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년, 일찌기 스물여덟 살에 불가르족에게 참패를 맛본 뒤 언젠가 그들을 반드시 무릎꿇리리라 맹세했던 동로마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이제 예순 살의 노구가 되어 불가리아 정복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을 떠나 북진했다.

전사한 불가리아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미망인 마리아에게서 세 아들과 여섯 딸,

그리고 다른 왕족들의 신변과 운명을 맡기겠다는 편지를 받아낸 바실리우스는 

불가리아의 수도 오흐리드에 입성하여 이제는 먼저 죽은 평생의 적, 차르 사무엘의 황궁을 박살내고

그 곳에서 약탈한 은괴, 보석 박힌 왕관, 금실로 수놓은 비단옷, 금화들을 아낌없이 휘하 제국군 장병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분이 풀리고 나자 바실리우스 2세는 마리아와 불가리아 왕족들의 눈을 뽑는 대신 따뜻하고 정중하게 맞이하여 

이제 그가 그들의 새로운 주군으로서 보호자가 될 것임을 약속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모여든 불가리아 지도자들을 만나 항복을 받고, 관직을 수여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는 일을 되풀이했다.

마리아는 동로마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라 할 수 있는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해졌으며

블라디슬라프의 아들들은 훗날 각기 군사 요충지의 테마 총독이 되었다.

불가르 귀족들이 차츰차츰 동로마 제국의 귀족사회와 관직의 위계 피라미드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


바실리우스 2세는 전장에서 보여준 단호한 무자비함이 마치 헛소문이었던 것처럼, 

이제 그의 적이 아닌 신민이 된 불가르인들의 마음 속에 그를 새로운 차르로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거의 무한에 가까운 국력을 자랑하던 제국과의 수십 년에 걸친 소모전으로 피폐해진 불가리아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대폭 낮춰 주고, 곡식을 주고 금화를 '사서'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불가리아 제국 시절처럼 금화가 아닌 현물로 계속 세금을 내는 것도 허용했다.

불가리아 교회는 황제가 대주교를 임명하게 된 것 한 가지만 빼고는 여전히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현지인들의 풍습도 존중받았다.

심지어 동로마 본국과 불가리아 신영토 사이의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불가리아 귀족을 동로마 여성과 결혼시키고

불가리아 귀족 여자들에게는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는 데 적극 나서기까지 했다.


"불가르족의 학살자" 는 그가 서거한 뒤 무려 한 세기 반이 넘게 지나

다시금 불가리아 제국의 도전을 받게 된 이사키우스 2세 황제 때나 갑자기 나타난 별명으로

심지어 1090년대에 일찌기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르족과 싸웠던 곳에서 페체네그족과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게 된 알렉시오스 1세가

제국군을 독려하기 위해 바실리우스 2세의 위대한 승리들을 찬양할 때도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명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정작 바실리우스 2세가 995년에 베두인족 포로들의 오른팔을 자르게 하고, 1021년 조지아 전역에서 포로들의 눈을 뽑았던 사실은

불가르족의 학살자라는 별명에 가려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주디스 헤린 저 "비잔티움 :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 "비잔티움 연대기 2 : 번영과 절정" 에서





뭐 황제 별명이 "불가르족의 중매쟁이"면 너무 모양이 빠지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