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태 당시 작전 계획을 위해 지난 1년간 수집된 정보들의 검토 과정에서 심각하고 지속적인 정보 결핍이 드러났다.
...이러한 정보 결핍은 정확하고 시기 적절한 상황 중심의 작전 및 작전 환경에 대한 세부 사항을 필요로 하는 군 계획자들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기술적인 부분을 통해 작전에 필요한 일부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실제로 그랬지만, 요구되는 첩보들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 정보원들에게 크게 의지하는 본성이 있다. 현재 국방부 및 각 군의 인간정보 구조는 이러한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합동 참모본부의 작전본부장 필립 C. 가스트의 제안서
1980년 여름의 미국은 매우 암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해 4월 24일, 미국은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 억류당한 52명의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글 클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거대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작전의 계획대로 오만의 마시라 섬에서 출발한 레인저와 델타 포스 대원들로 구성된 이글 클로 작전의 구출부대는 이란 깊숙한 곳의 외딴 사막에 위치한 '데저트 원' 에 도착해 그들을 '데저트 투' 로 데려갈 미 해군 RH-53D 시 스탤리온 헬리콥터 8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것은 단 6대의 헬리콥터이었다. 데저트 원에 도달하지 못한 2대의 헬리콥터 중 하나인 'Bluebeard 6' 는 비행 중 로터 블레이드에 문제가 생겨 사막에 비상착륙을 했고, 'Bluebeard 5' 는 이란의 악명높은 모래폭풍에 휩싸여 전자장비에 문제가 생기자 출발지인 USS 니미츠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작전이 취소된 것은 데저트 원에 착륙한 6대의 헬리콥터 중 하나인 'Bluebeard 2' 가 연료탱크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작전 진행 불가 판정이 나왔을 때였다. 헬리콥터가 작전 가능 최소 대수를 기어코 넘어버린 것을 본 분노한 지상군 지휘관 찰리 베크위스는 작전의 중단을 권유했고 이는 작전 지휘관 짐 보우트 소장을 통해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마침내 워싱턴에서 작전 중지 명령이 떨어지자, 데저트 원의 구출부대와 항공기 승무원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참사가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모래폭풍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Bluebeard 3'가 항공기 연료와 델타포스 대원들이 가득한 EC-130에 충돌해 거대한 폭발과 화재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폭발로 8명의 미군의 목숨은 작전을 24시간 연기한 뒤 다시 시도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함께 사라졌다.
이글 클로 작전 대원들이 마시라 섬으로 복귀했을때 이미 전 세계의 뉴스는 데저트 원에서 찍힌 새카맣게 탄 시체들과 불타버린 항공기 기체들의 사진들로 떠들썩하고 있었다. 미국은 잊을 수 없는 모욕을 얻었다.
"FIeld Operations Group"
이글 클로 작전이 대참사로 끝났지만 인질 구출 시도는 끝나지 않았다. 구출 시도는 두번째 작전 'SNOWBIRD' 의 준비로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합참에서는 6명의 전현직 군 간부들로 이루어진 '특수 작전 검토단(Special Oprations Review Group)' 을 꾸려 빠르게 이글 클로 작전의 실패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검토단을 이끈 제임스 할러웨이 3세 전직 미 해군 작전부장의 이름을 따 '할러웨이 위원회' 라고도 불린 이 검토단에서는 미국 정보 커뮤니티가 적시에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던 것을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또한 이글 클로 작전에 참여했던 대원들도 무엇보다 작전 도중 예상되는 사항에 대해 제공되는 정보가 부족했던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는데, 이 덕분에 국방부에서는 CIA의 정보수집 역량이 이란 혁명 이후 마비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에 거점을 둔 CIA 지부는 이란 인질 위기 때 대사관과 함께 점령되어버렸고, 이란에 있었던 나머지 CIA 공작관들과 정보원들은 제 살기도 바빴기 때문에 실제로 CIA는 이란 인질 위기 당시 미국 신문사들의 보도나 BBC 방송에 크게 의존했다. 이글 클로 작전에 참여한 전직 육군 정보참모의 말마따나 CIA는 작전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었고 이 점은 국방부 자체 정보기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나 정보를 CIA에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국방부는 이제 국방부 내 자체적인 정보 역량 부족에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0년 7월경, 짐 보우트 소장의 스노우버드 작전에서 델타포스 대원들을 지원할 '특수 작전 정보팀' 의 요구에 응한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합찹의장은 '정보 작전에 대해 교육받은 선별된 인원'으로 구성된 임시 조직을 만들었다. 이 임시 조직은 현장작전단(Field Operation Group, 약칭 FOG)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FOG의 지휘를 맡은 인물은 이글 클로 작전 당시 작전 지휘관 짐 보우트 육군 소장의 참모 중 하나였던 제리 킹 대령이었다.
포트 브래그의 그린베레 77 특전단 출신의 특수 작전 베테랑 제리 킹 대령은 그의 부대에 FOG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현장작전단(FOG) 은 두 번째 이란 인질 구출 작전을 계획할 때 내가 구성하도록 임무를 받은 부대의 이름이다. 내 팀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의하려고 할 때마다 새로운 임무가 하달되었었다. (FOG는) 이란 군 지휘부의 통신을 마비시키고, 몰래 작동하지 않는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거나 고장내고, 특정 무선 통신을 도청하고, 중요 건물에 대한 강하 작전을 준비하고 낙하 장소를 표시했으며, 우회 작전을 계획하고, 남은 인원들을 퇴출시키는 작전을 하달받았다. 왜 FOG(안개) 라는 부대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흐릿하고, 매번 변화하며 예측할 수 없었다."
*FOG는 약칭이 먼저 만들어지고 완전한 부대명이 나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종종 현장작전단(Field Operations Group) 이라는 이름 외에 종종 해외작전단(Foreign Operating Group)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부대 공식 문서를 따라서 현장작전단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짐 보우트 소장이 이런 급조 부대(ad hoc unit)을 만든 것은 이란 혁명 당시 CIA의 형편없는 역량 때문이었다. 그는 믿을 수 있고 어려운 임무를 맡을 수 있는 부대를 원했다. 킹 대령의 말처럼 방대한 범위의 작전을 펼치기 위한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킹 대령이 택한 부대의 핵심 대원들은 육군 특전단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FOG를 위한 특출난 기술을 가지고 있진 않더라도, 어떤 임무던지 그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해 숙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곧 해군과 공군에서 온 인원들도 FOG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FOG는 약 50명 가량의 인원을 확보했고, 특전단이 그 절반을 차지했다.
"JSOC"
새로운 조직의 요구는 보우트 소장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글 클로 작전 참여자들 모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중에는 델타 포스의 초대 지휘관, 찰리 베크위스 대령이 있었다.
사실, 베크위스 대령은 백악관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하달받는 새로운 사령부의 창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는 백악관 직속이라는 위치가 델타 포스에게만 적합할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러한 새로운 사령부가 델타를 방해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데저트 원의 참사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찰리 베크위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특수작전에 대해 "실패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훈련받은 부대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령부를 원했다. 베크위스를 지지하던 육군 참모총장 에드워드 마이어 장군은 그에게 그러한 종류의 사령부에 대한 초안을 만들어 워싱턴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할러웨이 위원회에서의 검토 결과도 베크위스와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할러웨이 위원회에서는 '참모진들과 특정 부대들을 영구적으로 할당받은 대테러 합동 태스크포스(Counterterrorist Joint Task Force, CTJTF)' 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할러웨이 위원회의 주장에 따르면 CTJTF는 "미국의 국익, 국민, 그리고 해외의 자산을 목표로 한 테러리스트 활동을 대상으로 한 작전을 계획하고, 훈련하고, 수행해야" 했다. 또한 CTJTF의 사령관은 합참 직속에 있어야 하고, CTJTF의 구성원들은 4군 모두에서 모집되어야 하며, 다양한 특수작전에서 요구되는 특수한 역량을 바탕으로 선택되어야 했다. 그리고 태스크 포스에 배치될 부대들은 소규모이며 특수 작전의 독특한 역량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국방장관 직속의 합동특수작전사령부, JSOC이 창설되었다.
JSOC의 핵심 부대는 당연히 육군 최정예 특수작전부대인 베크위스의 델타 포스였다. 델타 포스는 JSOC의 창설보다 앞선 1977년에 창설되었는데, 1960년대 초반 베크위스 대령이 영국 SAS에서 교환장교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 테러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네이비 씰 2팀 지휘관을 맡았고 이글 클로 작전에서는 태스크 포스의 해군 대표중 한명이었던 리처드 마친코의 주도로 델타 포스와 동등한 역량의 해군 특수작전부대, 씰 6팀의 창설이 진행되었다. 델타 포스와 씰 6팀은 JSOC의 대테러 특수작전부대가 될 것이었다.
미 공군에서 합류한 JSOC 유닛은 플로리다의 허버트 필드에 위치한 1st Special Operations Wing, 제1 특수작전비행단과 이글클로 작전에서 BRAND X 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공군의 공정통제사들로 구성된 Det 1 MACOS가 있었다. Det 1 MACOS는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꾼 뒤 현재의 제 24특수전술대대, 24th STS가 될 것이었다.
이글 클로 작전에서 실패에 큰 영향을 미쳤던 헬리콥터 문제는 특수작전 전용 항공부대의 필요성으로 이어졌고, 미 육군 101공수사단의 제 158, 159 항공대대의 헬리콥터와 조종사들을 기반으로 태스크 포스 158이라는 새로운 비밀 조직이 창설되어 포트 캠벨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최신 기종인 UH-60A 블랙 호크와 159 항공대대에서 가져온 CH-47C 치누크를 가지게 된 태스크 포스 158은 포트 캠벨에 자리잡은 뒤 태스크 포스 160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태스크 포스 160은 160th SOAR, 제160 특수작전 항공연대라는 현대에 더 익숙한 이름으로 JSOC의 특수작전 회전익 항공 역량을 맡을 것이었다.
"작전 취소"
FOG는 창설 이후 이글 클로 작전에서 CIA가 제공하지 못한 정보를 두번째 작전에서 대신 제공하기 위해 이란에 침투해 중요 시설인 레이더나 통신시설에 방해공작을 벌였고, 적어도 1980년 가을까지 수차례 이란에 침투해 성공적인 감시 작전을 수행하고 휴민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중에는 NSA의 도움으로 이란의 통신 신호들을 도청하는 작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번째 구조작전인 작전명 스노우버드가 실행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이란 정부가 1981년 1월 20일 인질 전원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FOG는 스노우버드 작전을 보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조직이기 때문에 작전이 취소되자 해체될 운명이었으나, 스노우버드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CIA가 제공하는 정보가 부족하자 국방부 내부에서는 영구적인 첩보원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합참의 작전본부장이 국방정보국 국장에게 보낸 제안서에서 잘 나타난다.
1980년 12월, 합동참모본부의 필립 가스트 장군이 DIA(국방정보국) 국장에게 보낸 제안서에서 국방부의 '심각하고 지속적인 정보 부족', '믿을 만한 관찰자' 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한 국방부의 휴민트 능력이 이러한 종류[검열됨]의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국방부 내에서 이러한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의 개발을 고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스트 장군의 의견은 곧 레이건 행정부의 새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와 국방부 정책차관보 리처드 스틸웰에게 공유되었다.
FOG를 영구적인 조직으로 유지하려는 국방부의 노력으로 1981년 3월 3일, FOG는 새로운 이름인 '미 육군 정보 지원 활동대(US Army Intelligence Support Activity, USAISA)' 으로 재탄생했다.
"Intelligence Support Activity"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나를 보내소서(Send Me)"
-이사야서 6장 8절, ISA의 공식 모토
1981년 3월, ISA는 에드 마이어 장군으로부터 7백만 달러의 예산을 할당받았고 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가 위치한 버지니아의 알링턴 홀 맞은편에 본부를 차렸다. 마이어 장군은 킹 대령에게 ISA를 기존의 정보 커뮤니티로부터 독립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라고 했다. ISA의 임무는 'actionable intelligence', 즉 특정 상황에서 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즉시 사용 가능한 정보를 수집하고, OPB(Operational Preparation of the Battlespace, 전장 작전 준비)를 위해 목표 지역에 먼저 침투해 후속 부대들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ISA는 빠르게 성장하여 기존의 50명에서 300명까지 인원이 늘어났다. 킹 대령은 ISA의 존재와 부대의 임무를 높은 기밀 수준에 두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전술 개념 활동대(Tactical Concepts Activity)' 라는 애매모호한 위장명을 내걸었다. 부대의 예산 등의 ISA와 관련된 사항이 일급 비밀로 설정되지 않은 공식 문서에 올라갈땐 '특별 접근 프로그램(Special Access Program, SAP) 의 보호를 받아 ISA라는 이름의 부대는 주로 두글자로 생성된 SAP 코드네임으로 대신 불리게 되었다. SAP의 특성상 SAP에 의해 보호받는 정보는 개인이 가지는 보안 등급에 상관없이 허가를 받은 인물만이 접근이 가능해 높은 보안을 유지할 수 있다.
ISA는 창설 이후 수 년 단위로 SAP 코드네임을 변경하여 부대의 익명성을 높이는데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실제로 ISA가 1980년대에만 사용한 SAP 코드네임으로 OPTIMIZE TALENT, POWDER KEG, GRANITE ROCK, ROYAL CAPE, GRANTOR SHADOW 가 있으며 이들은 약 2년 주기로 새로운 코드네임으로 대체되었다. 육군의 또다른 기밀 부대인 델타 포스가 부대의 공식적인 상징이나 명칭이 존재하지 않고 CAG(Combat Application Group)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생각하면 쉽다. (다만 델타는 SAP 코드네임을 사용하지 않았다.)
ISA가 높은 익명성 속에서 활동하며 주기적으로 코드네임을 바꾸기 때문에 ISA는 보통 '활동대(the Activity)' 라는 간단한 이름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ISA와 활동대라는 이름을 혼용했다.
ISA 대원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아주 가끔 정복이나 군복을 입었지만 창설과 함께 얻은 새로운 상징과 모토가 있었다. ISA의 모토는 "Veritas Omnia Vincula Vincit" 으로, 라틴어로 '진실은 모든 결속을 이겨낸다' 를 의미한다. 위 사진은 ISA의 상징으로, 독수리가 클레이모어(중세시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에서 사용되던 검) 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부대의 상징이 스코틀랜드 문화에서 상당 부분을 차용한 이유는 제리 킹 대령을 비롯한 부대 창설의 주요 멤버들 중 스코틀랜드 혈통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이모어에 새겨진 'SEND ME' 라는 글귀는 성경의 이사야서에서 따온 것으로, 이사야서의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나를 보내소서" 의 '나를 보내소서' 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SEND ME 라는 글귀는 라틴어 모토와 함께 활동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원래 활동대의 부대 마크는 이와 조금 달랐다. 창설 초기의 활동대의 마크엔 독수리를 둘러싼 가죽벨트가 체인에 감싸져 있었고 체인의 연결부위가 9번째 마디마다 부서져 있었는데, 부서진 마디는 이글 클로 작전의 실패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고, 나머지 온전한 8개의 연결마디는 이글 클로 작전에서 사망한 8명을 상징했다. 이러한 부대 마크가 바뀌게 된 이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적절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활동대는 의도적으로 JSOC의 휘하에 놓이지 않았다. 델타와 씰 6팀이 맡을 임무보다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임무를 맡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ISA는 특이하게 창설 이후 몇 년간 어떠한 사령부에도 속하지 않은 채 육군 정보참모차장(약칭 ASCI) 직속에 놓였다. 따라서 ISA의 공식적인 임무는 '육군 정보참모차장이 지시하는 정보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SOD"
1981년 3월, ISA가 창설되기 하루 전, 미 육군은 CIA와의 합작으로 기밀 항공 부대를 창설했다. '제1 회전익 테스트 활동대(First Rotary WIng Test Activity)' 라는 이름을 가진 이 부대는 공식 명칭보다 'SEASPRAY' 라는 코드네임으로 더 유명해졌다. 버지니아 포트 유스티스에 위치하게 된 SEASPRAY는 세스나나 비치크래프트, 휴이 MD500같은 민간 항공기 및 군용 항공기를 갖추고 있었다. 얼핏 보면 SEASPRAY는 비슷한 시기 창설된 JSOC의 항공유닛인 TF158(얼마 안가 TF160으로 이름을 바꿈) 과 맡은 역할이 겹쳐 보인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점이 있었다. TF158의 활동범위가 군사에 한정되었던 반면 SEASPRAY는 CIA와 군 정보요원들을 은밀히 침투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SEASPRAY는 활동대의 창설 당시 부대의 항공 요소로 계획되었으나 제임스 롱호퍼라는 한 육군 중령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스노우버드 작전의 지휘관 보우트 소장은 활동대로부터 항공 요소를 분리시켜 롱호퍼 중령이 이끌던 SOD라는 부대의 통제 하에 두게 되었다.
"육군 특수작전부(Army Special Operations Divison, SOD)" 는 마이어 장군의 주도로 ISA와의 협력관계에 둘 일종의 '특수작전 지원부대' 이었다. 굉장히 거창한 이름과 달리 SOD는 육군의 작은 기밀 부서로 특수 작전에 반하는 모든 요소들을 말 그대로 '치워버리는' 역할을 맡았다. SOD의 작업방식은 때때로 거침없었는데, 군 상부에서 특수작전과 특수작전부대들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을 가졌던 당시엔 '특수 작전에 반하는 요소' 들은 대부분 군의 보수적인 관료주의였기 때문에 SOD 팀은 마이어 장군으로부터 하달받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이러한 관료주의를 깡그리 무시했다. 만약 누군가가 이들을 막아서서 이들에게 '이 작업의 정당성은 어떻게 책임질 건데?' 라고 묻는다면 SOD 대원들은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좆이나 까. 이 종이엔 참모총장의 싸인이 써져 있어, 넌 몰라도 되는 일이지. 넌 이 종이에 적힌 대로 해주면 되는거야."
SOD의 이러한 과감한 행동들이 가능했던 것은 전부 SOD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마이어 장군 덕분이었다. 펜타곤의 7번째 복도 끝의 육군 작전 센터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롱호퍼의 SOD는 내부자들끼리는 '동물원', 이들의 악명을 알던 외부자들은 '지하실의 미친놈들' 로 불렸다. 몰아붙이는 성격의 롱호퍼 중령은 베트남전에서 은성훈장과 3개의 수훈 비행 십자장을 포함해 많은 상을 수여받은 성공한 헬리콥터 파일럿이었다. 이후에 TF160의 설립에도 일조한 그는 스노우버드 작전 계획 당시 보우트 소장 밑에서 항공 역량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롱호퍼 중령의 SOD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제리 킹 대령의 ISA와 잦은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었다.
SOD가 SEASPRAY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CIA와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행정명령 12036으로 인해 오직 CIA만이 비밀 공작을 위해 위장 회사를 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어 장군이 CIA의 빌 케이시 국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에 이 부분은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육군이 자금을 대면 CIA가 실질적으로 항공기들을 구매해서 'Aviation Tech Services' 라는 민간 소유의 유령회사를 통해 SEASPRAY로 세스나와 비치크래프트 민항기들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얻은 항공기들 중엔 특수 개조된 휴이 500MD도 포함되었다.
"OPTIMIZE TALENT"
ISA가 창설 직후 부여받은 첫 번째 SAP 코드네임은 OPTIMIZE TALENT였다. OPTIMIZE TALENT 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ISA가 수행한 첫 번째 작전은 일종의 '패스파인더 작전'이었다. 활동대는 제일 먼저 세계 각지의 미 대사관으로 소규모 팀들을 파견했다. 이 팀들이 보내진 대부분의 미 대사관들은 제일 공격에 취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라틴아메리카와 중동에 위치해 있었다. 활동대 팀은 대사관 주변을 모든 각도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이를 토대로 지도를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대사관을 비롯한 주변 건물, 가능한 출입 경로나 출입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구조물들을 체크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이란 인질 위기처럼 해외 주재 미대사관이 습격을 받는 상황을 가정한 대비였다.
활동대는 주로 특수작전부대의 개입을 상정해 냉장고 회사(파나마의 경우)나 정육업계 회사 등으로 위장한 거점을 차려 특수작전부대나 정보기관 직원들이 해외로 입국할때 용이하게 했다. 대표적인 ISA의 패스파인딩 작전은 니카라과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워싱턴의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빌미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가 이란의 사태처럼 미 외교관들을 인질로 삼을 수 있다는 위협 때문이었다. 주로 논오피셜 커버(NOC)* , 니카라과의 경우엔 제3국 국민으로 위장하거나 비즈니스 커버** 를 이용해 입국한 이들은 비밀 안전가옥이나 유사시의 항공기나 특수작전부대들의 착륙 지점 등을 마련해 놓았다.
*논오피셜 커버(Non-Official Cover), 줄여서 NOC, 흔히 '블랙' 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위장으로 주로 민간인 신분으로 활동하는 공작관들이 사용하는 위장
**비즈니스 커버란, 주로 사업가 등으로 위장하는 경우를 지칭하며 ISA가 니카라과에 차린 유령회사 등이 이쪽에 속한다
ISA는 중동에서도 작전을 시작했다. 프로젝트 오토라는 코드네임의 작전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의 강력한 리더인 바시르 제마엘을 워싱턴으로 데려와 CIA와 밀담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1975년, 프로젝트 오토의 실행으로부터 6년 전, 레바논에서 무슬림들과 기독교도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1981년이 되자, 제마엘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다른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시리아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팔랑헤 민병대는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아 시리아군과 싸우고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는 이스라엘에 로켓 공격을 하는 모양이 나오자 레바논 내전이 중동 전체의 분쟁으로 번질 위험이 증가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미국은 CIA를 필두로 개입해 내전의 모든 당사자들과 비밀 회담을 가지기로 했다.
1981년 8월, 제마엘은 예고없이 워싱턴을 찾아와 백악관, 국무부, 펜타곤을 방문했다. 이는 CIA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밀담이 성사되던 중 시리아가 제마엘의 암살을 계획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워싱턴까지 데려와 회담을 통해 제마엘에게 자금과 무기 등을 지원해 임시 휴전에 동의하게 만든 마당에 랭글리의 그 누구도 제마엘이 죽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미국의 계획은 일단 제마엘을 이집트의 카이로로 옮기는 것이었다. 보통 군 장성들을 태우는 데 사용되던 미 육군의 걸프스트림 비즈니스젯을 통해 카이로에 온 제마엘의 귀환은 SEASPRAY가 이어 받았다. SEASPRAY는 제마엘과 그의 수행원들을 2개의 중무장한 휴이 500MD에 태워 북부 베이루트의 팔랑헤 근거지인 주니에로 데려갔다.
이집트와 이스라엘과 협력을 한 이 작전에는 ISA의 신호정보 전문 대원들이 참여했다. SEASPRAY의 통신 역량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에 ISA의 SIGINT 팀이 대신 헬리콥터에 대한 공격 시도를 막기 위해 무선 신호를 찾아다녔다. 펜타곤 지하실의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어야 했을 롱호퍼 중령은 카이로 현지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롱호퍼 중령은 SOD에서 연락관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한명, 이집트 공군기지 알 아리시에 한명을 파견했다. 이는 이스라엘 공군에서 만일의 수색 및 구조 지원,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경 근처에 위치한 알 아라시 공군기지에서 SEASPRAY 팀의 재급유를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는 카이로 주재 미대사관의 옥상에서 작전을 지켜보며 그의 옆에서 위성통신장비를 휴대하고 있던 ISA의 연락장교로부터 실시간 정보를 중계받았다.
롱호퍼와 함께 있던 ISA 대원은 작전의 모든 무전기록을 녹음하고 있었다. 이는 통상적인 절차 중 하나로 사후검토 단계에서 작전 도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롱호퍼 중령의 생각은 달랐다. 제마엘을 태운 헬리콥터가 주니에에 내리자 ISA의 통신 기록이 중단되었는데 롱호퍼 중령은 무전 녹음은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을때 롱호퍼 중령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고 이 일의 뒤에서 제리 킹 대령이 그를 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ISA 대원이 이건 별다를 것 없는 절차라고 하는 말을 무시하고 기록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친구, 이건 CIA의 작전이야. 네가 기록 장치를 꺼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그 장치를 옥상에서 던져버릴 거야."
이렇게 롱호퍼와 '지하실의 미친놈들'은 제리 킹 대령과 그의 부대 ISA와의 강박적인 라이벌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Great Falcon"
ISA의 중동에서의 주목할만한 두번째 작전은 Great Falcon 작전이다. 그레이트 팰컨 작전은 특이하게도 대테러 작전보다는 소련과 관련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당시 가장 진보한 소련제 전차인 T-72를 이라크로부터 구매하는 것이었다.
1981년, 중동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참일 때, 활동대는 소련제 T-72 전차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서독에 육군을 주둔중인 미국의 입장에서 소련의 침공이 시작된다면 제일 큰 위협은 T-72 전차였다. 제리 킹 대령과 활동대의 선임 정보 장교 톰 오코넬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설득해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은 T-72 전차를 구매하는 그레이트 팔콘 작전을 계획했다. 소련은 전쟁 중인 이라크에 대한 지원이 소극적이었으며 무기 제공도 이란을 침공한 뒤로부터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이란과의 전쟁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사담 후세인의 분노를 샀고 소련과 이라크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었다. 활동대가 개입한 것도 이때였다.
ISA는 이라크와 연락이 닿는 정보원 하나를 획득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이라크의 정보원은 다름아닌 사담 후세인의 장남인 우다이 후세인이었다. 그를 통해, 미국은 이라크가 장사정포를 굉장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유럽과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여러 차례의 비밀 협상에서 제리 킹 대령의 협상팀은 이라크측 대표단을 만났다. 이라크가 장사정포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ISA는 미국의 M107 175mm 자주포를 제안했다.
이당시 미군은 M107 자주포를 일선에서 퇴역시킨 뒤 파괴하거나 재활용할 예정이었다. 전직 ISA 대원에 따르면 수십억 달러 가량의 M107과 관련 장비를 대가로 이라크 측에서 T-72 전차를 제공할 것이었다고 했다. 이라크측 대표단은 굉장히 만족해 거래가 미 합참과 국방장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이후에 ISA측 협상팀에게 T-72 전차와 더불어 Mi-24D 하인드 공격 헬리콥터와 MiG-25 전투기까지 제안했다.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사용되고 있던 MiG-25는 입수만 한다면 바로 분해해서 얻은 정보를 CIA나 MI6를 통해 서방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의 전쟁을 이어나가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게도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ISA 협상팀이 교환을 막 하려던 참에 이라크 측에서 손을 떼버렸다. 소련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걱정에 사담이 이라크 대표단에게 최종 승인을 내리지 않은 것이었다.
작전에 대해 알고 있는 전 ISA 대원에 따르면 이라크 측에서 막판에 망설이는 제스처를 보였을 때, 제리 킹 대령이 CIA 대표단과 함께 펜타곤의 국방정보차관을 찾아가 작전 폐기를 권유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전까지 이라크 정권 내부와의 접촉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CIA는 우다이 후세인과의 연락만은 살려두자고 강하게 주장한 덕에 미국은 여전히 사담 정권과의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다.
"Winter Harvest"
1981년 12월, JSOC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부 장관의 명령으로 이탈리아에 6인으로 구성된 연락 팀을 보냈다. 델타 포스의 부지휘관 제시 존슨 중령이 이끄는 이 팀은 델타 포스와 활동대 대원들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최근에 일어난 현역 미 육군 준장 납치사건 대해 이탈리아 경찰에게 '기술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보내졌다. 이탈리아 당국에 필요한 지원 수단을 면밀히 살펴본 연락 팀은 JSOC 본부로 ISA의 전자감시 팀이 적합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앞선 1981년 12월 17일, 제임스 L. 도지어 NATO 남유럽 지상군 참모차장이 베로나의 자택에서 납치당했다. 그를 납치한 이탈리아의 극좌 테러단체 '붉은 여단(Red Brigade)'은 그날밤 첫번째 성명서에서 자신들이 장군을 납치해 도지어를 '인민 감옥' 에 가두었고 '프롤레타리아 정의' 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틀 뒤에 공개한 두번째 성명서에서는 이 '양키 돼지' 가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학살의 영웅이며, 그 공로로 수많은 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그의 오랜 생애 동안 제국주의자들이 민족 해방 투쟁을 억압하고 목조르며 점령과 도발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의 상급자들의 미명 속에 숨어 이를 계획했다.' 라고 선언했다.
붉은 여단의 성명서에서는 어떠한 요구 사항이나 인질 석방에 대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2부에서 이어짐
오늘도 존나 제밌게 읽은 레후
SEASPRAY가 나중에 활동부 밑으로 됐다가 델타 E스쿼드론으로 바뀌었던가
그 외에도 아직도 JSOC에 별도로 AVTEG이라는 항공기운용조직도 있긴 있더라 이쪽은 Mi헬기류들 운용한다고 들었음
맞음 SOD- ISA-델타 E 스쿼드론 순임
내가 SMU글 쓸때 잠깐 언급한 기밀 회전익 테스트 비행대가 AVTEG임. 테스트 하는 성격이 강해서 Mi17 비롯해서 별의별 항공기를 굴리는걸로 아는데 스텔스 블랙호크도 개발과정에서 이양반들이 참여했다는 카더라도 있음
오
여담이지만 포어드 옵저베이션 그룹이 약자를 저기서 가져온건가 싶내ㅋㅋ
원문 어딘지 알수있음? - dc App
워낙 여러 책이나 뉴스기사에서 가져온 거라 하나로 딱 집어말하기 힘든데 killer elite라는 책을 가장 많이 참고했음
땡큐! - dc App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