 이루어낸 합작품인 것
그러고도 꾸역꾸역 20만 뽑아서 전선으로 보낸게 유머지
괜찮은 글인데 보는 놈이 없네
추천머겅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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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씹덕새끼들은 다 얘같은 저지능 정박아밖에 없노
세좆새끼가 창기병이랑 팽배수있는거 해산 시키고 궁기병이랑 궁병만 주구장창 뽑아라고 하기도함 씹창난 국방은 쿠데타로 집권한 초기 왕들과 신진사대부들이 잘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개선 시키려 노력했고
그래서 고려의 원죄가 뭐라는 결론이여? 조선보다 근접전 잘한거? 사병이 잘싸운거? 이성계 왕시켜준거? 사병이 파티경비한거? 전시과 망한거? 무신집권한거? - dc App
세조가 갑사 없앤 애던가? - dc App
창기병이랑 화통도감이요
창기병은 없앤거 아녀
이 정도면 말을 안 하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때리기가 정석임에도 까먹었다는 것도 문제에다가 거짓보고 한 인간 두둔은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이 좋은 글을 이제 봤구먼! 근데 댓글 상태가.. - dc App
재밌네
몽골침입에 지리멸렬한 건 무신정권의 과오 맞는데 조선 국방력의 약화까지 고려의 책임으로 돌려버리는 건 너무 무리수 같다만. 정보는 좋은데 결론이 별로.
글 자체는 괜찮은데 양분되어서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 강하게 듦. 조선 전기에서 연결이 잘 안되는데, 조선 극초기까지 국방력이 야전병력 중심으로 편성되었고 그 이유는 무신란과 대몽항쟁기를 거치면서 중앙집권적 국방체계가 붕괴했다는 점까진 잘 이어지는데, 조선이 그 야전병력 중심의 초기 국방력 때문에 청야전술을 비롯한청야입보 전략을 포기한 건지, 아니면 대외환경적 안정화로 인하여, 도적놈 정도의 비정규집단 진압으로 인해서 포기한건지 글 흐름상 인과관계인지 상관관계인지 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고려 중기 이후 중앙집권적 국방력 약화가 원인으로 이어지는지 매우 불분명함. 특히 임란 초기의 처참한 실패 원인이 근접전을 경시한 원거리 공격 위주라 언급하였는데, 그 이유가 전략적 이유보다는 작전적 계획 실패와 전장 선택
문제, 그리고 기병 전술적 기동 실패라는 작전-전술 적 실패 측면이 두드러지는 반면, 전략적 실패라고 확정지을만한 근거가 없음. 특히 바로 다음에 있었던 신각의 첫 승리나, 평양성 방어전, 행주대첩의 경우 원거리 공격으로 공방 측면에서 매우 이점을 보았는데 반례에 대한 전략적 고찰이 더 있어야 충분히 납득이 감. 그리고 이쯤 오면 진짜 고려 중기의 무신란으로 촉발된 중앙집권적 국방체계 붕괴가 조선의 임란 문제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진짜 어려워 보임. 고려조에 웬수를 지지 않은 이상 받아들이기 힘들다. 일단 글을 반으로 쪼개서 조선 극초기까지의 국방력 발달 양상과, 여기서 왜 RMA를 못하게 되었고, RMA을 못한 퇴보가 이전시기 고려나 송나라가 했던 청야입보를 왜 조선이 못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게 글의 방향이 맞는 거 같다. 세줄 요약하면, 1) 글이 반으로 쪼개져있고 연결이 안된다. 2) 연결이 안되는 이유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 등 요소와 시대결과의 관계가 규명이 안되었다. 3) 전략적 문제가 이어졌다고 했는데, 독자들이 보기에 작전 전술적 문제지 전략적 문제라 콕 짚을 납득할 요소가 없다.
글쓴이랑 아이피 같은데 자문자답이요?
동네가 비슷한 거 같은데, 엄연히 다른 사람입니다.
아하 그런데 실례지만 RMA가 뭔가요?
그리고 이 휴일에 뭐하러 할일 없이 자문자답을 하겠음요? 이정도로 글 쓸 거면 차라리 연구주제나 제대로 쓰고 앉았지요
군사 혁신 = R evolution In M ilitary A ffairs 입니다
그렇군요. 역사학 전공하십니까?
정치외교, 행정, 역사 전공 했었습니다.
요약: 고려는 사회는 봉건제풍이지만 군사는 지극히 중앙집권적임. 근데 무신정권이 군사마저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손대서 중앙집권적이던 군사가 사병제도 난립으로 와장창. 결국 조선이 건국되고 여러 개혁을 하기 전까지 군사력이 완전히 회복 안됨.(덤: 경제력도 동시에 와장창)
그러나 정작 군사력이 회복된 조선시대에는 우수한 외교로 정규전을 할 일이 정말 없고 왜구나 여진족같은 비정규전 천지. 비정규전은 사병제로 대응해야하는데 조선은 정작 중앙집권적으로 군사를 개편해서 은근 엑엑댐. 빡쳐서 정규군으로 비정규전 테크를 집중적으로 올렸더니 갑자기 왜구가 정규전 걸어옴. 어?
조선도 중기가면 산성체제로 바뀌긴힌ㅁ
근접전 소홀히 하는건 탱크없는거나 마찬가지였네
정성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