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증언들이 1차 세계대전 초기에 장렬히 기관총 포화와 철조망에 죽어 나간 의미 없는 기병돌격을 묘사하고, 그 이후로 기병은 오로지 승마보병으로만 운용되었다며 이야기를 끝마친다. 그래서 이 글도 먼저 참전자 증언을 인용하며 시작하려 한다.
“엄청난 광경이었고, 믿겨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기병대원들은 깃발 달린 창대를 펄럭이며 언덕 사면을 타올라, 하이 우드 숲으로 곧장 돌격해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돌격하는 와중 계속 고꾸라졌다. 일찍이 본 적 없는 장관이었다. 수많은 군마와 병사가 기관총에 맞아 흙바닥에 널브러지면서도 돌격한 기병은 능선 위에서 그들이 있는 골짜기 아래로 사격하는 독일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끔찍하면서도 웅장한 장면이었다. 비극적이지.”
- 영국 대륙원정군 제15군단 예비, 제33사단 소속 포병 관측장교 비들 중위. 여기에서 그는 1916년 7월 14일 일어난 하이 우드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세계대전 이전, 영국 전쟁성에서는 기병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맹렬히 대립하고 있었다. 한 편의 주장자들은 기병의 무장에 아르메 블랑슈(arme blanche), 즉 창칼 같은 냉병기가 필수적으로 존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른 편의 옹호자들은 미국 내전에서의 사례들을 들며 이제 기병은 전부 다 용기병으로 운용될 것이고, 그렇다면 복잡한 마상검술 훈련을 통짜로 생략하고 그냥 승마보병대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냉병기 폐지론자는 주장의 주요 근거로 연발 강선소총 등 보병 화력의 증가로 기병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주장하였고, 냉병기 존치론자는 그럼에도 기마돌격은 그 심리적 충격 효과 하나만으로 계속 효용성이 있다고 맞받아쳤다. 논쟁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끌었고, 영국군은 그 상태로 제2차 보어 전쟁이라는 실전을 치르며 새로운 경험들을 쌓게 되었다.
전쟁성이 결정을 내린 건 1904년, 제2차 보어 전쟁이 끝난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대표적인 냉병기 존치론자였던 존 프렌치 경과 더글러스 헤이그 육군소장이 기병 훈련교범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 교범은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군 기병의 전투방식을 규정지었으며, 당대 전쟁성의 최대 이슈였던 기병 무장 논쟁을 종결시킨 책자였다.
보어 전쟁에서의 경험은 헤이그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의견을 강화했다. 증강된 화력은 기병의 적이 아니었다. 기병도 똑같은 무장을 운용하면 그만이었다. 헤이그는 독립 기병부대가 자체적인 지원화기를 운용하면 기동성과 충격력을 백분 강화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또한, 보어 전쟁에서 보어 민병대와 영국군 승마보병들이 기병도 없이 소총을 쏘며 돌격한 사례들을 보자면 거의 성공한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영국군 정규 기병대가 보어 민병대를 상대로 제대로 돌격을 박아 넣으면 화력 수치로만 따지면 너댓 배가 넘어가는 적 보병도 그대로 와해되곤 했다.
마지막으로, 승마보병대의 최대 단점은 보병을 말안장에 앉혀 놓는다고 해서 그 보병이 갑자기 숙달된 기수가 되지는 않는단 사실이었다. 남아프리카의 안 그래도 혹독한 환경, 마초의 부족,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군마들 같은 복합적인 요인이 겹쳐서 보어 전쟁의 영국군 승마보병대는 군마 비전투손실율의 정점을 찍었다. 말은 비싼 전략 자원이었다. 결국 승마보병도 제대로 운용하려면 긴 기간의 기마훈련이 필요했고, 기병대처럼 말 관리법도 교육받아야 했다. 그럴 거면 그냥 원래 하던 대로 기병대 애들 말에서 내려 싸우게 하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그래서 헤이그는 냉병기와 화력, 둘 중 택하기는커녕 둘 모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영국군 기병대는 여전히 기병창과 기병도로 무장했고 돌격을 훈련했지만, 보병 수준으로 하마전투도 훈련받았으며 자체적인 기관총과 기마포 지원도 충실히 받았다.
1914년의 국경 전투에서 기병대는 차막 전개(screening), 정찰, 그리고 소부대 단위로 종종 돌격전을 수행하거나 대기병전도 벌이며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전선이 점차 고착화되며, 하마 전투하는 기병대는 1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의 돌파를 막아세우는 핵심 전력이 되었다. 기병대는 보병과 다르게 말에 타서 빠르게 움직였고, 그 기동성을 이용해 위태로운 구역에 빠르게 전개해서 틈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이들 - 대륙원정군 제7기병여단은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카바나흐의 소방여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차 이프르 전투에서도 독가스 공격으로 마비된 방어선을 보강한 건 위험 구역에 신속하게 파견된 기병대였다.
서부전선에서 기병대를 제약하는 건 결코 기관총이 아니라, 오히려 철조망이었다. 말에 탄 사람은 두 발로 걷는 사람보다 엄청나게 거대한 표적이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속도 차이를 감안하면 생존성에 더 유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선 전역에 곧 철조망이 좍 깔렸다. 철조망들은 전장을 좁은 구역으로 나눠 놓았다. 본래 농장에서 동물 울타리로 쓰이던 철조망은 정확히 말 같은 짐승을 막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도구였고,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또 기병 운용의 난점은 제대로 전장에 투입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걸 이해하려면 서부전선의 전투들이 어떤 양상으로 돌아갔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지엽적 성과 외엔 큰 변동이 없는 전선은 보급로가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했고, 따라서 몇 안 되는 포장도로들은 전부 보병 행군로, 포병 보급로 등으로 지정되었고, 그 사이에는 혹시나 적 공격이 올까봐 철조망을 포함한 방어시설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철조망이 깔린 도로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기병은 도로 밖에 기병 통로를 따로 내어 움직였다. 문제점을 알겠는가?
이러면 사령관이 기병을 어느 전장에 투입해야 한다고 치면 거기까지 통로를 미리 내어 둬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며칠 전부터 어느 구역에 기병이 투입된다가 사전에 결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건 타이밍과 기회 포착이 생명줄이었던 기병 병과에게 있어서 완전히 상극인 전투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기병은 개쓰레기였을까? 몇 가지 사례를 바라보자.
1916년 7월 14일, 하이 우드 공격.
글 서두에 적어둔 비들 중위의 “증언”이 묘사하는 교전이다. 영국군의 계획은 2개 보병군단의 진군을 선행하는 3개 기병사단이 독일군이 점유하고 있던 고지대의 하이 우드 숲을 소탕하고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기병사단 3개 모두의 지휘권이 보병 지휘관 휘하에 편제되었지만, 제4군 사령관 롤린슨 중장이 마지막 순간에 제2인도 기병사단만을 현장에 배정하고 나머지 두 사단을 뺐다. 이래서 시작부터 3개 사단 중 2개 사단이 전투에 불참하게 되었다.
아무튼 기병 통로가 놓였고, 제2기병사단은 대기 위치까지 잘 와서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명령 상의 혼선으로 그들 중 돌격한 건 제1세쿤데라바드 기병여단 예하의 제7근위용기병연대와 제20데칸기병연대의 두 개 대대에 불과했다. 1900시 시작된 기병 진격은 0325시 보병간의 전투로 이미 시작된 그날의 교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기병이 하이 우드로 진격하는 동안 그들은 독일군 포화를 뒤집어썼지만 피해는 극히 적었다. 이어서 독일 보병을 발견한 기병대는 거창 돌격, 열여섯 명의 적병을 죽이고 서른 남짓의 포로를 잡으며 독일 보병대를 궤주시켰다. 테넌트 중령은 그 이후를 이렇게 묘사한다.
“각 기병대대가 협로를 통과한 후, 여단은 횡렬로 늘어서 질주(gallop)로 전위대를 따라, 적이 은폐하고 있다고 알려진 넓은 밭으로 돌격했다. 독일 병정들은 사방에서 벌떡 일어서 팔을 치켜들고 ‘카메라드’라 외쳤고, 개중 많은 이들은 우리가 포로를 잡지 않을 거란 공포에 질렸는지 군마들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자비를 빌었다. 그리하여 기병의 진로가 방해되었고, 돌격이 종료되었다.”
기병대는 독일군 제3전선 코앞까지 최대한 진격했지만, 보병 공격이 멈췄기에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기병은 그대로 말에서 내려 방어선을 축조했고, 연대들에 편성된 호치키스 기관총이 적 기관총 사격을 제압했다.
이 교전 동안 죽은 영국 기병대원들은 :
제7근위용기병연대 : 장교 1명, 사병 2명.
제20데칸 기병연대 : 장교 2명, 사병 2명.
여단급 교전인데 무려 7명이나 전사했다. 정말 엄청난 피해지.
해당 교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1. 기병을 전투에 투입하는 것 자체의 고난. 3개 사단 중에 1개 여단만이 실전에 참여했다.
2. 투입된 기병여단은 전술적으로 효과적이었으며 교전비도 우위를 점했지만, 보병 없이 단독 작전은 불가능했다.
3. 보병이 기병에게 받은 심리적 충격효과는 막대했다.
엥 그러면 비들 중위 증언은 뭔데? 증언을 한 번 다시 살펴보자.
“엄청난 광경이었고, 믿겨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기병대원들은 깃발 달린 창대를 펄럭이며 언덕 사면을 타올라, 하이 우드 숲으로 곧장 돌격해 들어갔다. 물론 그들은 돌격하는 와중 계속 고꾸라졌다. 일찍이 본 적 없는 장관이었다. 수많은 군마와 병사가 기관총에 맞아 흙바닥에 널브러지면서도 돌격한 기병은 능선 위에서 그들이 있는 골짜기 아래로 사격하는 독일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끔찍하면서도 웅장한 장면이었다. 비극적이지.”
비들 중위가 영국 기병대가 깃발 달린 창대를 썼다고 묘사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1914년 규정으로 기병창에 깃발을 다는 행위는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건 그가 묘사하는 여단이 이 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는 7명 전사, 20명 부상이란 거고, 막상 기병대는 숲 그 자체 안으로까지 돌진하지도 않았다는 거다.
다시 말해서, 비들 중위는 그의 실제 목격담을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생각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현대 보병한테 기병이 돌격하면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란 자신의 상상을 사실인 양 말한 것이다.
또 다른 목격담을 보자. 허친슨 중령의 회고록도 같은 날 같은 전투, 데칸 연대를 묘사했다.
“나는 인도인 기병대대 하나를 보았다. 번쩍이는 투구 아래에 어두운 얼굴들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사면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창과 검으로 무장한 인도의 원주민들보다 위협적인 광경은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포와 소총의 표적거리가 되었고, 불지옥 속을 질주하는 연대는 차츰 줄더니 종국에는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했다. 수개월 후, 전사자들의 비명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아이들을 위해 우는 어머니들의 소리로 메아리쳤다.”
다시 말하지만 데칸 연대의 전사자는 4명이었다.
이렇듯 1차 세계대전의 기병을 묘사한 1차 사료 중에서는 “당연히 기관총 앞에 기병이 돌격하면 이렇게 피떡 되는 거 아니냐?”의 선입견으로 그냥 자기 상상을 늘어놓은 경우가 대단히 많고, 다 걸러 들어야 한다. 거의 2차 대전 폴란드 기병이 골판지 전차에 돌격했다는 썰 급으로 근거 없는 낭설이다.
다음으로, 기병대 피해가 진짜로 높았던 1917년 4월 10일, 몽시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영문 위키백과 Horses in World War I 페이지는 이렇게 서술한다.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의 명령으로, 라이프 근위기병연대와 왕립기마근위연대, 그리고 제10후사르연대의 장병들은 중기관총 사격과 철조망 앞으로 뛰어들어 독일 방어자들에게 도륙당했다. 제10후사르연대의 경우에는 돌격에서 삼분의 이의 인원을 잃었다.”
무려 출처 각주까지 두 개나 달려 있는 구절인데, 문제는…….
개씹구라다.
기병대 장교들은 병신이 아니었고, 철조망이랑 기관총 깔린 곳 정면에 들이대면 추풍낙엽처럼 털릴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기관총은 자기네들도 잘만 운용하고 있었고. 기병대가 아라스 전투의 조공 격으로 일어난 몽시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은 건 돌출부에서 버티면서 적 포격을 받아내었기 때문이지, 결코 철조망과 기관총 상대로 미친 돌격을 감행해서 한방에 날려먹은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기병은 빠른 기동성을 살려 전장에 투입된 이후 보병으로 전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기록이 악질적인 건 일부러 가장 피해가 컸던 제10후사르연대만 졸렬하게 콕 집어서 그게 전체 피해 비율을 대변하는 양 서술한 것이다. 그렇게 치면 워털루 전투에서도 영국군 연대 중에 거의 전멸한 연대도 있고 그랬다. 1917년 4월 9일부터 11일 사이의 피해 장부를 보자.
제1, 2 라이프 근위연대 : 사상자 없음.
왕립기마근위연대 : 전사 1, 부상 20, 실종 4.
제10후사르연대 : 전사 27, 부상 157, 실종 5.
제3기병사단(도합 6천여명)의 총 전사자 수는 91명이었다. 서부전선 기준으로 경미한 피해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그 동안 손실한 군마 수다. 91명 전사하는 동안 죽거나 잃어버리거나 불구가 되거나 한 군마 수는 무려 2천 마리에 달했다. 그래도 이런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았더라면 영국군은 아마 11일에 마을로 진입한 제37보병사단의 인명으로 대가를 대신 치뤘을 것이기에 기병의 신속한 전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루덴도르프의 삽질과 백일 공세로 대표되는 1918년. 서부전선의 기병은 다시 전통적인 역할로 돌아가며 돌격전도 왕성히 수행했다. 1918년 3월 30-31일 모레유 숲 전투에서 캐나다 기병여단은 승마전투와 하마전투를 섞어 수행하며 독일군 제23작센 보병사단을 저지했다. 캐나다 기병여단은 기관총이나 포병 지원도 없이 형편없는 전술안으로 투입되었고, 그 결과 전체 인원의 45% 가량이 사상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전투는 아미앵 방면으로 진격하던 독일군을 돈좌시켰고 해당 지역의 춘계공세를 정지시켰단 점에서 대승리였다.
10월 9일, 기병은 5마일 너비 전선에서 무려 14km를 빠르게 진격하며 첼레 강 교두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가티니 숲 전투에서 캐나다 기병대는 적 기관총에 제압된 보병의 지원에 나섰고, 포트 개리 기마연대의 돌격은 독일군 230명을 생포하며 기관총 40정을 노획했다. 그날 기병은 하루만에 13km 진격하며 전해만 해도 상상도 못한 속도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기병은 왜 대체되었는가. 기존의 역할은 점차 장갑차, 전차 등으로 잡아먹히고 있었지만, 사실 기병의 대체제라기엔 전차는 문제점이 좀 많았다.
1918년 아미앵 전투의 가동율 기록 보면 감이 팍 온다.
1918년 8월 8일 : 414대.
1918년 8월 9일 : 145대.
1918년 8월 10일 : 85대.
1918년 8월 11일 : 38대.
1918년 8월 12일 : 6대.
당시 전선 부대에 적용된 교대 체계를 감안하면 마크 전차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한 독일군이 전차를 볼 수 있었던 독일군의 수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전후에 쓰인 역사책들은 소위 “탱크 쇼크”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갑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육군의 핵심 전력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사실 제1차 세계대전에선 후반 기동전까지도 애물단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실 애초에 그 기동전이 가능했던 것도 드디어 전선 돌파가 신기술로 달성되었다! 가 아니라 루덴도르프가 도박수 던진 게 실패하면서 독일군 정예부대가 증발해서 무주공산 된 전선 격파한 거에 가깝다. 보병 소대전술, 침투전설은 이미 1917년에 영국군 전군에 교육되었고, 1917년의 참호전은 이전처럼 호각 불면 중대 전체가 참호 흉벽 기어올라 돌격하는 것보단 무인지대의 포탄 구덩이에 엄폐해서 소대 기관총 쏴제끼고 수류탄 던져대는 거에 가까웠다.
기병이 진짜 도태된 건 전간기에 전차, 장갑차, 트럭, 항공기한테 기존에 수행하던 모든 역할이 대체당하면서였지 기관총에 꺾여서가 아니었다.
출처.
J.M. Bourne, ‘Haig and the Historians’
G. J. De Groot, ‘Ambition, Duty and Doctrine: Haig’s Rise to High Command’
Lieutenant-Colonel A. Echevarria, ‘Combining Firepower and Versatility: Remaking the ‘Arm of Decision’ before the Great War’, 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 Journal
The Marquis of Anglesey, A History of the British Cavalry 1816-1919
J. Terraine, The Smoke and the Fire: Myths and Anti-myths on War 1861-1945
기병추
개추
역사의 원전에서 썰푸는 영국 보병 아저씨가 1917년인가 18년에도 프랑스 기병들 봤다고 하길래 오잉 했었는데 진짜 쓰이긴 쓰였구나. 허긴 2머전때도 쓰인게 기병인데
한국전쟁서는 기병쓰엿다가 밀이 보충이 안되서 해체됏다던대
이게 핵심문제지.사람은 보충이 가능한데 말이랑 말 먹을거는 도저히 쉽게 보충도 안되고 뭣보다 말이 보통 많이먹는 동물인것도 아니니까 - dc App
결국 1대전 기병은 보병처럼 적 포병에 의한 손실이 가장 컸나...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당신의 10만 기병 기계화 기병으로 대체되었다 - dc App
정보추. 전통적 퀴러시어 병과의 도태와 기병 전체의 도태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리 잘 해준 듯
결국 또 하나의 '옛날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았다'의 사례군
좀더 사료나 자료 뒤져봐야 겠지만 좋은글 개추!! - dc App
400대나 뽑은건 놀라운데 비전투손실로 90%날아가는 것도 놀랍다
근데 이러면 참피처럼 갈렸다는 프랑스 흉갑기병은 머임?
구라. 국경 전투 때 기병은 최중요 자산이었음. 알브레흐트의 독일 제4군은 제1독립기병군단 기병 screen 못받아서 랑글의 프랑스 제4군한테 아르덴 조우전 때 줬댈 뻔하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