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www.geocities.jp/satohpone/manchu/sol_test.html


관동군 사령부 (신징)


『 관동군 특수 군무원 복무 규정 』 군의(78세)


"종군위안부 110번"에 전화를 할까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전에 상관이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80세를 넘어 모두 전쟁의 일은 잊어버렸다는군요. 사실을 아는 자가 말하지 않으면 어둠 속에 묻히는 줄 알았기에 전화를 한 거죠.


쇼와 14년(1939), 군의관이었던 저는 하얼빈 육군병원에서 위생병 교육 담당을 했습니다. 괌의 생존자였던 요코이 쇼이치 씨도 제가 교육한 사람 중 1명입니다.


쇼와 15년(1940)에는 관동군에 끌려온 관동군 사령부 조선 후방 부대에서 사령부의 가족, 보급 감부를 진찰했습니다.


"관동군 여자 특수 군무원 복무 규정"은 두꺼운 규정서로 상세한 규정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관동군 후방 부대 3100부대 위생부를 관할했습니다. 이른바 위안부의 취급 규정에서 여자 특수 군속이라는 것은 "조선 피시(매춘부)"입니다. 


이 중에는 급여 규정도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월급은 800엔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일급은 무려 70엔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피복, 침구, 화장품 등도 대여한다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 서류는 패전으로 도망갈 때에 모조리 불태웠습니다.


관동군 보급 감부라는 것이 있어 위안부의 "보급"도 하고 있었습니다. 철도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데 하루에 200명을 태우고 밖에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10량의 화차에서 2000명이 한번에 옮겨졌습니다.보급 감부 위생 하사관이 총지휘관으로 일본인 야쿠자가 무기를 갖고 여자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망을 보았습니다.


만주 철도의 열차는 넓기 때문에 열차 별명이 "빵빵 열차"가 되었습니다. 제3, 4, 5국경군은 몇월 몇일까지로 하듯이"빵빵 열차"를 두고 그 날의 명령서가 매일마다 나왔습니다. 저는 장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모든 서류를 볼 수 있었지만, 하사관인 오장에게 모두 맡겼어요.


감독하면 민가를 접수하고,"빵빵"을 만들었습니다. 국경의 숙소는 모두, 관동군 위안소가 되었습니다.

하이청에 있던 위안소는 일본에서 온 서커스 같은 위문단이 돌아오지 않아 그대로"빵빵"이 되었습니다. 모란에 안쪽에는 규슈의 등가 카페 여급이 있었습니다. 장소마다 달랐지만, 깡패가 도맡아 했는데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순으로 값이 싸졌어요. 모란 강변의 안쪽, 엣카(エッカ), 마카큐(マカキュウ)에는 민가를 접수한 위안소가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조선인, 중국인, 거기에 카페와 술집의 일본인이 위안부였습니다.


엣카에서 조선 옷의 여자를 봤어요. 위안부였기 때문에 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현지의 오두막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플레로 모은 돈은 쓰지 못했습니다.


당시 중국 하이난 섬에 위안부 인원은 8만명이었습니다. 그 때의 관동군의 인원은 100만명이었어요.

성병에 걸리면 곤란하니까 일요일의 외출 시에는 "돌격 1번"(콘돔)을 넘겨받아 끼는 법까지 오장이나 하사관이 지도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위안부들의 검미(매독의 유무를 검사하는 것)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무 규정에 적힌 것입니다. 성병에 얼린 위안부는 들통나지 않도록 고름을 면화로 닦고 요오드팅크를 바르고 속이기도 했습니다. 경험이 적은 중국인 위탁 의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임질이 유행하여 연대 사령관께 혼난 적도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빵빵"에 계속 나란히 바지를 내리고"빨리 하자"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정하기 때문에 실제로 하는 것은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끝없이 황량한 풍경에서 군인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멀리 만주 벌판에 노출된 시신이 든 관이 보였습니다. 사람은 두려움입니다. 동물과 같습니다. 음담패설과 먹는 것의 이야기뿐이었습니다.


하얼빈 특무기관이 일본인의 음식점 여주인과 중국인 안주인을 앞에서 공공연히, 백계 러시아인 여자의 나체 춤과 러시아인 사이에 섹스를 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이 백인보다 위라는 것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파괴합니다. 감각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P23~25)


출처 : 종군위안부 110번 / 아카시 서점 (1992)


 


시마모토 주죠(제733부대 공병)일병


군인 전용의 '지붕(위안소)'은 훈춘의 마을에 5집이 있었다. 1채의 가게에 10명 정도의 여자가 있었다. 『 군인 씨, 남자답게 이리로 오세요 』. 조선의 여자들은 길가에 나가서 병사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아직 앳된 여자도 섞여 있었다.


군인 위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고, 그러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꾀어 먼 곳까지 데리고 왔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돌아가지 못하고, 그녀들은 굶주린 군인의 먹이로 몸을 던졌다.


일요일에는 짐승이 된 군인을 상대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아직 끝나기 전에 다음 병사들이 문을 두드릴 정도로 급했다. 베니어 판자를 댄 작은 방에는 빈약한 경대와 트렁크가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전병을 덮은 이불과 우스오렌 시트에는 해부대 같은 기분 나쁜 피가 배어 있었다. 생리 때도 쉼을 허락 받지 않고 뛰어야 하지 않는 여자들이었다.(P32)


출처:우리와 전쟁〈2〉 전쟁 체험문, 시마모토 주죠 군"위안소"/타임스,(1977)



하타야 코지(헌병 오장)


내가 부임하고 일년 정도 사이에 3채의 위안소가 개업했다. 훈춘은 국경의 특수 지대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거주 증명서를 소지해야 하고, 처음 입혼한 위안부들은 헌병대에 출두하며 신중한 신상 조사를 받은 뒤 신분 증명서를 교부받았다.


나도 몇번인가 그녀들의 면접을 맡았지만 필요 서류에 본적, 주소, 성명, 연령, 학력, 가족 구성 등이 쓰여 있고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헌병은 꾀를 부리지 말라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주의할 의무를 가르치고, 사상, 군사 지식의 유무 등의 신상 조사를 중심으로 심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좀 옆길로 빗나갔다. 질문이 있었지만"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라고 물어봤더니 대부분이 "군인 아저씨를 위문하기 위해"

"저는 노래를 잘 부르니까 군인 아저씨가 기뻐할 거예요" 라고 병사들에게 안기는 것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여자는 적었다.


혹은 일부러 대답을 돌려서 했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공창이 된다는 것으로 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위안소의 주인 또는 에도 시대의 뚜쟁이가 준 가불금을 부모에게 전달, 또는 부모가 직접 받아 가족들이 알면서도 채우고 온 것으로, 정당한 계약서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빨리 가불금을 갚고 돈을 모아서 부모 형제에게 송금하는 것이다"고 말했다.(P107~108)


출처: 먼 산천 하망한 곳에서/하타야 코지, 아사히 도서출판센터(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