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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본문과 관련없음

아직 군인 뽕이 안빠졌던 짬찌 하사 시절의 이야기다.

공군 하사들 중 일부 특기는 상황실 근무의 일종인 기작 일직부사관에 투입되곤 했다.

일직부사관의 업무 중 하나는 통신축선 유지로 근방에 주둔하는 육군, 해군, 경찰에 일정시간마다 연락하고 일지에 기록하는 것이였다.

열정이 넘쳤던 나는 메뉴얼에 적힌대로 정시를 맞춰 연락을 하곤 했는데 여느날과 동일하게 통신축선 유지를 위해 새벽 3시경 모 군단에 통신을 시도했다.

네, ㅇ군단 ㅇㅇㅇ소령입니다

수화기 넘어로 느껴지는 목소리에는 찐득한 피로감이 묻어나왔다. 필시 자다말고 울려퍼지는 수화벨에 놀라 수화기를 들게된 것이리라

필승! ㅇ비행단 일직부사관 ㅇㅇㅇ하사입니다. 통신축선 확인하기 위해 연락드렸습니다. 수신 양호하십니까?

공군 누구시라고요?

그의 짜증은 분노의 연료와 같아 적절한 불씨만 붙으면 활활타는 인화성 물질과 다름 없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하필 내 통신망 확인전화였다.

기작 일직부사관 하사 ㅇㅇㅇ입니다

야 너 미쳤냐? 새벽에 그런거 확인할려고 감히 하사주제에 겁대가리도 없이 연락해?

그의 분노에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업무를 수행하는데 오히려 역정을 내며 나를 모욕하는 상대방을 대응하는건 이전에 경험한바 없으며 교육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간신히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했다.

저희 메뉴얼에 맞춰 통신축선 확인을 위해 연락드린겁니다

그건 니네 메뉴얼이고 그걸 왜 우리한테 맞추는건데!

지금 생각하면 그 육군 소령이 자다깬 머리로 쥐어짜낸 가장 최선이면서 가장 머저리같은 주장이였지만 목소리가 큰놈이 이긴다고 했던가? 아직 애송이였던 나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계급 성명 기입하기 위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소령 ㅇㅇㅇ!

그 말을 끝으로 상대방의 수화기를 내려치는 거친 소음과 함께 통신은 끊겼다

남은건 공허함과 분함, 억울함이 혼재된 감정이 돌고 있는 나 자신 뿐이였다.

그건 메뉴얼에 따라 당직 근무를 충실히 수행했건만 돌아오는게 칭찬도 아닌 힐난이라니 어이없음에서 나오는 공허함, 감히 하사주제라며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했는데도 아무말 못했다는 억울함과 분함이였을 것이다.

잠시 묻어두고 당직일지를 작성하려 펜을 들었지만 감정들은 마치 성게처럼 가시를 세우고 튀어나와 내 마음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나는 또다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버렸는데 마치 겨울방학 개학 전날 책가방을 열었는데 방학식날 처박아뒀던 곰팡이로 변한 귤 비슷한 무언가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였다.

아직 통신축선 확인 전화는 1통이 더 남은 것이다.

개씨발

나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새벽 6시, 수면부족에 시달린 인간이 제일 포악해지는 시간일 것이다

물론, 그냥 했다치고 넘어가는 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내 스스로에게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떳떳한 사람이고 싶었고 그 근간 중 하나는 규칙을 지키는 것이였다.

그리고 나는 도살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가축과 다름없이 스스로 사지로 뛰어들었다.

네, ㅇ군단 ㅇㅇㅇ소령입니다.

필승! ㅇ비행단 일직부사관 ㅇㅇㅇ하사입니다. 통신축선 확인...

야!! 너 내가 만만해? 내가 연락하지 말랬지!

저는 지금 규정에 근거한 근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새끼 제정신아니네? 꼴통이랑 이야기하기도 싫으니까 장교바꿔!

수화기는 내 손에서 기작참모의 손으로 넘어갔다

기작참모의 계급은 대위, 육군 소령의 입장에선 만만한 존재라 느꼈는지 되는대로 이야기했을것이다.

그런 기작참모의 상황을 내 스스로 조성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기작참모는 묵묵히 듣고는 짧은 사과와 함께 통신을 끊었다.

그러곤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죄책감에 기작참모의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없었다.

ㅇ 하사님

기작참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나는 사과로 대답했다.

ㅇ 하사님이 잘못한건 없어요.

다만 다음 근무부턴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 주세요.

나는 놀랐다. 방금 전까지 추위에 덜덜 떨던사람이 따뜻한 코코아 한잔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수화기 너머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욕설도 마다하지 않던 육군 소령과 기작참모였던 ㅂ 대위는 계급이라는 기준으론 표현되지 않던 격식이 격차로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나는 기작참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며 종종 안부인사를 전하곤 한다.

그런데 규칙보다 본인의 감정을 우선시하며 인격모독을 했던 그 육군 소령이 이젠 중령을 달고 대대장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때면 그런 사람이 지휘관으로 있는 대대는 과연 정상적인 조직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와 동시에 애송이 하사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나는 한점 부끄러움  없는 당당한 나인지 되돌아보면서 후임과 병사들에게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게 경계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