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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구가 옆에 있던 통신기로 손을 뻗었다.

  “발전소 나오라. 발전소 나오라. 여기는 가마솥 하나. ……표적 확보. 땅크. 케이 둘, 두 량. 장갑차. 케이 둘 하나, 두 량. 보고 끝.”

  보고를 마친 필구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대기했다. 강백은 참호 구석에 내려놓은 로켓탄 위에 손을 올렸다. 로켓을 발사할 때 피어오를 연기와 먼지구름은 적에게 위치를 알리는 신호가 된다. 그는 전 하사가 발사하면 곧바로 이동할 수 있게 대비해야 했다.

  “가마솥 하나, 수신하였음.”

  필구가 수화기를 내려놨다.

  “뭐라니?”

  전 하사의 눈은 여전히 조준기에 붙어있었다.

  “일 키로메터 안으로 들어오면 장갑차부터 쏘라는 명령입니다.”

  강백은 침을 삼켰다. 교육자료에서만 봐왔던 남조선의 전차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이었다. 반땅크전투는 먼저 보고, 먼저 쏘는 쪽이 이긴다. 전술이론 강의가 있을 때마다 소대장이 강조하던 내용이었다. 적이 공격해오지 않는 것은 곧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해낼 수 있다.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심장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흥분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 그동안 추위에 떨면서, 포탄 소리에 몸을 움츠리면서 보내야 했던 모든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버텨냈던 것이었다. 주어진 임무를 해낼 수 있다는 기대에 강백은 묘하게도 기분이 들떴다.

  “확인점 삼번 지났습니다. 거리 삼천.”

  필구가 보고하자 상위는 캠코더의 촬영 버튼을 눌렀다. 네 기갑차량은 멀찍이 간격을 두고 일렬종대로 기동 중이었다. 속도가 꽤 빨랐다. 강백은 명중시킬 수 있을지 걱정됐다.

  “확인점 이번 지났습니다. 거리 이천.”

  멀리 보이는 기갑차량들이 더 가까워졌다. 심장 뛰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천오백.”

  강백은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막았다.

  “쏴!”

  전 하사가 발사 레버를 당겼다. 로켓 부스터가 점화하며 불꽃과 함께 먼지가 일어났다. 그 직후, 차량 대열 앞에서 연막탄이 터졌다. 둥근 모양으로 터져 나온 황갈색 연기는 순식간에 넓게 흩어져 기갑차량들의 모습을 숨겼다.

  “이동한다!”

  전 하사는 미사일 유도를 포기하고 발사대에 달린 조준기를 접었다. 강백이 얼른 달려들어 장착돼있던 로켓탄 케이스를 분리했다.

  “지도원 동지! 당장 여기서 나가십시오!”

  상위가 필구의 말을 듣고 교통호로 빠졌다. 필구는 발사대에 달라붙어 지지대를 접기 시작했다. 지지대를 접은 그는 옆에 있던 무전기를 들고 참호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도 빨리 나가라!”

  로켓을 들고 어물거리는 강백에게 전 하사가 소리쳤다. 강백은 차량들이 있던 곳을 흘끔 쳐다봤다. 연막이 거의 걷히고 있었다. 그는 교통호로 뛰어들었다. 몇 발짝 못가 가까운 곳에서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쪽에 있는 보병들의 비명이었다. 누군가는 갈라진 목소리로 고통을 토했고, 누군가는 어머니를 찾았다. 강백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폭음 때문에 먹먹한 고막을 끔찍한 목소리들은 계속 두들겨댔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임무도, 공화국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집에 가서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밭일이나 도우며 지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저 아래 피투성이가 돼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처럼 되기 싫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조차 들썩일 수 없었다. 그의 육체는 재가 되어 흩날려갔다. 강백의 의식을 둘러싼 암흑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낭떠러지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내려다 볼 때처럼 배가 쑥 꺼지는 느낌이 들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떨어지다가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어쩐지 몸이 따뜻해졌다. 아주 푹신하고 따스한 어딘가에 그는 누워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몸을 감쌌다. 그가 덮고 자던 이불 냄새였다. 강백은 자신의 고향집에 있었다.

  “일어나, 이 새끼야!”

  욱신거리는 고통과 함께 눈이 뜨였다. 땅에 웅크리고 있던 강백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 하사가 팔뚝을 한 번 더 걷어차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리라! 따라와!”

  그는 강백의 목덜미를 붙잡고 교통호 밖으로 끌어냈다. 사면에 올라선 강백은 참호를 돌아보고 흠칫 놀랐다. 그들이 있던 참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로켓을 찾지 못한 장갑차의 기관포가 능선 아래에 있던 보병들을 때린 것이다.

  “이차 진지로!”

  전 하사가 능선 왼편을 가리켰다. 강백은 로켓탄을 끌어안고 달렸다. 먼저 참호에서 나갔던 상위와 필구도 어느샌가 합류해있었다. 그들이 산의 북쪽 사면을 달리는 동안 남쪽 사면에서는 계속해서 폭음이 터졌다. 폭음이 휩쓸고 간 다음에는 울음소리와 비명이 뒤따랐다. 강백의 척추를 타고 간질간질 소름이 돋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허기와 공포가 뱃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다리가 움직이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강백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야! 얘 좀 봐라!”

  상위가 주저앉은 강백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냉큼 달려라, 간나새끼야. 얼마 안 남았다.”

  거친 언행과 달리 그의 어조는 강백을 달래는 투였다. 강백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복숭아 씨앗이 걸린 듯 목울대가 아파져 왔다.

  “지도원 동지, 저 좀 집에 보내주시라요.”

  그는 상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꽉 막혔던 목구멍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다.

  “나 이런 데에 더 이상 못 있습니다. 집에 좀 보내주십시오.”

  땅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는 강백을 상위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걸 달래야 할지, 몇 대 두들겨서 혼을 빼놓아야 할지 그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필구가 다가와 강백 옆에 앉았다.

  “강백아, 가야한다. 이럴 시간이 없다.”

  그가 등을 두들기며 구슬려도 강백은 겁먹은 거북이처럼 잔뜩 웅크리고 눈물만 흘렸다. 보다 못한 전 하사가 달려왔다.

  “일어나, 이 개새끼야.”

  전 하사의 발길질에 강백이 나동그라졌다. 그는 축 늘어져 흐느끼는 강백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이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너만 벌벌 떠는 게 아니야. 저 소리 들리나?”

  전 하사가 남쪽을 눈짓했다. 수 미터의 흙과 돌덩이 건너편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이 이어졌다.

  “네가 여기서 질질 짜고 있는 동안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그는 움켜잡은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네놈만큼 무섭다. 그렇다고 도망가면 저 동지들은 뼈도 못 추리는 거야!”

  강백은 주변을 둘러봤다. 상위와 전 하사, 필구. 세 사람 모두 자신과 똑같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다들 잠깐의 전투 사이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땀으로 흠뻑 젖어 헐떡거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임무를 계속해야 했다. 남조선의 기갑부대를 막을 수 있는 건 그들뿐이었다.

  “네가 죽이는 거야. 네놈의 그 반혁명적 태도가 동지들을 죽이는 거야.”

  솟아나던 눈물이 멎었다. 눈물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낸 강백은 전 하사의 손을 떼어냈다. 오른쪽에 떨어져있는 로켓탄이 보였다. 그는 로켓탄을 주워들었다. 로켓을 끌어안은 강백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가자.”

  전 하사가 달리자 나머지 사람들이 그를 뒤따랐다. 수십 미터를 달린 끝에 그들은 두 번째 참호에 도착했다. 전 하사와 필구가 발사대를 설치하는 동안 강백은 머리를 빼꼼 내밀어 적의 상황을 살폈다. 남조선의 기갑차량들은 사이를 많이 두고 횡대로 늘어서 있었다. 전차들은 아예 도로를 벗어나 황량한 야지 위에서 다른 위협에 대비했다. 진형 가운데에 위치한 장갑차 두 대에서 불꽃이 반짝였다. 그는 얼른 머리를 숙였다. 몇 초 뒤 남쪽 사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로케트 장전!”

  하사가 지시하자 강백이 다가가 발사대에 로켓을 끼웠다.

  “장전 끝!”

  필구는 다시 앞쪽으로 나서서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쭈그리고 앉은 상위도 그 뒤에서 캠코더를 켰다. 캠코더를 든 상위의 오른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붙잡았다.

  “동무들, 해낼 수 있다. 동무들의 성과가 전 공화국에 알려질 것이다. 공화국을 넘어 세계만방에…….”

  상위가 격려의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분대원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강백은 상위를 흘끔거렸다. 중얼거리는 소리 때문에 더 불안해졌다. 조작 레버를 돌리던 전 하사의 손이 멈췄다.

  “쏴!”

  부스터 연소 가스가 퍼져 나오고, 로켓이 휘청거리며 날아갔다. 전 하사는 조작 레버를 조금씩 움직이며 장갑차에 유도용 레이저를 비췄다. 강백은 이번에야 말로 해낼 것이라 기대했다. K-21 앞에서 두 번째 연막탄이 터졌다. 로켓은 연막 안으로 사라졌다.

  “이런 썅!”

  하사가 조준기에 붙어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강백은 맥이 탁 풀렸다. 이제 남은 로켓이 없었다. 전투를 계속하려면 산 밑의 차량에서 탄을 더 가져와야 했다.

  “진지 이탈!”

  전 하사가 외쳤다. 강백은 빈 로켓탄 케이스를 빼냈다. 필구가 와서 발사대 다리를 접었다. 그 와중에도 적 방향을 향한 상위는 캠코더를 놓지 않았다.

  “엎드려!”

  강백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K-2전차의 포구가 번쩍이며 근처 지면에 먼지가 피어올랐다. 상위가 그를 밀쳤다. 참호바닥이 등에 닿는 순간, 굉음과 함께 암흑이 덮쳤다.


  메케한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어지러움을 느낄 만큼 심한 이명에 머릿속이 흔들렸다. 정신이 든 강백은 누운 채로 고개를 들었다. 무너져 내린 참호 앞쪽에서 하얀 연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다리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자세히 봤다. 누군가 다리 위에 쓰러져 있었다. 종아리 언저리가 축축했다.

  강백은 숨을 들이켜며 다리를 빼냈다. 갈기갈기 찢어진 몸뚱이에서 선홍색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왼손에 물컹거리는 것이 닿았다. 그는 얼른 손을 치우며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참호바닥에 가로누운 필구가 기침하고 있었다. 콜록거리는 입가에 핏방울이 튀었다. 찢어진 그의 군복 가슴팍이 빨갛게 물들었다. 강백은 필구를 부르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멀리서 들렸다.

  어디선가 강백을 불렀다. 작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니 등에 발사대를 둘러멘 전 하사가 기어 오고 있었다. 하사는 이동하라고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지만 들리는 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뭔가 우스꽝스러웠다. 강백도 필구가 다쳤다고 소리쳤다. 하사가 필구를 살폈다.

  “필구 보총 챙기고 겨드랑이에 손 넣으라!”

  먹먹했던 귀가 뜨여 왔다. 전 하사의 목소리와 함께 도움을 찾는 병사들의 울부짖음도 분명하게 들렸다. 필구는 여전히 핏방울 섞인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강백이 필구의 옆에 떨어져 있던 소총을 어깨에 메고 그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를 받쳐 잡았다.

  전 하사의 신호에 맞춰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축 늘어진 필구의 몸은 다루기 힘들었다. 산 아래로 몇 발짝 가지도 못해서 손이 조금씩 풀렸다. 어깨에 매달린 소총 두 자루는 이리저리 흔들려 곧 떨어질 것 같았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혼이 나간 얼굴로 능선을 넘었다. 대부분 소총도 없는 빈손이었다.

  “멈춰라!”

  밑에서 그루빠 대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권총을 빼들고 휘적거리는 군관이 보였다. 필구와 친분이 있어 보였던 중좌였다.

  “멈춰라, 이 반동새끼들아! 자리로 돌아가!”

  병사들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전 하사와 강백도 설마하는 마음이었다.

  “그루빠, 사격 준비. 멈춰! 그 이상 내려오면 쏜다!”

  대원들이 개머리판을 어깨에 붙이고 그들을 겨눴다. 기관총 사수는 땅에 엎드려 발사태세를 갖췄다. 도망자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다가 이내 멈춰 섰다. 강백과 전 하사도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일단은 내려놓자.”

  전 하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필구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었다. 그의 가슴팍을 물들인 붉은 자국은 더 넓어져 있었다.

  “야, 남쪽 총알에 맞나, 북쪽 총알에 맞나, 맞으면 다 죽는 거야! 차라리 달려서 살길 찾자!”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나 완전히 얼어붙은 병사들의 의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멈춰 선 대열 사이에서 그 사내가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의 발소리를 따라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사내는 비탈면에 고꾸라졌다. 그의 몸은 울퉁불퉁 솟아난 돌덩이에 엉망으로 부딪히며 굴러 내려갔다. 중좌의 권총에서 화약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망자 무리에 하나둘씩 양손을 들어 올리는 사람이 생겼다.

  “이 모자란 새끼들아, 내가 괴뢰군이냐? 손 내리라, 이 패배주의자 새끼들! 당장 위치로 돌아가!”

  중좌는 악다구니를 썼다. 그가 손짓하자 대원들이 전진했다. 병사들은 죽음이 널린 능선 너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찌합니까, 분대장 동지?”

  “이대로 가면 개죽음이야. 우리가 값을 하려면 무조건적으로 차량에 닿아야 한다.”

  전 하사는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루빠 대원들 앞에 나선 중좌가 점점 다가왔다. 그의 시선은 세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너희들, 빨리 움직이라!”

  강백 일행 앞에 그가 다가와 섰다. 치켜든 권총이 햇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보위원 동지, 얘가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속히 군의소에 데려가야 합니다.”

  전 하사의 호소에 중좌는 필구를 슥 훑어봤다. 필구의 눈은 초점 없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호흡에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글렀다. 올라가서 반공격할 준비나 속행하라.”

  그가 자리를 떴다. 찬바람이 휭 하고 불어와 세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대원들이 동정어린 눈빛을 던지며 그들을 지나쳤다. 뭔가 수를 생각하던 두 사람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딱하게 됐소.”

  대대기관총을 든 병사가 서 있었다. 강백에게 손인사했던 하사였다.

  “내가 이쪽 동무는 못 살려도 두 사람은 어찌해 볼 수 있을 거요.”

  눈을 동그랗게 뜬 강백과 전 하사에게 하사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강백은 그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보위국 아래서 일하는 자의 말을 덥석 믿기에는 보고 들은 사례가 너무 많았다. 당장에 위태로운 필구의 모습을 내려보던 중좌가 떠올랐다. 멈춰있는 손수레를 보는 눈빛과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달달 할 때 혓바닥 위에서 사람을 살살 굴리다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교화소에 뱉어버렸다. 이 난장판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보위국은 한결같이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아까 권총에 쓰러졌던 사내의 외침이 옳았다. 어느 쪽의 총알이건, 맞았을 때 피 흘리기는 마찬가지다. 썩어 문드러진 외나무다리라 해도 한 발짝은 딛어봐야 했다.

  “아무튼, 잘들 가시오.”

  하사가 비탈을 달려 올라갔다. 강백과 전 하사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필구의 기침소리를 듣고는 서로 마주 봤다.

  “할 겁니까?”

  강백이 물었다.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말고 더 있겠니?”

  강백이 고개를 끄덕였고, 하사는 마지막으로 능선을 돌아봤다. 그루빠 대원들 거의 모두가 능선 건너편으로 넘어가 있었다. 대대기관총 사수와 중좌는 이쪽 사면에서 지시 내리기에 바빴다.

  “둘, 셋.”

  그들은 전 하사의 구령과 함께 필구를 들어 올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장구류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멀리 1분대가 타고 온 UAZ-469가 보였다. 지프차 옆에 서 있는 운전병이 세 사람을 보고 서 있었다. 잠깐 쉬었던 덕에 기운은 충분했다. 단지 뒤통수가 따가울 뿐이었다. 제발 닿아라.라고 강백은 계속 되뇄다. 군복 안쪽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팔 근육은 터질 듯이 부풀었다. 지프차가 가까워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구르는 운전병의 이목구비가 구분될 만큼 근접했다.

  산 위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필구는 땅바닥에 처박히고, 전 하사와 강백은 흙먼지를 날리며 나뒹굴었다. 운전병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세 사람을, 그는 입을 쩍 벌린 채 보고만 있었다. 충격이 가신 다음에도 운전병은 다가가지 못했다. 공화국을 배신한 자에게는 어떤 도움도 줘선 안 됐다. 그자가 죽은 다음이더라도.

  “분대장 동지…….”

  그가 나지막이 전 하사를 불렀다. 바람 빠지듯 맥없는 목소리였다.

  “천배야, 능선을 봐라.”

  느닷없이 내려진 지시에 박천배 중급병사는 뒷걸음질 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린 일 없습니다, 운전수 동지.”

  미동도 하지 않고 뻗어 있는 강백이 말했다.

  “야, 능선에 보위국 늑대새끼들 있느냔 말이야.”

  전 하사는 초조했다. 필구의 숨소리가 불규칙해졌다. 가슴팍에 구멍이 뚫린 사람을 패대기쳐버렸으니 걱정은 더 커졌다.

  “어, 없습니다. 능선 저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차 시동 걸으라.”

  천배가 허겁지겁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재빨리 일어나 필구를 지프 뒷좌석에 눕혔다. 강백은 혹여나 이 과정이 그루빠에게 들키지 않을지 불안했으나, 차량이 출발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난 정말 동지들이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 경기사수 놈, 더럽게도 못 쏘는 게 천운입니다. 보위국새끼들 고자질이나 할 줄 알지 군사 쪽으로는 말짱 꽝이였댔잖습니까?”

  천배는 힘껏 가속페달을 밟으며 껄껄 웃었다.

  “그놈이 못 쐈으면 우린 다 까마귀밥 행이었어.”

  “그게 어찌 그리됩니까?”

  그가 조수석에 앉은 하사를 흘끔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가 쓰러져 있으면, 그자가 중좌를 꾀어서 틈을 만들어 주는 게 본래 계획이었습니다.”

  기관총 사수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총소리가 울릴 때 흐르던 식은땀이 지금도 멈추지 않았다. 총알을 흩뿌리는 게 목적인 기관총으로 용케 세 사람을 비켜나가게 하는 재주가, 로동신문에서 떠드는 수령 동지의 활약보다도 신묘했다. 맞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어 온몸이 떨렸다. 강백은 필구의 손을 꽉 잡았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동지. 동지 덕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필구가 그를 바라보며 무어라 입을 뻐끔거렸다. 강백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아보려 귀를 가까이 가져갔지만, 차량의 구동 소음과 귓전을 때리는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네 사람을 태운 지프차가 흙길을 달려갔다. 메마른 땅바닥에서 흙먼지가 일어나 먼지로 된 꼬리가 지프 뒤로 길게 이어졌다. 길게 뻗은 꼬리는 방어부대의 지휘소가 있는 개성 시내로 향했다.


-꼐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