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은 분명 한국사에 큰 영향을 남겼지만, 군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군의 중장 1명, 소장 2명이 보임되던 청와대 경호실이 경호실장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파탄났음은 물론,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 역시 군에서 누군가는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침 교체되어야 할 장성들도 있었다.


우선 이재전 청와대 경호차장은 보안사에 구속되었다. 그는 10.26 당시 대통령 시해 사실을 알고도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직무유기라는 사유로 보안사에 의해 구속되었으나, 선배 및 동기 장성들의 탄원 그리고 정승화의 배려로 예편원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후임 청와대 경호실장에는 정동호 청와대 경호실 상황실장이 직무대리로 임명되었다.


김복동 청와대 작전차장보와 우종림 청와대 행정차장보는 이재전 중장보다는 운이 약간 좋은 편이었다. 이들은 구속되는 대신 다른 보직으로 변경되었는데, 김복동 소장은 5군단 부군단장을 거쳐 5사단장으로 전보되었고, 우종림 소장은 수도군단 부군단장을 거쳐 2군 참모장으로 전보되었다. 김복동은 그래도 신군부와 연이 있었기 때문에 중장 진급 후 육사교장을 거쳐 예편하였으나, 우종림은 2군 부사령관을 지낸 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약간의 고민을 거쳐야 했었다. 정승화는 이범준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국방부 관리차관보 그리고 문홍구 합참본부장을 염두에 두었으나, 셋 모두 노재현 국방장관에 의해 반려되었다. 결국 이희성 육군참모차장이 군에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중앙정보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12.12 이후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하게 된다.


후임 육군참모차장에는 윤성민 3군단장이 임명되었다. 정승화는 그의 회고록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이 인사가 다분히 지역안배를 위한 것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 군 수뇌부의 인적 구성은 장관, 육참총장, 해참총장, 2군사령관, 공작사령관이 경상도 출신이었고 합참의장, 공참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1군사령관, 3군사령관 그리고 한국함대사령관(현재 해군작전사령관)은 비경상도 출신이었으나 전라도 출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정승화는 전남 무안 출신인 윤성민 3군단장을 영전시켜 참모차장으로 기용하였고, 후임 3군단장에는 계급정년이 다 되어가던 전성각 수경사령관을 임명한다. 


군단장 임기를 마친 신현수 6군단장은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으로 영전되었고, 후임 6군단장에는 강영식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임명되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는 하소곤 소장이 임명되었다. 


후임 수경사령관에는 장태완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이 임명되었다. 정승화의 주장에 따르면 전두환은 이를 부적절하다고 반대하였다-참고로 장태완은 수경사 참모장 시절 전두환의 동서인 김상구 중령을 수경사 방공포대대장에서 보직해임시킨 바 있었다.-12.12 이후 신군부는 장태완이 수경사령관을 맡은 것에 대해 그가 정승화의 파벌 장성이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장태완은 수경사 참모장을 역임한 바 있었고 정승화와의 근무기간도 그리 겹치지 않는다. 


1979년 10월과 11월 사이에 이뤄진 상기의 군인사는 12.12의 싹을 불러오기도 했다. 전두환과 그 일당은 이러한 군인사 내용에 불만이 강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정승화가 자신들을 축출하고 군을 장악하려 들고 있다는 위기감을 조성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인사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꽤나 필연적인 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용된 장성들 대부분은 하나회가 아닐 뿐이지 적절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군은 10.26의 혼란을 겪고도 큰 문제 없이 돌아갔다. 1979년 12월 12일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