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슈라이버는 이 임무로 은성훈장을 수훈했으나 수여문이 남아있지 않아 훈장에 대한 이야기가 없음을 미리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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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4일-CCS 해칫포스, 정찰팀 증원


돌격소대: 소대장 그레고리 M. 해리건 중위, 월터 L. 마르칸텔 중위, 의무병 SGT 어니스트 C. 제이미슨 병장, 부소대장 제리 M. 슈라이버 상사


지상군 지휘관 폴 D. 케이힐 대위


브라이트 라이트 팀 지휘자 다니엘 L. 홀 중위


공중 지원 - 공중 지휘 + 195th AHC의 수송 헬기 & 건쉽 4대 + 20th SOS의 건쉽 4대


지휘 기체: 에드 "맥" 오퀸, 빌 오부숑 중위, 게리 라이트 중위 및 도어 거너 손더스


탑승자: 발진 책임자 벤자민 T. 캡 소령 및 CCS 사령관 얼 N. 트레이브 중령


1번 기체: 제리 마샬 준위 및 마이클 크루즈 준위, 크루치프 짐 브라우너, 도어거너 존 코벤즈


2번 기체: 론 아이비 준위, 게리 게레로 준위


3번 기체: 스티브 헤일리 준위, 부조종사 및 사수 미상


195 헬기 중대 건쉽(썬더치킨) 데이브 마조프 준위, 20th SOS 승무원 미상.


작전지: XT441913, 캄보디아 A-322 까툼 동쪽 11km


COSVN 습격 임무 직전, CCS는 여러 정찰 팀을 파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월터 R. "밥" 르웰링 중사의 팀이 꽌로이 발진 기지에서 준비를 하는 사진이 있다.


그 사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넝족 팀과 짐 볼렌의 몽타냐드 팀은 캄보디아 마못 근처의 G-80(COSVN)으로 투입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휘부는 우리들의 투입을 취소하고 대신 폴 케이힐 대위가 지휘하는 대규모 해칫 포스를 보냈다."


같은 날 피시후크에는 존 코스텔로 병장이 있는 다른 CCS 정찰팀이 있었다.


전 SOG 사령관인 스티브 카바노 대령은 이후 인터뷰에서 MACV 합참 정보본부장은 단 한 번만 구체적인 임무 내용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 임무는 1969년 4월 말 B-52 폭격 이후 이 지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합참 정보본부장인 필 데이비드슨은 COSVN 본부를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본부가 그곳 지하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와서 '스티브, 우리가 본부 위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거기로 가서 확인해 볼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이것이 이번 임무로 이어졌다.


이 임무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패티 호퍼라는 여성이 '태스크 포스 오메가' 웹 사이트에서 MIA에 대해 서술한 다음 글에서 언급된다.


호퍼는 CCS 사령관 얼 트레이브 중령 및 전체 사건의 목격자와의 인터뷰를 포함하여 임무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1968년부터 1969년 초까지 CCS는 월남과 캄보디아 사이의 피시후크 국경 지대에 6인 정찰 정찰대를 투입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적들이 강해진 것이 힘든 현실이었는데, 정찰대가 투입되어 3일 동안 들키지 않고 머물 수 있다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많은 팀이 투입되고 30분 이내에 발견되었으며 그 직후 총격을 받으며 철수했다.


해칫포스를 포함한 정찰팀이 직면한 또 다른 주요 요인은 무방비 LZ를 찾는 것이었다.


헬기 한 대가 투입될 만큼 큰 LZ를 찾는 것과 헬기 4대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무방비 LZ를 찾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전력의 균형을 흔들고 월맹군의 지역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월남 중앙사령부(COSVN)로 알려진 대월남 작전을 위한 월맹군 본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MACV 합참 정보본부장에 의해 건의됐다.


본부 벙커는 피시후크 지대에서 1마일 남짓, 캄보디아 메모트에서 남동쪽으로 약 14마일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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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시 며칠 전, CCS 얼 트레이브 중령은 OP-35에 COSVN 공격 계획 실행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계획에는 해칫포스가 월맹군 포로를 생포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대의 투입을 가릴 것이라는 B-52 아크라이트 폭격의 효과에 대한 보고도 포함되었다.


트레이브는 중령은 임무가 복잡해졌음을 깨닫고 증강된 소대만 투입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므로 취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그는 B-52 아크라이트 폭격이 예상대로 적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195 돌격 헬기 중대의 헬기는 1대의 지휘기와 4대의 휴이 건쉽, 4대의 수송 헬기로 총 9대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해칫포스의 규모는 제한되었다.


이러한 구성으로 인해 임무에는 소대 규모의 병력 1개만 배치될 수 있었다."


임무 전날 밤, CCS 의무병 제이미슨 병장과 동료 뉴요커인 195 AHC 파일럿, 데이브 마조프 준위는 조용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제이미슨 병장이 사망한 임무에 있었다. 우리는 임무 전날 밤에 조종사들과 그린베레 대원들을 불러 내 텐트에서 만났다. 우리 모두 일이 거칠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고 제이미슨 병장은 예감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일을 제대로 달성시켜 주기 위해 우리가 거기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틀렸지만 말이다. 우리는 둘 다 뉴욕 출신이었고 서로 잘 맞았다. 그는 사회로 복귀하면 학교로 돌아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피쉬후크 임무 중 사망하기 전날에 같이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다."


발진기지 신호과의 헨리 콘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임무 전날 밤에 TOC 옆에 서서 조 파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발진 기지로 박격포가 날아왔다. 조는 팔에 파편상을 입고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부상을 치료하고 임무에 투입되고 싶어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물러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무병 어니 제이미슨(나와 함께 B-56 시그마에 있었음)은 막 하와이 휴가에서 돌아왔고 그가 조 대신에 가기로 됐다. 어니는 그 사실에 정말 흥분했다. 그때까지 체이스메딕으로 헬기에만 있었고 현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의 신경외과 의사였고 그의 가족은 의사가 많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와서 그가 없는 동안에 태어난 어린 딸의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임무를 위해 짐을 꾸리라고 했을 때 그와 조는 의료 키트를 함께 가져갔고 조가 그의 부재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 브리핑하는 동안 그들은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그날 밤 잠을 푹 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호퍼와 트레이브는 계속해서 말한다.


"모든 미 육군 헬기는 지휘 헬기에 있는 195 헬기 중대 임무 지휘관인 빌 오부숑 중위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 임무에 할당된 유일한 타 부대 항공기는 필요할 경우 고정익 지원을 요청하는 공군 FAC였다.


새벽에, 이륙 직전에 슈라이버 중사는 첫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가 지상에서 이륙할 때 B-52는 COSVN에 대한 폭격을 위한 최종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헬기가 이륙을 준비하는 동시에 오루크 대위와 5명의 팀원을 태운 휴이는 기계적 문제가 발생하여 임무를 중단해야 했다.


이로 인해 지상군 부지휘관인 케이힐 대위가 지상군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원래 계획은 폭격 후 먼지가 가라앉으면 헬기가 팀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헬기가 지정된 좌표에 도착했을 때 위치는 엉뚱한 곳이었다.


헬기는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폭탄 구덩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 30~45분 동안 비행했다.


파일럿이 마침내 구덩이를 발견하자 그곳으로 내려와 착륙했다.


해칫포스 대원들이 뛰어내리자 헬기들은 기지로 복귀하기 위해 LZ에서 떠났다.


지상군이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은 벙커 단지에서 대략 30~50야드 떨어진 곳에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구덩이로 엄폐했다.


탑승자들을 하차시킨 직후 헬기는 LZ를 급히 떠났다.


월맹군이 콘크리트 벙커와 진지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하자 총격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했고 구덩이로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망했다.


제리 슈라이버는 가장 서쪽에 있는 폭탄 구덩이에 있었고 무전으로 전방 좌측에 있는 기관총 벙커로 발이 묶였다고 말하며 누구든지 거기로 사격을 가할 수 있는지 물었다.


중앙 구덩이에 있던 케이힐 대위, 마르칸텔 중위, 어니스트 C. 제이미슨 병장은 그들 역시 갇혀 있어 도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항공 지휘관은 공중 지원을 위해 건쉽을 데려올 것이라고 해칫포스에게 알렸다.


즉시 그는 모든 건쉽에게 미니건과 로켓을 사용하여 월맹군 진지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아군 부대에 타격을 주지 않도록 모든 공습은 벙커 라인을 따라 이루어졌다.


헬기가 기총소사릉 가하던 중 도어거너 중 한 명이 벙커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건쉽들의 위치보다 더 위에서는 지휘헬기에 탑승한 CCS 사령관 얼 트레이브 중령과 그를 지원하기 위해 동승한 남부 발진기지 책임자인 벤자민 T. 캡 소령이 있었다.


트레이브 중령은 전투 현장을 관측하고 있었다.


캡 소령은 상공에서 폭탄 구덩이에 고립된 소대원들을 볼 수 있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캡 소령은 월맹군 기관총이 적 진지 앞에 누워있는 병사들의 시체를 향해 발사되는 것을 목격했다.


적들은 발목 높이의 갈색 풀로 뒤덮인 개활지로 최저 표척 사격을 가해 해칫포스 소대원을 효과적으로 고립시켰다.


격렬한 전투가 시작된 지 약 10~15분 후, 케이힐 대위는 슈라이버 중사로부터 무전을 통해 자신과 5명의 몽타냐드 병사들이 적 진지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LZ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수목선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폴 케이힐 대위는 여섯 명이 구덩이에서 나와 수목선까지 30야드에 달하는 개활지를 가로질러 달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대원들이 수목선을 향해 낮은 풀밭을 질주하는 동안 제리 슈라이버는 지휘기와 무전을 유지했고 케이힐 대위는 계속해서 진행 상황을 목격했다.


그러나 케이힐은 슈라이버 중사가 수목선에 발사된 여러 발의 자동 화기에 맞아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제리 슈라이버와 지휘기 간의 무전이 끊어졌다.


임무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연락을 다시 시도했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나중에 폴 케이힐은 '제리 슈라이버가 쓰러진 순간 사망했다고 판단했다'라고 보고했다.


또한 치열한 전투 초반에 제이미슨 병장은 부상당한 몽타냐드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구덩이 밖을 떠났다.


몽타냐드에게 다가갔지만 즉시 기관총 사격이 날아와 그를 즉사시켰다.


이후 전투 최고점에 케이힐 대위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위로 머리를 들어 올렸으나 AK-47 탄환에 입을 맞았고 탄은 오른쪽 눈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로 인해 그는 오른쪽 눈을 영구적으로 잃었다.


해칫포스가 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부온마투옷에 위치한 CCS 북부 발진기지의 여러 팀들은 정찰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건쉽이 생존자를 대피시킬 만큼 월맹군을 제압할만한 화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이미 현장에 있는 북부 발진 기지의 팀은 추후 통지가 있을 때까지 안전한 위치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팀이 안전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자 팀의 지원을 위해 할당된 건쉽은 해칫포스를 구출하기 위해 남쪽으로 보내졌다.


미 공군 제20 특수작전비행단의 헬기들은 약 1시간 30분 후에 COSVN 전투 현장에 도착했다.


건쉽이 4대에서 8대로 증원된 후 해리건 중위는 모든 건쉽에게 로켓과 미니건으로 공격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증원된 항공 화력은 월맹군의 사격을 잠시 저지할 수는 있었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적의 지상 사격이 제압된 후, 그레그 해리건은 자신의 소대 절반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이후 45분 동안 계속해서 공습을 유도하다가 본인도 치명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해리건 중위의 사후 은성훈장 수여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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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4월 24일, 해리건 중위는 적지 깊은 곳에서 폭격 피해 평가 임무를 맡은 특수부대 팀의 부소대장으로 복무하면서 매우 용감한 행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무장 헬기의 전술적 공습 이후 LZ가 확보되자, 해리건 중위의 부대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즉시 헬기에서 내렸다.


헬기가 이륙하자마자 적군은 LZ 삼면에 숨겨져 있던 벙커에서 자동 화기와 로켓을 퍼부었다.


소대의 거의 절반이 적군의 초기 사격으로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부상을 입었지만 해리건 중위는 부상당한 다른 병사들을 즉시 돕기 시작했다.


소대장이 큰 중상을 입은 것을 보고, 해리건 중위는 대신 지휘를 맡아 생존 병력을 주변 지역의 방어선에 배치했다.


그는 한치의 오차 없이 적 위치로 공습을 유도했다.


적의 총격에 맞서 대원들을 집결시키려던 그는 다시 자동 화기의 공격을 받았다.


자신의 부상이 얼마나 큰지 깨달은 해리건 중위는 죽음이 가까워지기 전에 소대 지휘권을 서열 3위 대원에게 넘겼다.


해리건 중위의 목숨을 바쳐 행한 용감한 행동은 군 복무의 가장 큰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신과 그의 부대, 그리고 미국 육군에 대한 큰 영예를 반영한다..."


브라이트 라이트 팀에 의해 구조된 생존자 중에는 마르칸텔 중위와 케이힐 대위가 있었는데 둘 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마르칸텔의 은성훈장 수여문은 그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1969년 4월 24일, 마르칸텔 중위는 적지 깊숙한 곳에서 작전을 수행한 소대 규모의 정찰 부대의 3번째 지휘관으로 매우 용감한 행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부대가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적군은 LZ 3면에서 자동 화기로 사격을 가했다.


본인도 부상을 입었지만 다른 장교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자 마르칸텔 중위가 지휘를 맡았다.


그는 즉시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로 폭탄과 네이팜탄 투하를 요청했다.


폭격 후 적의 활동이 둔화되었고 소대는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마르칸텔 중위의 용감한 행동은 군 복무의 가장 큰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과 그의 부대, 그리고 미국 육군에 대한 큰 영예를 반영했다."


계속해서 트레이브의 보고에 따르면 그동안 2명의 미군과 4명의 몽타냐드로 구성된 정찰팀이 해칫포스의 지원을 위해 서쪽 수목선으로부터 불과 10야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 번째 폭탄 구덩이로 투입됐다.


그들의 임무는 벙커 참호나 후면 입구에 수류탄을 던지는 식으로 월맹군 벙커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덩이로 투입된 뒤 이들 역시 거센 자동화기 사격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고 정찰대는 전했다.


그 동안 8대의 건쉽은 작전 지역과 발진 기지를 계속해서 돌며 재무장/재급유를 하고 적 위치로 미니건과 로켓 사격을 계속해서 퍼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블루 맥스"라고 불리는 두 대의 미 육군 코브라 건쉽이 현장에 도착하여 화력을 지원했다.


코브라는 월남 꽝로이의 제20 야전포병 2대대에 속해있었다.


트레이브 중령은 헬기 10대로도 아직 필요한 화력에 달하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FAC에게 공군 공격기를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직후 FAC는 '작전을 지원할 제트기가 없다'라고 통보했다.


얼 트레이브는 계속해서 발진기지의 통신본부를 통해 CCS 본부로 무전을 보낸 다음, OP-35로 요청을 보냈다.


최종적으로 미 공군 전투기 편대가 약 45분 뒤 현장에 도착하기로 됐다.


전투기가 폭탄, 로켓, 기총소사로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한 후에도 지상의 생존자들은 대피 시도를 하기에는 적군의 지상 사격이 여전히 거세다고 보고했다.


트레이브 중령은 이용 가능한 모든 옵션과 무기를 고려하여 공산군의을 장악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벙커에 네이팜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트레이브 중령은 공격기에게 네이팜탄이 해칫포스의 머리 위가 아닌 벙커를 따라 투하하도록 요청했다.


두 번의 네이팜탄 투하 후 지상에 있는 미군은 적의 활동이 크게 감소했으며 이제 대피해도 안전하다고 보고했다.


네이팜탄 투하 직후 헬기 4대가 약 8시간 동안의 잔혹한 전투에서 지상군을 구출하기 위해 투입될 수 있었다.


3대의 헬기가 두 개의 구덩이에서 해칫포스를 대피시켰고 1대는 세 번째 구덩이에서 정찰팀을 철수시켰다.


전투지는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안에는 큰 개활지 두 개만 있었다. 하나는 LZ 북동쪽에 약 20야드 너비이고 다른 하나는 동쪽 끝 구덩이 남동쪽 끝에 약 50야드 너비였다.


파일럿 셋이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접근했다.


파일럿들은 서쪽의 수목선이 구덩이와 너무 가까워 많은 사람을 태운 채 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네 번째 헬기는 북동쪽 개활지를 통해 LZ로 진입하여 마지막 구덩이 근처에 착륙했고 동남동 방향에 개활지를 지나 이륙했다.


공습 이후 구출 헬기가 착륙했고, 브라이트라이트 팀의 리더인 댄 홀 중위가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해 헬기에서 내렸다.


헬기가 이륙하자 건쉽 중 하나가 구덩이에서 패널을 흔들고 있는 한 대원을 발견했다.


홀 중위가 탑승했던 헬기는 LZ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1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날아오는 기관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홀 중위는 주저하거나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폭탄 구덩이로 달려가 부상자를 데리고 헬기로 돌아왔다.


홀 중위는 구덩이에서 본 사망한 미군 장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떠났다.


이때 적군은 계속해서 헬기에 사격을 가했고 홀 중위는 헬기가 그를 태우지 못 하고 이륙할 상황에 직면할 뻔했다.


그의 용감한 행동은 적어도 한 명의 현지 대원의 생명을 구했고, 쓰러진 동료의 시신을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임무를 위해 투입된 인원 중 18명과 지원을 위해 투입된 6명 정찰팀 중 일부만이 부상 없이 돌아왔다.


해칫포스의 18명 중 10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안전하게 철수했으며 그레그 해리건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어니스트 제이미슨은 작전 중 사망/시신 미수습으로 보고되었으며, 제리 슈라이버와 다섯 명의 몽타냐드는 작전 중 실종으로 보고되었다.


해칫포스의 실패 후, CCN의 그린베레 대원들은 "하노이 한나"가 월맹군에 의해 "매드 독" 슈라이버가 생포됐다고 자랑하는 월맹 선전 방송을 들었다.


첫 번째 방송 이후 얼마 후 하노이 한나가 방송한 두 번째 방송에서는 "슈라이버의 귀를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제리 슈라이버가 사망했고 그의 시신을 확보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첫 번째 방송은 나중에 1993년에 기밀 해제된 미군 정보 보고서에 의해 입증되었으며, 이 보고서는 "나중에 미군 한 명을 생포했다는 월맹의 선전을 들었다"고 인정했다.


이후에 SOG 사령관인 스티브 카바노 대령이 언급했듯이 완전히 재앙 수준이었고 소대의 절반을 잃었다.


트레이브 중령은 2009년 후반에 린지 중령(이 글 원문의 저자)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5 헬기 중대에서 그 임무를 지원한 여러 대원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유일한 미군은 폴 케이힐 뿐이다. 나는 그날 지휘 헬기에 탑승한 총사령관이었다. 그날 해칫포스 뿐만 아니라 강렬하고 영웅적인 지원을 항공 지원이 있었다. 대다수(건쉽 4대, 수송 4대, 지휘 1대)는 남부 발진 기지를 정기적으로 지원하는 195 헬기중대에서 나온 것이었고 북부 발진 기지의 20th SOS에서 추가 건쉽 4대를 긴급 지원받은 것이었다. 투입된 25~30명의 몽타냐드 중 약 절반이 사망했고 사실상 모든 생존자가 부상을 입었다."


[편집자 주 - 댄 홀 중위가 이끈 브라이트라이트 팀에 또 누가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CCS 의무병 케네스 "닥" 쿼큰부시는 이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고 제이미슨이 서로 작전을 전환하자고 말했기 때문에 그 작전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곧 간호사가 될 큰 딸의 이름은 캐서린 슈라이버 쿼큰부시이고, 막내 딸은 이름은 그레이스 제이미 쿼큰부시이다.) 또한 그 작전 이후 나는 작전 전환 권유를 거부했다. 게다가, 나만큼 현장 경력이 많지 않은 사람들과 자주 충돌했다. 나는 다시는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또한, 이 두 친구의 이름을 따서 딸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들은 내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내 딸들이 살아있는 한 내 기억 속에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CCS 정찰팀의 알 봇킨 병장은 마르칸텔 중위는 현재 사망했다고 말했으며, 작전 몇 개월 후 그와의 만남을 회상했다.


"마르칸텔 중위가 포트 데벤스의 10 특전단에 배치되었을 때 그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것을 기억한다. 그는 케이힐 대위 및 제리 슈라이버 중사와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나는 그가 L-20, 터너 드롭 존에서 강하 훈련 중 낙하산 사고로 죽기 바로 전날 그와 약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18개월 만에 한 그의 첫 강하였다."


195 헬기중대와 20th SOS의 건쉽 4대 승무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레고리 마이클 해리건 중위, 의무병 어니스트 C. 제이미슨 병장 및 제리 마이클 슈라이버 중사의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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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마이클 해리건 중위는 20세였으며 미니애폴리스 출신이었다.


그는 12월 중순부터 월남 파병을 시작했다.


그와 이번 임무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동하는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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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병 어니스트 C. 제이미슨 병장은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신의 SF 자격을 갖춘 22세의 의무병이었다.


그는 월남 파병의 절반을 진행했으며 25개의 CCS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특수부대에 입대하기 위해 의예과 과정 학생으로 있던 템플 대학교를 떠났다.


그는 아내, 어린 딸, 부모, 네 명의 이복 형제를 두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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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M. 슈라이버 중사는 27세였으며 그의 기록상 집은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였다.


그는 월남에서 복무 3년을 맞이한 지 불과 몇 주 밖에 되지 않았다.


슈라이버는 육군부 장관이 사망 추정 결과를 승인한 74년 6월 10일까지 MIA로 처리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사에서 상사로 추서됐다.


오늘날에는 플로리다주 사우스 월튼 카운티 법원 별관 입구에 월튼 카운티 출신의 전사들과 함께 그곳에 함께 있을 영예를 얻었다.


제리의 사진은 별관 벽에 있다.


이곳은 한때 제리의 고향이었다.


또한 CCS 정찰대원인 랜디 해리슨 중위는 최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경험 중 하나는 지난 여름 시애틀 근처 포트 로튼 묘지에서 그를 기리기 위한 묘비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곳에 자주 들르고는 한다."


여파와 전설


존 플라스터의 SOG 사진과 역사라는 책에서도 69년 4월 24일 COSVN 습격 이야기는 전설적인 CS 정찰병 "매드독" 슈라이버의 이야기와 얽혀 있으며 다른 곳에서도 함께 이야기되곤 한다.


피비린내 나는 COSVN 습격 이후, 피시후크에 대한 임무는 사례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사이공 본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적 첩자에 의해 SOG 정보 유출이 있다는 의혹이 10배나 커졌다.


1969년 6월, CCS에 있는 슈라이버 중사의 동료들은 그의 소중한 중국산 스모킹 재킷을 클럽의 명예의 전당에 걸어 그의 삶에 깊은 존경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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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스모킹 재킷 아래에는 "1969년 4월 24일 실종된 제리 M. 슈라이버 중사를 기리며"라는 문구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는 CCS 대웡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인물, 즉 그린베레를 착용한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사람에게 바치는 겸손한 헌사였다.


제리 M. 슈라이버 중사는 월남에서 연속 3년 반을 보냈다.


파병 중에 그는 제5특전단이 운영하는 거의 모든 위험한 기밀 프로젝트에 자원했다.


그가 참여한 임무의 분류로 인해 그는 합당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개인적으로 100명 이상의 적을 죽였으며 그가 얻은 정보로 수천 명을 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은 너무나 잘 알려져 하노이 라디오 방송에서는 그에게 "매드독"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그를 사살하거나 생포했을 때 $10,000의 보상금을 걸었다.


그가 받은 훈장은 다음과 같다


은성 2개, 육군 공로 훈장 3개, 동성훈장 7개, 퍼플 하트 1개, 군인 훈장 1개, 항공 훈장 1개


69년 4월 24일 0615시, 슈라이버 중사는 전날 밤, 돌아오지 못 할 것이라고 말한 임무를 위해 꽌로이에서 헬기에 탑승했다.


그가 헬기에 탑승하기 전에 했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내 아들내미 잘 돌봐줘." 그가 두고 온 저먼 셰퍼드 클라우스를 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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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된 스모킹 재킷과 클라우스와 1달러가 조금 넘는 그의 MPC(Military Payment Certificate)가 슈라이버의 개인 소유물의 대부분이었다.


슈라이버 중사는 라데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몽타냐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급여의 대부분을 자신의 소대에 속한 몽타냐드 댜원의 가족을 위해 음식과 의복을 구입하는 데 썼다.


그의 스모킹 재킷은 삶과 감정을 전기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이는 그가 적에 대한 증오심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조국을 위해 가졌던 의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반영한다.


재킷에 자수로 쓰여진 "Ogdaa"는 "One Good Deal After Another"를 의미했다.


더 깊은 해석은 "남자라면 배짱이 있고, 최고의 자원자와 함께 싸우고 싶다"는 전투 자원자라면 누구나 이해하는 의미다.


제리 M. 슈라이버 중사의 업적, 용기 및 태도는 오랫동안 그린베레를 착용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이 재킷은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살았으며 그를 잊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훨씬 후인 70년 6월 12일, 캄보디아 침공 중에 시신 수습 팀이 COSVN 전투 현장에 투입되어 실종된 그린베레 부사관 두 명을 찾기 위해 해당 지역을 수색했다.


그들은 어니스트 제이미슨 병장과 실종된 몽타냐드 중 한 명의 것으로 확인된 유해를 수습했다.


그러나 제리 슈라이버와 실종된 나머지 4명의 몽타냐드의 시신 또는 장비의 흔적을 전투 현장 인근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투입이 발각되어 중지될 때마다 수십 명의 다른 대원들이 대신 월맹군 전선을 통과하여 광범위한 대상을 공격하고 중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린베레 정찰팀과 함께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수행한 MACV-SOG 임무 수는 1969년에 452회였다.


이는 미군 역사상 타지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진행된 습격, 방해 행위 및 정보 수집 캠페인이었다.


MACV-SOG 팀은 지금까지 가장 전투에 효과적인 종심 침투 부대 중 하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제리 슈라이버가 이 잔혹한 전투에서 사망했다면, 그에게는 유해를 가족, 친구, 조국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살았다면 그는 확실히 생포되었을 것이며 동남아에서 행방불명된 다른 미군들과 마찬가지로 꽤 다른 얘기가 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월맹이 원할 때마다 슈라이버를 돌려줄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월남전이 끝난 이후 미국 정부는 실종되거나 행방이 묘연한 미군 포로에 대한 보고를 21,000건 이상 접수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동남아 전역에 포로로 남아 있는 미군 전쟁 포로로 기록되고 있다.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있던 군인들은 다양한 위험한 상황에서 비행하고 싸우도록 요청받았으며 부상당하거나 살해당하거나 포로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봉사한 나라가 그들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실종 상태였다.


트레이브 중령이 보낸 이메일에 따르면 제리 슈라이버는 세 번째 월남 파병 만료일까지 3주도 채 남지 않았다.


COSVN 습격 이후, 계속해서 정찰팀을 보내 저항이 심해 결과가 좋지 않았던 지역을 조사했다.


그곳에 대규모 부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분명했어야 했다.


그러나 "상부"가 마침내 연합군을 투입하여 피시후크와 COSVN 본부를 소탕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때에도 닉슨 대통령은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고, 그 후 월맹군은 황폐화된 기지를 재건했으며 월남 정부에 대한 최종 공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