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외신의 머리기사를 차지한 사건은 (광서에서 조반파들이 소련 화물기차를 습격한 사건 등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바로 1967년 8월 22일 밤에 영국 재외 공관이 불탄 사건이었다.
몇달 째 홍위병은 수정주의자나 제국주의자로 비난받던 외국 대사관들을 포위해 온 터였다. 시작은 그해 초 독선적인 홍위병 무리들이 증오의 벽을 만들어서 소련 대사관을 에워싸고 안에 있던 170명의 러시아인을 고립시키면서부터였다. 동유럽이나 서방 국가의 외교관들은 포위된 그들의 동료에게 보드카와 맥주, 빵, 스프 같은 보급품을 전달할 때 으레 모욕을 당하고, 침세례를 받고 괴롭힙을 당하는 등 집중 공격을 받았다. 어느 시점이 되자 러시아인들은 시 당국이 보급품 공급을 차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수영장에 물을 채우기도 했다. 밤이 되면 군중은 모닥불을 피우고 소련 지도자들 모형에 린치를 가한 뒤 해당 모형으로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케냐 대사관 앞에는 얼굴을 까맣게 칠한 밀짚 인형이 매달렸는데 여러 달을 정문 위에서 대롱거렸다. 인도네시아와 몽골 대사관은 출입이 영구적으로 차단되었다.
(홍콩에서 국경선을 넘은 홍위병들과 친문혁 시위대의 폭동이 발생하자 영국 정부가 공산주의 출판물을 금지, 중국 정부가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급진적인 학생들이 영국 재외공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외국어 학원에 근무하던 한 외국인은 8월 22일 아침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몇 명이 <여름에 소풍을 가는 사람들처럼 한껏 들떠서> 학원 바로 옆 가로수 길을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 손에는 휘발유 통이 들려 있었다. 점심 시간 즈음에는 영국 재외 공관 밖에 너무나 많은 군중이 몰려들어서 안에 있던 22명의 외교관과 보조원이 그대로 갇혀 버렸다.
저녁 일찍 폴란드 외교관들은 영국 재외 공관 측에 홍위병들이 휘발유 드럼통을 굴리며 공관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해 주고자 시도했지만 이미 전화선마저 끊긴 터였다. 여전히 공관을 벗어날 수 없었던 외국인들은 편안히 앉아 도널드 홉슨과 브리지 게임을 하거나 피터 셀러즈 주연의 코미디 영화 <법의 부작용>을 시청했다. 밖에서는 탐조등이 재외 공관 건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 10시 정각에 외무부에서 축포 한발이 발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빽빽이 열을 맞추어 앉아 조용하고 질서 있게 대기하던 군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소수의 군인들이 정문 앞에서 서로 팔짱을 껴서 구축한 저지선을 사나운 기세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함성을 지르며 재외 공관 구내로 난입한 그들은 신속하게 건물 안으로 흩어졌다. 한편 건물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문서 창고의 두꺼운 철문 뒤로 용케 피신해서 문 뒤에 각종 캐비닛과 커다란 황동 연설대를 쌓아 보강했다. 특히 황동 연설대는 1900년에 수백 명의 외국인이 영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청나라 군대와 의화단이라는 비밀 결사대가 영국 대사관을 55일 동안 포위했을 때부터 전해 내려온 물건이었다.
(홍위병들이 숨은 영국인들을 끌어내기 위해 창고에 불을 지르자) 항복만이 살길임이 명백해졌다. 비상구로 창고에서 탈출한 일행에게 집단 폭행이 이어졌다. 몇몇이 폭도들에게 휩쓸려서 등과 어깨를 구타당했다. 그럼에도 폭도들은 손에 사정을 두었다. 당연히 아프게 때렸지만 부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었다.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여기에도 세심한 규칙이 뒤따랐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팔을 단단히 붙잡은 상태에서 희생자는 머리채를 잡힌 채 고개를 쳐들거나 강제로 머리를 숙인 자세를 취해야 했다.
혼란을 틈타 일행 중 몇명이 영국 재외 공관 맞은편에 위치한 핀란드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몇명은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군인들이 남은 인원을 길 한쪽에 모아 군중과 격리시켰고 종국에는 대형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로 데려갔다. 여전히 어둡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건물에서 치솟는 불길이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공관 직원들은 장장 몇개월 동안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영국에서 이 일에 대해 항의하자 모택동은 우리가 한게 아니라 대만의 장제스가 한 거라고 대놓고 거짓말
으
장제스가 무슨 수로ㅋㅋㅋㅋ
예전에 누가 쓴 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