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소련은 동독의 젊은 지식인들이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끊임없이 런하는 것에 곶통받고 있었다.

난처한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는 동독의 미래 자체가 흔들거릴 판이었다.

전후 서독으로 피난한 동독 인구가 이미 300만에 이르렀고, 1961년 초에 이르러서는 날마다 3천 명씩 동독에서 탈주할 지경이었다.


흐루시쵸프가 계속 대책을 요구했지만, 케네디는 계속 묵살했다.

베를린을 둘러싼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자 미국은 무력충돌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입대 영장 발부를 세 배로 늘리고, 15만 명의 예비역들에게 동원령을 내렸으며, 4만 명의 미군을 추가로 유럽에 파병했다.

동독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가 배를린 봉쇄를 재개할 수 있다고 협박하자,

케네디는 7월 25일에 미국 전역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도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베를린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허나 바스토뉴도 그랬습니다.

사실 스탈린그라드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일지라도, 용감한 이들이 있는 한 능히 방어해낼 수 있습니다."






- 앨런 와인스타인 저 "사진과 그림으로 읽는 미국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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