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석영 작전(Operation quartz)
1979년, 소수 백인들이 집권하던 로디지아(Rhodesia)는 게릴라 단체들의 저항과 경제봉쇄, 전체인구의 95%에 달하는 흑인들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흑백 연립정부인 짐바브웨-로디지아(Zimbabwe Rhodesia)를 구성한다. 이안 스미스(Ian Smith)가 이끄는 로디지아 전선(Rhodesian Front)은 배후에서 내각을 조종하려 했지만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와 아프리카 민족연합(ZANU)이 이에 반대하면서 1980년 재선거를 치루게 됐다.
과거 게릴라 시절 크게 고생했던 무가베는 당선되는 즉시 군을 해체할 것이라는게 자명했기 때문에 로디지아군(RSF)은 석영 작전(Operation quartz)이라고 이름 붙인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다. 만약 무가베의 당선이 확실시 될 경우, 육군과 공군력을 총동원하여 수도 솔즈베리(Salisbury)에 위치한 국가기관, 투표소, ZANU와 기타 게릴라 세력들의 캠프를 타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 승인권자는 로디지아군의 총사령관 피터 월스(Peter Walls)였다.(주: 그는 말레이 사태 당시 22 SAS C스쿼드론의 부중대장이었다.
선거가 치뤄질 솔즈베리에는 ZANU 이외에도 짐바브웨-아프리카 인민연합(ZAPU), 짐바브웨 인민혁명당(ZIPRA) 같은 다른 게릴라 단체들도 몰려와 있었다. 각 단체의 수장들은 경호 명목으로 전투원들을 최소 1개 중대씩은 데려왔기 때문에, 로디지아군의 눈으로 보기엔 사실상 테러리트들의 정모현장이었다.
이 작전에는 로디지아군 소속 T-55 8대가 동원됐다. 원래 로디지아군은 기갑장비을 운용하지 않았다. 이 전차들은 본래 폴란드에서 제작되어 프랑스 국적 선박에 실려 우간다의 이디 아민(Idi Amin) 정권 군대에게 납품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남아공 정부는 더반 항구에서 이것들을 압수하였고, 연구용 2대를 제외한 나머지 8대를 로디지아군에게 기부형식으로 증여했다. 당연히 전차를 얻게 된 로디지아군은 이래저래 굴려먹을 생각에 신이 나있었다.
로디지아 SAS(Rhodesian SAS)에게는 로디지아 대학건물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무가베와 ZANU 수뇌부에 대한 암살하는 헥틱 작전(Operation Hectic)이 별도로 내려질 예정이었다. 각 스쿼드론은 최소 100명~200명 가량의 게릴라 단체 지휘부와 그 경호원들을 사살해야 했다. 전 대원들은 당시 영국 SAS를 벤치마킹하여 방탄복과 섬광탄으로 무장했다.
(주: 1965년 일방 독립선언 이후 영국과 로디지아는 단교했다고 알려져있으나, 헤리퍼드의 아들들은 비밀리에 커넥션을 유지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들은 방 하나를 클리어할 때마다 창문에 X자가 쳐진 커튼을 내걸고 피아식별을 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로디지아에 우호적이고 ZANU와 대립각을 세우던 ZIPRA 측에게는 미리 사전통보를 하여 수뇌부들에게 탈출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군(SADF)도 이 계획에 깊게 관여했다. 작전이 시작되면 남아공 공군 역시 게릴라 캠프들에 대한 공습을 실시할 예정이었고, 푸마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남아공 특수전 그룹(Recce)들을 투입하기로 했다. 사실 남아공군은 이미 치안안정을 목적으로 1,000명의 병력을 로디지아에 파병한 상태였다.
작전 실패에 대비한 최후의 계획도 있었다. 만약 무가베 암살에 실패하고 로디지아군들이 포위섬멸 당한다면 로디지아 국민(백인들)에 대한 보복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에 남아공 정부는 로디지아와 남아공 간의 국경통로인 베이트브릿지(Beitbridge)에 400여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백인들의 피난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총 선거는 2월 14일부터 시작됐다. 로디지아군의 각 부대들은 이 기간동안 훈련과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작전위치로 이동했다. 대원들은 빨리 무전기로부터 'Quartz'라는 코드명이 발효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수십년 동안 잡아죽이고 싶어했던 게릴라들의 수장이 한 자리에 모인 이 순간이야 말로 그들이 기다려왔던 이상향이었다. 로디지아군 최초의 기갑대대가 될 예정이었던 T-55 승무원들 역시 서방국가들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훈련을 해왔고, 어서 빨리 실전에 투입되고 싶어했다. 각 전차들은 주포탄과 12.7mm 동축기관총 탄약을 잔뜩 쟁여놓았다. 단 몇 시간이면 로디지아를 둘러 싼 게릴라들은 일망타진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투표결과를 듣고 있는 로디지아군 T-55 전차병들)
1980년 3월 4일 월요일, 개표가 끝났고 선거결과가 발표됐다. 예상대로 무가베가 승리하였다. 하지만 작전은 끝내 발효되지 않았다.
로디지아군들은 환호하며 거리를 누비는 흑인들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안 스미스의 회고에 의하면 월스가 무가베는 절대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걸 기억하며, 이 계획이 최소 H아워 3시간 전 취소됐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은 1979년 랭카스터 하우스 협의(Lancaster House Agreement)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아했으므로 로디지아군의 상황을 유의주시하고 있었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영국정부가 무가베 측에 계획을 알려줬다고 믿는다. 확실한 것은, 쿠데타가 실행됐다면 게릴라 단체들은 일시적으로 일망타진 됐을테지만 로디지아는 여태까지 겪은 것보다 상상을 초월한 수준의 국제제재를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1980년 4월 18일, 로디지아는 국명을 짐바브웨로 완전히 변경하였고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석영 작전의 최종승인권자였던 월스는 투표 직후 무가베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였으나, 곧 쿠데타 기도혐의를 추궁 받으며 총사령관 자리에서 쫒겨났고 1980년 말 남아공으로 망명하였다.
2. 겨울 작전(Operation Winter)
이제 로디지아인들에게는 두가지 선택권이 남아있었다. 새로운 조국에 충성하던가, 아니면 이 땅을 떠나던가. 무가베는 로디지아 백인들에게 평화와 화합을 약속했지만, 실제 민심은 그렇지 않았다. 백년 넘도록 압제를 받아온 흑인민중들은 어떻게 해서든 백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복수하고 싶어했다.
어린아이, 노인 다 합쳐서 50만명도 되지 않았던 백인들 대부분은 다른나라로 이민을 선택했다. 그중 영연방 국가, 특히 제일 가까운 남아공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군인들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군복을 벗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이들을 받아준 곳이 바로 남아공이었다.
남아공군과 로디지아군의 군사적 교류는 유서 깊었다. 로디지아 곳곳에는 남아공군이 파병되어 있었고, 심지어 로디지아 SAS의 D스쿼드론은 남아공 제1, 제5 정찰 코만도(Reconnaissance Commando)에서 파견 온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아공 특수전여단(Recces)의 총사령관이었던 프레데릭 루츠(Frederich Wilhelm Loots) 소장은 로디지아의 특수전-첩보 자산들을 흡수하여 신생 남아공군의 비정규전 역량을 높이고 싶어했다. 당연히 양측의 이해관계는 맞아 떨어졌다. 이 작전은 겨울(Operation Winter)라는 이름으로 실행됐다. 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솔즈베리 공항에는 국적불명의 수송기들이 몇달 내내 병력을 싣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의문점은 당시 남아공 공군이 그렇게 많은 항공자산과 소티를 감당 해낼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이 이 작전을 지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생겨났다.
제일 먼저 로디지아 SAS에게 오퍼가 갔다. 약 100여명의 인원이 솔즈베리를 떠나 더반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제6 정찰 코만도(6 Reconnaissance Commando)라는 이름으로 재창설됐다. 아쉽게도 이 부대는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로 딱 1년만 운영된 뒤 폐지됐다. 중대원들은 다른 부대로 뿔뿔히 흩어졌지만, 오히려 남아공 특수전부대들의 역량 증가에 도움이 됐다. 이들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데, 남아공의 특수전 휘장은 이들이 사용했던 단검과 월계관 휘장에서 비롯됐다.
부시전쟁에서 수많은 전설을 써내려갔던 셀루스 스카우트(Selous Scouts) 역시 남아공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제5 정찰연대(5 Reconnaissance Regiment)에 배속됐으며, 모잠비크와 앙골라에서 그들의 장기였던 파이어포스(Fireforce) 전술을 그대로 써먹었다.
잔혹성으로 악명 높았던 그레이스 스카우트(Grey's Scouts)의 장교와 부사관들도 대부분 남아공으로 떠났다. 이들은 남아공 군-경 소속으로 국경경비 임무를 맡았다.
제1 로디지아 경보병 대대(1RLI)도 1980년 10월 31일, 알루에트 헬리콥터를 동반한 거창한 해체식을 거행한 뒤 해산했다. 부대원들 일부는 연대의 남아공 제32 경보병대대로 들어갔다. 부대 기념물들과 동상은 전부 요하네스버그로 이전됐다. 전우회 역시 남아공을 기반으로 유지 중이다.
전체병력 1만명 가량의 로디지아군들중 약 5천여명이 1983년까지 남아공 군-경에 합류했다. 하도 많이 빼가니까 무가베도 빡쳤는지, 솔즈베리의 남아공 대사관을 용병사무소라고 욕하며 폐쇄하고 외교관들을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주: 군인들은 출발 전 남아공 대사관에 들러서 여권을 발급 받았다.)
하지만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도 존재했다. 로디지아 SAS와 1RLI의 백인간부 소수와 흑인 대원 대부분은 신생국 짐바브웨군의 중추로 기용됐다. 이들이 떠나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는데, 백인들의 경우 죽던 살던 고향에서 죽겠다는 마인드가 대부분이었고 흑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진행 중이던 남아공에서 하층민으로 살 바에 차라리 고향에서 한자리 꿰차는게 더 좋을거라고 여겼다. 무가베 역시 자신의 게릴라시절 전우들이 실권을 잡는 것을 매우 견제했다. 그래서 일부러 로디지아군 출신들을 우두머리로 기용했고,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다만 이 때문에 짐바브웨군에는 오늘날까지도 로디지아군 출신 파벌과 게릴라 출신 파벌 두개가 공존하고 있다.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지는 못했다. 셀루스 스카우트나 그레이스 스카우트에서 복무한 흑인들은 수백명은 동족을 사냥한 앞잡이로 몰려서 보복살해 당하거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로디지아군 출신들의 합류로 1980년대 남아공군의 대게릴라 대응 전문성과 비정규전 역량은 매우 크게 향상됐고 남아공이 사하라 이남의 지역강국으로 군림하는데 큰 버팀목 역할을 했다.
영국 솔즈베리 후작(Earl of Salisbury)의 영지인 햇필드 하우스(Hatfield House) 구석에는 로디지아 경보병대를 추모하는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이 여기로 오게 된 경위는 제3대 솔즈베리 후작 개스코인 세실(Gascoyne-Cecil)이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의 수도 '솔즈베리'가 건립됐기 때문이다. 이 동상은 로디지아군 해체 이후 남아공과 영국을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셀루스는 5연대가 아니라 3 정찰 코만도라고 나오내, 암튼 흥미로운 글 추
그나저나 현 짐바브웨군 특수전부대는 어떻게 구성되있을지 궁금하긴 하내, 에초에 국가 역량이 좆박아서 재대로 굴러갈것같진 않지만
https://selousscouts.tripod.com/selous_scouts_and_the_south_afri.htm
정확히는 3정찰 코만도랑 5정찰 코만도 두개에 나눠서 들어갔는데, 1981년에 두 부대가 합쳐서 5정찰연대가 됐다고 함.
ㅇㅎ
로지디아 = 백인 제국주의의 망령 로디지아군 = 식민주의를 표방하는 시대착오적인 무력집단 이들이 사라진건 잘된 일이지만 흑인들이 원해서 당선된 무가베도 결국 막장이 된게 아이러니함
로디지아에서 다양한 전술이 파생된것은 맞지만 너가 말한 식민주의에 기반한 백인 우월주의 때문에 비판적인 시선도 필요하다.
로디지아 붕괴 후에 나라꼴이 막장이 되었다고 해서 시대착오적 백인 제국주의/인종주의 침략자의 후예들에게 면죄부를 줄수는 없는 노릇이지 ㄹㅇ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1960년대부터 남아공이 한국인을 명예백인으로 인정해줄테니 수교해달라 할때 1990년대까지 무시깐게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