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북동쪽, 베이스 에이리어 609의 바위 언덕에서 공중 지원을 요청하는 CCC, RT 몬태나의 폴 보이드 병장)
미국의 월남 개입 초기부터 월맹군은 중립국인 캄보디아를 이용하여 월남을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1965년 중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가 프놈펜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폐쇄한 지 몇 달 만에 다량의 월맹군 병력이 라타나키리 성 북동부에 주둔하여, 전쟁의 첫 주요 전투에서 미 육군 제1 항공 기병 사단과 교전한 거의 모든 적군이 캄보디아의 비밀 성역에서 왔다.
2년 동안 월맹군의 규모가 커졌고 월경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하노이는 미국의 공격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캄보디아 영토에 비밀리에 수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프놈펜의 공개 시장에서 쌀과 보급품을 구매하고 있었다.
시아누크 왕자는 이러한 중립 위반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그의 다섯 번째 아내인 모니크와 그녀의 어머니, 그녀의 이복형은 월맹군에게 비밀리에 토지권과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고 있었다.
시아누크의 환심을 얻기 위해 존슨 행정부는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는 적군에 의해 수천 명의 미군이 살해되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보았다.
미국 외교관들은 1967년 중반까지 캄보디아에 대한 SOG 임무를 반복적으로 기각했으나, 국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하는 군의 요구에 의해 그들의 진부한 반대는 무너졌다.
(캄보디아 시아누크 왕자의 호화 여름 별장은 월남 플레이쿠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호수에 자리잡고 있었다. 가끔 SOG의 감시를 받기도 했던 이 버려진 궁전은 시아누크가 하노이를 지지한다고 발표한 후 1970년에 코브라 건쉽에 의해 (허가 없이) 공격을 받았다)
교전 수칙
캄보디아로의 SOG 임무를 위해 작성된 규칙은 이웃국인 라오스의 규칙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워싱턴 정책입안자들은 그린베레가 미군 제복이나 무기 없이 캄보디아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는 것 외에도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미국 전투기가 지원 허용을 불허하기로 결정했다.
정찰팀 전원의 생명을 앗아가더라도 전술 항공 지원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었으며 건쉽 헬기만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실수로 캄보디아 군을 죽일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정찰팀은 자위권의 행사를 제외하곤 월맹군과 교전하거나 매복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다니엘 분 지대
코드명 "다니엘 분(Daniel Boone)"인 캄보디아 작전 지대는 월남 국경을 따라 20km 너머까지 떨어진 지역이었다.
월남 메콩 삼각주에 인접한 최남단에서는 삼판이 수로를 따라 떠다니는 것 외에는 월맹군의 활동이 많지 않았기에 SOG 임무가 거의 없었다.
바로 북쪽에는 월남 방향으로 크게 돌출된 "패럿츠 비크(Parrot’s Beak)"가 있지만 이곳은 인구가 밀집된 농경지였으며 월맹군은 가끔만 이용했다.
그러나 패럿츠 비크 북쪽에는 다시 캄보디아 방향으로 튀어나온 "피쉬후크(Fishhook)"가 있었고, SOG는 이곳에 2~3개의 적군 사단, 즉 30,000명 이상의 병력이 주둔해 있어 캄보디아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점거한 지역이 되었음을 알게 됐다.
또한 월남 국경에서 불과 1마일 떨어진 피쉬후크에는 전체 공산 세력 활동을 운영하는 베트콩 본부인 COSVN이 숨겨져 있었다. (사실 실질적으론 하노이가 병력을 지휘했기 때문에 잘못된 표현이다)
또한 최소 2개의 월맹군 연대가 기지 지대(Base Area, BA) 609로 지정된 캄보디아의 최북단 삼중 국경 지대를 배회했다.
B-3 전선에서 월맹군이 운용하는 BA 609의 병력은 월남 중부 고원지대에 대한 주요 위협이었다.
프로젝트 오메가와 시그마
제5 특전단은 캄보디아 월경 임무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예상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프로젝트 오메가와 시그마를 조직했다.
병력을 준비하면 합동참모부가 다니엘 분 임무를 맡길 것이라고 가정했으나, 대신 합참은 완전히 훈련된 오메가와 시그마 대원들을 데려가 SOG로 배속시켰고 제5 특전단 고위 장교들은 깜짝 놀랐다.
이러한 고위 특수부대원과 SOG 장교 사이의 약간의 경쟁은 실제 작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곧 SOG는 부돕 및 두코 특수부대 캠프와 사이공 북서쪽에 있는 제1 항공 기병사단의 주요 기지인 꽌로이에 발진 기지를 세웠다.
SOG의 캄보디아 정찰 임무는 1967년 6월에 시작됐으며 같은 달에 벤 스노든 상사가 첫 사망자가 되는 일이 있었다.
스노든의 프로젝트 오메가 정찰 전우들은 콘툼에 있는 행정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벤 스노든 상사의 이름을 딴 콘툼의 프로젝트 오메가 행정반. 벤 스노든은 캄보디아 비밀 임무 수행 중 사망한 최초의 SOG 대원이다)
몇 달 만에 SOG 정찰팀은 주요 보급품 비축지와 월맹군의 확인과 함께 적군이 캄보디아에 가장 집중된 곳을 식별했다.
1968년, SOG는 프로젝트 오메가와 시그마를 완전히 흡수했으며 대대적인 개편을 통해 남은 전쟁 기간 동안 존재할 구조를 만들었다.
프로젝트 시그마 인력은 새로운 부대인 CCS로서 캄보디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부온마투옷의 SOG 기지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CCS 정찰팀은 RT 쏘우(Saw) 및 RT 해머(Hammer)와 같은 도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CCS의 지원은 전쟁 중 전투에 참여하는 유일한 미 공군 휴이 비행대인, 제20 특수작전 비행대 또는 "그린 호넷"이 맡았다.
(캄보디아 상공에서 미니건 사격을 가하는 20th SOS 그린 호넷 건쉽)
한편, 프로젝트 오메가 대원들은 콘툼에 기반을 둔 다른 SOG 부대와 결합하여 캄보디아 북부와 라오스 남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CCC를 창설했다.(역자 주: 슈라이버와 같이 CCS로 간 오메가 대원도 많다)
CCC 팀은 RT 캘리포니아 및 RT 콜로라도와 같이 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다낭에 기지를 둔 CCN은 중앙 라오스를 담당했으며 SOG의 월경 정찰 및 해칫포스 조직을 완성했다.
CCN 팀은 일반적으로 RT 모카신 또는 RT 맘바와 같이 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일부는 미국 주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시아누크빌 항구
하노이는 호치민 트레일로 공습과 SOG 매복을 뚫고 캄보디아 중부로 보급품과 군수품을 공급하는 대신, 캄보디아 항구인 시아누크빌을 통해 물자를 은밀하게 운송하기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위조된 적하목록을 첨부한 동유럽 화물선에 의해 운반된 이 화물은 시아누크빌에서 하역되어 수도 프놈펜의 비밀 창고로 호송되었다.
그곳에서 월맹군 정보 장교들은 보급품을 다른 트럭으로 옮겨 월남 국경을 따라 존재하는 일련의 베이스 캠프, 특히 피쉬후크로 운송했다.
소규모 작업이 아니었다.
로켓, 소화기 탄약, 박격포탄으로 구성된 이 비밀 화물은 3개 사단과 월남 국경 너머의 공산군(약 200,000명)을 지원했다.
그리고 캄보디아 정부의 묵인 덕분에 이러한 운송은 SOG 정찰팀뿐만 아니라 1965년 6월 시아누크 왕자가 미국 대사관을 폐쇄한 이후 무력해진 CIA의 눈에서도 벗어났다.
캄보디아 비밀 폭격
1969년 초, SOG의 캄보디아 주요 임무는 B-52의 캄보디아 "비밀" 폭격을 지원하기 위한 BDA가 되었다.
SOG와 기타 정보원 덕분에 닉슨 행정부는 "중립"인 캄보디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월맹군의 최대 병력이 외딴 정글 지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캄보디아 민간인에게 큰 위험 없이 폭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남아 정치의 특성과 캄보디아와 하노이의 미약한 관계로 인해 닉슨 대통령은 시아누크 왕자가 항의하지 않는 한 B-52 공습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왕자는 실제로도 항의하지 않았다.
1969년 3월 말, 닉슨은 피쉬후크로 B-52를 출격시켰다.
캄보디아에서의 첫 번째 비밀 폭격은 73차례의 2차 폭발을 일으켰다.
닉슨은 하노이가 파리에서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추가 B-52 공격을 중단했지만 회담은 무의미하게 진행되었다.
닉슨은 두 번째 비밀 B-52 폭격을 승인했는데, 이번에는 벙커 대사의 승인과 함께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장군이 제안한 목표인 피쉬후크에 숨겨져 있는 거의 미신 같은 베트콩 본부인 COSVN에 대한 공격이었다.
(미 공군 폭격 금지 선 내, 캄보디아 스퉁트렝에 정박한 두 척의 보급선박. 아마 폭격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비 FAC의 마이크 크라이어는 7공군에게 지상을 공격하지 않고도 선박을 공격할 수 있음을 전했다. 결과는 위와 같다)
중대한 발전
1969년 4월 24일 COSVN 습격 이야기는 전설적인 CCS 정찰대원 제리 "매드독" 슈라이버의 이야기와 크게 얽혀 있어 이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함께 전해진다.
피비린내 나는 COSVN 습격 이후, 대규모 병력이 점거한 피쉬후크에 대한 임무는 사례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사이공 본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적 첩자에 의해 정보가 유출됐다는 의혹이 10배나 커졌다.
1970년 봄, 시아누크 왕자가 반하노이 연합에 의해 전복되자, 새 캄보디아 정부는 즉시 월맹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그해 5월, 새 정부를 지원하고 국경 지대를 청소하기 위해 미군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SOG가 말한 바로 그 장소의 모든 주요 적 기지를 찾아냈다.
공산 세력은 병력 11,349명, 차량 435대, 쌀 7,000톤, AK 소총 23,000정, 기관총 및 박격포 2,500문, 로켓 및 박격포 143,000발, AK 탄약 1,500만 발 등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월맹군은 캄보디아 깊숙한 곳까지 진격해 국토의 거의 절반을 점령하고 메콩강의 스퉁트렝을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1970년 6월 30일, 미국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면서 미군 주도의 SOG 작전은 중단되었다.
전투 중 사망한 마지막 CCS 해칫 포스 대원은 미군 철수 3주 전에 소대장이었던 바이럴 레이클리터 중위였다.
마지막으로 사망한 정찰대원은 RT 픽의 1-0인 에버렛 코퍼 하사였다.
마지막 실종자는 1-1 정찰대원 글렌 텁스 병장이었다.
1970년 늦여름, CCS의 정찰팀은 CCC와 CCN으로 이동하여 다른 정찰팀에 합류하여 SOG의 비밀 전쟁에서 계속 싸웠다.
(1970년 1월 13일에 실종된 캄보디아의 마지막 CCS 정찰대원인 글렌 텁스(중앙))
(1970년 4월 3일 사망한 에버렛 코퍼 하사의 추도식)
부록 1: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4544
(부록) 그린베레 살인사건원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3213 SOG, 캄보디아 속으로 - 워리어플랫폼 마이너 갤gall.dcinside.com부록 2: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4593
(부록) SOG 캄보디아 전설 3인본문: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riorplatform&no=23213 SOG, 캄보디아 속으로 - 워리어플랫폼 마이너 갤gall.dcinside.com
베트콩들 태국까지 넘어와서 태국군이랑도 교전하고 태국내 미공군기지도 공격함
그래서 제46 특전중대 있었잖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