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을 입은 몽타냐드(오른쪽)가 로프 퇴출을 기다리는 동안 휴이로부터 로프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RT 메인)
SOG 정찰은 순수한 능력주의로 진화했다.
직급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팀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1-0(팀장)를 맡았다.
하급 부사관이 이끄는 상급 부사관이나 장교를 이끄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적진에서는 경험만 중요하기 때문에 젊은 대원이 나이 많은 대원을 이끄는 경우가 더 흔했다.
10회의 임무를 경험한 사람은 1회 임무를 경험한 사람보다 10배만큼 아는게 아니라 100배이상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부 대원들은 전선 뒤에서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웠을 때 사망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영국의 폭탄 처리 전문가들처럼, 오래 살아남아 충분히 배웠다면 살 수 있었다.
그 후, 운명을 건 10번 정도의 임무 끝에 운도 함께 따라붙었다.
여러 명의 적을 10번 중 9번 제압할 수 있는 경이로운 총잡이조차도 여전히 10번의 총격전에서 한 번씩 죽었다.
대원의 사망을 부추기는 것 중에는 가장 성공적인 1-0에게 가장 위험한 임무를 부여하는 SOG의 제도적 성향도 있었고, 이는 악화되는 확률이 마침내 최고의 팀장마저 압도할 수 있을 때까지 후속 작전마다 계속해서 판돈이 올려졌다.
자유로운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자원자였기 때문에 각 정찰팀은 1-0 아래에서 함께 위험에 직면할 준비가 된 사람들의 자유로운 공동체였다.
짐의 무게를 버틸 수 없거나 총격전에서 활약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 또는 단순히 정글에서 너무 많은 소음을 낸 사람은 팀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전투 기술 그 이상이었다.
명예훈장 수훈자 밥 하워드는 "말로 표현하기가 좀 어렵지만 사랑하는 이가 있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했다.
"만약 당신이 SOG에서 복무했고 기꺼이 죽고자 한다면, 당신이 죽거나 함께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 그곳에 있기를 원할 것이다."
(라오스 국경에서 코끼리 풀을 지나는 SOG 정찰팀)
1-0는 특별한 경우였다.
팀에서 가장 지식이 풍부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각 팀원들의 임무도 모두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진정한 리더가 되어야 했다.
몽타냐드 포인트맨이 너무 두려워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1-0는 스스로 포인트맨의 역할 맡았다.
SOG 윤리에 따르면 1-0는 투입 중에 헬기에서 첫 번째로 내리는 사람이자 퇴출 중 마지막으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1-0는 비겁함을 보이거나 임무나 팀원보다 자신을 우선시한다면 1-1과 1-2를 오래 둘 수 없었다.
이러한 상호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심만이 팀이 완전히 단독으로, 적진 깊숙한 곳에서, 지원도 없고, 포병도 없고, 무전을 요청 중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순간에도 팀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월맹군이 수천 명,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팀원들이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동지애의 유대, 서로에 대한 완전한 믿음, 1-0의 판단에 대한 신뢰뿐이었다.
1-0에게는 배짱, 불굴의 의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그리고 공격성과 주의력이 모순적으로 혼합되어 있어야 했다.
판단과 성실성
SOG 선임 장교들은 1-0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 외에도 그의 정직성에 의존해야 했다.
1-0가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을 때 종종 이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1-0의 평판 뿐이기도 했다. 1-0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PT-76 탱크인 것이다.
과장할 여지는 없었고 노골적인 거짓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SOG 지휘관들이 1-0에 대한 믿음을 잃을 이유가 생겼다면 쫓겨날 뿐이다.
1-0는 작전 지역에 머무르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철수를 요청했다.
종종 월남에서 책상 뒤에 안전하게 앉아 있는 장교들이 팀장의 요청을 기각하여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팀장의 판단에 따랐다.
나중에 꽁무니를 뺐거나 작전 의욕을 잃었다면 팀이 퇴출된 후에 처리하면 된다.
아마도 1-0가 됐을 때 가장 큰 보상은 혼자서 모든 일을 정하는 것이다.
다른 부대와는 달리 1-0는 임무를 할당받고 나면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졌다. 데려올 인원의 수를 결정하고 팀원의 무기와 장비를 선택하고 투입 방법과 시간을 선택했다.
그리고 한 정찰대원이 이제 충분히 일했으며 임무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고 말한다면 이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대원는 단순히 지원이나 직원 위치로 재배치되며 이러한 처리도 역시 도움이 됐다.
병참과, 정보과, 작전과의 부사관 중 상당수는 전직 정찰대원이었기 때문에 항상 정찰을 돕는 데 최선을 다했고, 일부 외부인의 무지가 문제를 일으킬 때면 기꺼이 간섭했다.
빌리 그린우드 일등상사는 강압적인 작전 장교에게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다. "이 사람들이 요청한 지원을 제공하시거나 배낭을 챙기고 내일부터 직접 임무를 수행해 보십쇼."
(스트레스 가득한 얼굴로 CCC 헬기 착륙장에서 사망한 대원들의 시신을 옮기는 휴이를 기다리는 정찰대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필립 우드 병장, 짐 넌 병장, 빌리 그린우드 일등상사, 마이크 셰퍼드 하사.)
우리는 빌리에게 키스를 갈겨줄 수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동지애는 정찰팀과 해칫포스 전체로 퍼졌다.
한 팀이 LZ에서 포위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무 중간에 쉬고 있던 다른 정찰팀들은 CAR-15를 들고 위협받는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헬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팀이 돌아올 때마다 그 헬기장은 정찰 중대 전원이 악수와 시원한 맥주로 돌아오는 팀을 맞이했다.
(정찰중대 전원이 헬기장에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등을 두드려주며 돌아오는 팀을 맞이했다)
떠나간 전우 기리기
(1970년 4월 3일에 캄보디아에서 사망한 에버렛 코퍼 하사의 추도식을 치르는 CCS의 군종병)
SOG 전사자들과 실종자들은 알려지지 못했고 그들의 일급 비밀 임무가 공개될 수 없었기에 살아남은 동료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기억할 개인적인 방법을 찾았다.
가끔 목사를 모시고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런 격식을 갖춘 경우는 드물었다.
모든 정찰대원들이 NCO 클럽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나누고, 죽은 이들을 위해 건배를 제안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그러다가 누군가 "'헤이, 블루'를 부르자"고 한다.
그러면 모두가 일어서서 술을 마시며 그 슬픈 노래를 일제히 부르곤 했다.
외부인에게 그 가사는 아마도 진부하게 들릴 것이다. 소년의 가장 친한 친구인 개에 관한 노래였고, 개가 죽자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럽은 그 노래로 울려 퍼졌고 다 큰 어른들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특히 막 떠난 친구의 이름이 떠나간 대원들의 명단에 추가되는 마지막 절에 도달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
실종된 대원들도 그들의 이름을 따서 건물 이름을 지어 기념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름 없는 건물이 많았고 사망한 그린베레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1970년까지 SOG 피해가 너무 커져 거의 모든 건물에 이름이 붙여졌다.
일반적으로 실종자들과 건물을 연관시켰다. 예를 들어 피터 "팻 알버트" 윌슨은 종종 바에서 음료를 제공했다.
그가 실종된 후 바는 팻 알버트라는 이름이 생겼다.
(1970년 10월, 윌슨이 실종된 후, 바는 잃어버린 동료들을 추모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따라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바뀌었다)
(댄 스터(왼쪽)와 리차드 노에와 같은 정찰대원들을 위해 바를 지키던 1-0 피터 "팻 알버트" 윌슨(오른쪽))
부록: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1398
<span style="font-size:10pt;">실종 대원 추모곡 </span> <span style="font-size:10pt;"><span style="font-size:10pt;">(1970년 4월 3일에 캄보디아에서 사망한 에버렛 코퍼 하사의 추도식을 치르는 CCS의 군종병)https://youtu.be/jbuQDqnMebkI had a dog, and his name was Blue Bet </span>gall.dcinside.comSOG의 원주민
(그린베레와 몽타냐드 사이의 유대는 형제애에 가까웠다. 1-0 로버트 맥니어(오른쪽) 및 1-1 하워드 슈가(맥니어 옆)의 RT 워싱턴은 이러한 캐주얼한 관계이면서도 서로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미군과 마찬가지로 SOG의 현지 병사들도 자원자였으며 그들과 그린베레 사이의 유대는 더욱 강해졌다.
초기에 대부분의 현지군은 중국 남부를 배회하던 중국의 넝족이었다.
월남인과 민족적으로 구별되는 넝족은 인도의 구르카족과 마찬가지로 전투 능력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1968년까지 비밀 작전 중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 몽타냐드와 월남인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몽타냐드 고산부족민은 북미의 수족, 체로키족, 아파치족, 이로쿼이족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지리적 구분에 따라 거주하는 브루, 세뎅, 라데, 제라이와 같은 여러 부족에서 모집됐다.
문화와 언어의 약간의 차이로 인해 몽타냐드들은 정찰팀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부족 출신인 것을 선호했다.
극심한 빈곤에도 불구하고 몽타냐드 마을은 많은 그린베레 대원들이 방문하여 남페이 미주(米酒)를 같이 마시고 황동 팔찌를 받아 명예 부족원이 되는 행복한 곳이었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몽타냐드는 "그렇다"가 그대로 "그렇다"를 의미하는 단순한 인생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다른 몽타냐드와 미군 모두에게 끝없는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월남 팀원들은 교육을 가장 잘 받고 가장 빨리 배우는 경향이 있었지만 충성심에 대한 의문이 항상 남아 있었다. 특히 전직 월맹군이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군 팀원들과 동일한 위험을 겪었고, 만약 포로가 된다면 월맹에게 반역자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월남 특수부대가 이끄는 정찰팀은 전쟁 후반, 1970년부터 1971년까지의 "월남화" 기간 동안 전면에 등장했다.
준비 여부에 관계없이 정책 날짜를 맞추기 위해 갑자기 훈련을 서둘러 월경 작전이란 가혹한 가마솥에 던져졌다.
많은 월남군 팀은 SOG 미군만큼 용감하게 싸운 훌륭하고 용감한 대원들로 구성되었지만 몇몇 팀은 첫 번째 임무에서 사라지거나 스스로 총상을 입히고 돌아왔다.
최고의 미군 1-0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월남군 팀장도 잦은 손실이 생길 때까지 계속하여 더욱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71년, 월남군 정찰팀을 사열하는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 일부 월남군 팀은 용기와 재능을 보였지만 다른 팀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부록: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1633
부록: 전우애의 실현, 존 케덴버그본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1603 정찰계 윤리 - 워리어플랫폼 마이너 갤러리(중상을gall.dcinside.com부록: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1856
가장 용감한 전사, 로버트 하워드비범한 군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대원 단 한 명만 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SOG에는 최상급의 정찰대원인 로버트 하워드 중사가 있었다. 로버트 하워드는 미군 역사상 유일하게 13개월 동안 세 번이나 명예훈장 후보gall.dcinside.com
한임무 한임무가 강릉무장공비급 포위망 뚧기 난이도인데 사는게 굉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