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데이의 첫 몇 분 동안에 브르타뉴에 강하한 150명의 SAS 대원은 대부분 무사히 착지하여 독일군에 대항하는 작전에 들어갔다.

연합군 사령관들은 브르타뉴 반도에서의 작전을 중요시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독일군 8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노르망디 상룩 작전의 성공에 대해 상당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 반도를 봉쇄하고 철도 폭파, 자동차 수송대에 대한 매복공격, 통신 절단 등을 통해 증원부대의 해안 도착을 지연시키는 것이 SAS와 브르타뉴 지방 마키단의 임무였다.


브르타뉴 작전 책임자는 제4 SAS대의 외팔 지휘관 피에르 부르조엥이었다. 그 밑에 6개 제드버그 팀과 철도 폭파 전문인 18개 SAS 폭파팀이 있었다.


부르조엥이 받은 명령은 마키게릴라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장소에 기지를 설치하여 독일군을 계속 괴롭히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지 S. 패튼 중장의 제3군이 해안을 돌파하여 브르타뉴로 진입할 준비가 되면, 그는 마키단을 풀어 독일군에 대해 일제히 봉기를 들도록 되어있었다.


그에게 행동개시를 지시하는 암호명령은 런던에서 무선으로 보낸 다음 같은 시시한 문귀였다.


"나폴레옹의 모자는 아직 페로-기렉에 있는가?"


D-데이의 이른 시각에 상륙한 직후, 부르조엥과 휘하 장교
들은 현지의 마키 지도자와 접선을 했다. 벌써 수천명의 어중이떠중이 지원자들이 독일군이 배치되어 있는 오랜 성곽도시 갱강 근처의 뒤울 숲속에 모여 있었다.


SAS는 그곳에 암호명을 샘웨스트라고 붙인 거점을 설치했다. 휠씬 남쪽의 모르비앙에서 SAS대는 생마르셀 마을 근처 숲숙의 동장에서 오투막에 숨어 있는 마키를 또 발견했다. 이곳이 제2의 SAS 거점의핵심이 되었고 암호명은 딩손이라 붙여졌다.


SAS 대원들은 마키와 함께 행동한다면, 그들의 몸에 밴 엄격한 군기에 따라 수행하는 작전 따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이내 께달았다.


SAS가 도착했다는 말이 순식간에 브르타뉴 전역에 퍼지고 몇 시간 사이에 수백명의 남자와 소년들이 샘웨스트와 딩손 캠프 주변에 물려들어 마치 축제 같은 난리를 쳤다.


이에 놀란 SAS 장교들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줄 레블론드 대위는 샘웨스트에 와서


"끊이지 않는 방문객 -행운을 비는 사람과 구경꾼-의 행럴을 기지 주번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보안에 대한 태책은 전혀 없었다. 부르조엥은 딩손의 분위기를 시골 장터로 비유했다. 도처에 불이 커지고 사람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웃어댔다. 그 고장 농촌 여성들은 이날을 위해 민족 고유의상을 입고 줄줄이 나타났다.


독일측은 쉽사리 두 기지에 침투했다. SAS의 공식보고에 의하면 샘웨스트에서 독일 첩자 험의를 받은 한 명의 남자와 여자가 "각기 총을 맞고 단도로 처치되었다. "고 한다.


그러나 노르망디 상룩이후 다급해진 독일군 사령부는 병력을 재배치 하기에 너무나 바빴으므로 시시한 게릴라 따위를 소탕하기 위해 마음을 쏠 여유가 없었다.


그 이후 6월 11일, 두 독일군 장교가 뒤올 숲가의 농장에 들러 캬렉스로 가는 방향을 물어보다 그들은 농가에 있는 마키로부터 기관총의 일제 사격을 받았다. 독일군 장교는 수류탄을 던지고 달아났다. 그 중 1명은중상이었다.


이튿날 아침, 독일군은 샘웨스트 기지에 물을 공급하던 농장에 불을 질렀다. 레블론드 대위는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라는 런던의 지령을 아직 받지 않았지만, 마키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처형될 농장 일꾼들을 구출하기 위해 SAS대원 30명을 파견키로 결정했다.


"기지로부터 1km도 떨어지지 않은 농장이 불태워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다면 사기에 치명적인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다" 라고 그는 후에 런던에 보고를 했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이었다. SAS대원들은 농장을 급습하고 짧은 격전 끝에 대원 2명을 잃는 대신, 독일군 10명을 죽였다.

그러나 그 습격으로 농장 일꾼들은 구출되었지만, 너무 놀란 독일군은 샘웨스트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트럭 13대분의 보병을 파견했다. 이 대병력을 맞은 레블론드는 마키에게 숲속으로 흩어져 도망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떠나기전에 공중투하로 힘겹게 모아둔 귀중한 무기와 탄약 등의 보급품 집적소를 파괴했다.


레블론드 대위와 대원들은 딩손 기지를 향해 낮에는 숨고밤에는 걸었다. 그들은 거기서 딩손 캠프가 잘 조직되어 있고 급격히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콜라 마리엔 중위의 회고담에 의하면 마키 지원자들은


"불어터져서 발가락 사이로 피가 나는 발을 절룩거리면서도 먼길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오로지 무기뿐이었다."


딩손 기지의 면적은 총 1,200에이커였고 여기에 3,500명이 집결했다. 그 캠프에는 야전 취사장, 자동차 정비소, 구두 수선소, 진료소에다가 양복 재단사와 치과의사까지 있었다. 결국 딩손으로 들어오는 차량이 독일군의 주목을 끌게 되였다.


그들은 부르조엥 사령관 체포를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팔이 하나인 사람은 모조리 닥치는 대로 체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75세의 연금 생활자까지 섞여 있어서 노인이 화를 내는 촌극도 있었으나, 부르조엥은 체포되지 않았다.


6월 18일, 첫 아침 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때, 딩손 기지 보초들은 캠프 서쪽으로부터 소총과 기관총성을 들었다. 독일군 순찰대가 마키의 전초기지를 찾아낸 것이었다.


2시간 후 캠프의 다른 편에서 여단 규모의 독인일이 SAS의 한 분견대가 장악하고 있는 성을 점거하려고 했지만 기관총 세례를 받고 물러 났다.


오전 9시가 되자, 독일군 1개 여단 병력이 간선도로를 통해 딩손으로 다가오고 가까운 마을로부터 장갑차들이 진격해 왔다. 부르조엥은 무전으로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길고도 더웠던 그날 종일토록, 캠프는 독일 보병의 있단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독일군이 예광탄을 마구 쏘아 나무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마키는 거점을 하나씩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4시, 미국의 P-47 선더볼트기 40대가 나타나서 독일군 진지를 기총소사와 폭탄으로 때렸다.
이 공격은 마키의 사기를 북돋우기는 했지만 독일군의 공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부르조엥은 밤이 되면 즉각 분산해서 후퇴하라는 명렁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불타고 있는 나무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손실은 마키 200명과 SAS대원 50명 전사로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5,000명은 족히 무장시킬만한 대량의 보급품을 잃어야만 했다.


샘웨스트와 딩손을 빼앗긴 후, 런던에서는 그 원인 분석을
위해 조사반을 파견했다. 결론은 마키와 특공대는 무엇보다도 대규모 병력으로 집결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병력이 모이면 보다 쉽게 우세한 독일군 화력의 제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공대의 출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증거도 있었다. 다른 전선에서 몹시 필요로 하는 독일군을 그 자리에 묶어둘 수 있었고, 또 게릴라 활동과 폭격의 연계로 독일군의 이동 속도를 소걸음이 되게 했다.


고전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제드버그 휘하의 게릴라들0
독일 제2 SS기갑사단을 몹시 괴롭혔기 때문에 이 사단은 노르망디 전선 도착이 2주일이나 늦어졌다.


프랑스 중남부의 코레즈에서 한 결정적인 공격이 가해졌다. 여기서 제드 팀은 간선도로에 놓인 작은 다리를 폭파하고 멈추어선 장갑차 대열에 총격을 가했다. 이 매복공격에서 프랑스인 20명이 전사했지만 그 때문에 독일군은 6시간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부르타뉴에서도 두 거점을 잃었지만, 그곳 특공대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고립된 농장과 숲속으로 분산해서 게릴라 전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작은 무리들이 브르타뉴 반도를 훓으면서 기습, 기관총 사격, 잠적이라는 마키 전법에 따라 독일군을 공격했다.


그들이 매우 잘 싸웠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언을 독일 서부 집단군의 6월분 정보 보고서에서 읽을 수 있다.


한 보고서는 연합군이 점점 더 많은 수의 "경험이 풍부리더"를 프랑스에 강하시키고 있으며, 그들이 있다는 증거는 "보다 효과적인 작전계획"과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정연한 행동"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지적했다.


7월말 현재 부르조엥 휘하에서는 약 400명의 특공대가 약
8,000명의 무장 마키 및 일부만 무장한 수천명의 게릴라와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7월 31일, 패튼 휘하 제3군의 전위부대가 아브랑슈에서 독일군 전선을 돌파했다. 미군 탱크들이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부르타뉴로 진입하는 가운데 특공대는 반도에 뻗은 두개의 하이웨이를 통행 가능상태로 유지 하고, 후퇴하는 독일 공병이 교량들을 폭파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일에는 제3 SAS연대 프랑스인 특공대 약 100명이 모를렉스시 가장자리의 협곡에 걸쳐 있는 석조로 된 유서깊은 육교를 점령하기 위해 시 근처에 강하했다.


그들은 즉각 공격을 개시하여 짧은 총격전 끝에 육교를 차지했다. 이튼날 아침 일찍 독일 제2공수사단 소속 약 1,000명의 독일군이 그 육교를 다시 빼앗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모를렉스시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군의 브레스트에 대한 전진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소도시 샤톨렝을 떠난 이 독일군 대열은 오전 10시 직전 제드의 장교 버나드 녹스가 조직한 매복조가 기다리는 함정 속으로 들어왔다.


녹스는 약 2,000명의 마키를 길 양쪽 덤불 속에 숨겨놓았다. 날이 새기 전에 그와 부하들은 수백개의 "타이어 부스위" -쇠통처럼 생긴 지뢰- 를 도로에 뿌러놓았다.


녹스는 독일군이 서행하는 트럭과 포들의 뒤를 따라 도로를 터덜터덜 행군해 오자, 대원들을 제지하고 잠시 가만히 기다리게 했다 선두차가 지뢰를 밝고 화염에 싸이자, 마키는 드디어 바주카포, 경기관총, 수류탄으로 일제히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순식 간에 독일군 30명이 죽고 20명이 부상했다. 마키의 살육반은 그들이 말하는 바 "독일인 사냥"을 벌이며 들판으로 도망친 독일군을 쫓아 추격했다.


큰 타격을 입은 독일군 대열은 중도에 임무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육교는 SAS와 마키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군 탱크들은 이 다리를 건너 브레스트를 향해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8월 중순까지 전투는 브르타뉴를 지나 외곽에서 전개되었고, 브르타뉴에 남아 있던 독일군 4개 사단은 포위되거나 너무 심한 타격을 받아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잃고 있었다.


특공대와 마키는 도로와 다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패튼군의 대병력까지 동원했어야 할런지도 몰랐던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한 것이다.


SAS 여단 사령관인 로데릭 맥레오드 준장은 부하들의 40%가 죽거나 부상당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을 브르타뉴의 해방자로 자처했고, 그것은 또 어느 정도 정당한 평가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자신의 관례를 깨고 게릴라부대가 공헌한 "큰 도움"을 인정했으며, 마키차량에 연합군의 흰 별 표시를 달도록 허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이프 2차 세계대전, 코만도 편, 5장 무장한 유령들 중

마키는 레지스탕스 말하는 것, 3, 4 SAS연대는 종전 이후 이것저것을 거쳐 현제는 1er RPIMa로 계승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