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CIA 지부장 윌리엄 콜비가 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군은 이미 철수한지 5년째였다. 이는 제네바 협약이 인도차이나를 공산주의인 북부와 비공산주의인 남부로 분할했을 때와 같은 해였다.
공식적으로 분쟁은 끝났지만 콜비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1959년, 프랑스-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북쪽으로 이주한 옛 공산주의 베트민들이 월남의 가장 외진 지방에 다시 나타나 공식적으로는 하노이와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주장하는 게릴라 부대인 베트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신임 CIA 지부장은 비밀 전쟁 방식에 있어서 순진하지도 경험이 없지도 않았다.
(베트콩 전통 검은 파자마를 입은 CIA 사이공 지부장 윌리엄 콜비)
16년 전, OSS의 윌리엄 콜비 중위는 독일군에 대항하는 프랑스 저항군을 이끌기 위해 낙하산을 통해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로 침투했었다.
1년 후에는 나치의 철도를 철거하기 위해 노르웨이로 공수되기도 했다.
콜비는 하노이의 속임수를 간파할 수 있었다.
월맹의 침입에 대한 보고에 불안을 느낀 케네디 신임 행정부는 월남 프로그램을 늘리기 위한 CIA 제안을 즉시 승인했다.
국가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는 침입을 파악하고 월맹의 CIA 요원 네트워크를 위한 CIA의 노력을 확대하는 국가 안보 조치 각서 52(NSAM-52)에 서명했다.
또한 NSAM-52는 콜비가 미 육군 특수부대와 네이비씰을 고용하여 CIA의 비밀 임무를 위해 요원들의 훈련과 고문을 맡을 수 있도록 하였다.
CIA의 정크 함대
콜비는 교묘하게 위장한 정크선을 사용하여 월맹 해안에 요원과 보급품을 전달하는 전임자 시절에 시행된 소규모 침투 프로그램을 물려받았다.
케네디 취임 몇 주 후인 1961년 2월, CIA 정크선 한 대가 콜비의 첫 번째 요원인 아레스 요원을 중국에서 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월맹 캄 파 근처에 상륙시켰다.
(초기 콜비의 요원들은 어선으로 위장한 CIA 정크선을 타고 월맹에 침투했다)
향후 8년 동안 아레스 요원은 월맹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한 미국 요원이 됐다.
그러나 콜비는 요원 이상의 것을 찾고 있었다.
한편 다낭에서는 콜비의 보조인 터커 구겔만과 씰이 월맹 해안을 습격하기 위해 월남 해상 특공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구겔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었다.
1942년, 과달카날에서 미 해병대 레이더스로 복무한 구겔만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한국에서 싸웠으나 의병전역으로 해병을 떠나 CIA의 최고 준군사 공작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씰의 배리 에녹은 "그는 임명되지 않았으나 리더십 자질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어깨나 팔에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위로 볼 때 그는 어떤 그룹에서든 리더가 될 것이었다. 그를 해병대 중에서도 가장 하드코어한 해병이라고 생각했고 우리는 그를 좋아했다. 정말 사랑하는 수준이었다"
1962년을 시작으로 하여 구겔만의 씰 훈련을 받은 해양 코만도는 월맹 해안에서 방해 공작을 감행했다.
해변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빠른 공격을 위해 씰의 병기사이던 에녹은 각각 3.5인치 로켓이 있는 4개의 카드보드 튜브를 전기 지연 메커니즘과 함께 팩보드에 달았다.
(일부 CIA 강습 팀은 시간 지연을 통해 발사되는 3.5인치 로켓을 이용하여 목표물을 공격했다)
에녹의 장비를 사용하면 월남 특공대가 해변으로 들어가 팩보드를 목표물 쪽으로 조준하면 로켓이 발사될 때는 이미 철수할 수 있었다.
84피트 길이의 월맹 산터우급 순찰선이 CIA 정크선을 확보하자 병기사인 에녹은 나머지 선박을 개조하여 스스로를 더 잘 방어할 수 있도록 했으나 눈에 띄는 무기는 내놓지 않았다.
(월맹의 산터우급 순찰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녹의 개조된 CIA 정크선 중 하나가 산터우급에게 발각됐다.
산터우급이 옆으로 다가오자 선장은 손을 흔들었고 항해사는 손을 들었지만, 손을 흔드는 대신 손가락이 토글스위치로 향했다. 이 스위치의 전선은 조타실 꼭대기에 있는 6개의 캔버스로 덮인 구유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에는 3.5인치 로켓이 장착되어 있었고 모두 산터우급 크기를 맞추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승무원이 서 있는 각 돛대에는 개조된 팝업 마운트와 50구경 기관총이 들어 있는 55갤런 드럼통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현단 밑에는 마지막 두 명의 승무원이 누워서 스웨디시 K 9mm 기관단총을 들고 선장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터우급이 엔진을 끄는 순간 6개의 로켓이 날아갔고 두 명의 승무원이 스웨디시 K를 들어 탑승자에게 바람 구멍을 냈으며 두 50구경이 산터우급의 갑판을 긁었다.
사격을 끝내기도 전에 선장은 강력한 디젤 엔진의 시동을 걸었는데, 이는 에녹이 정크선 속에 숨겨둔 또 다른 기능이었다.
그리고 정크선은 사라졌다.
필연적으로 월맹군은 상황에 적응했고 산터우급은 한 쌍으로 순찰하면서 한 대는 엄호를 맡고 다른 한 대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결국 두 대의 월맹군 산터우급이 CIA 정크선을 몰아넣고 총격으로 두 쪽을 냈다.
비밀 요원과 공수 계획
이제 그의 정크선이 요원 침투에 너무 취약해지자 빌 콜비는 특수 개조된 C-46 및 C-47의 공중 투하로 전환하고 미 공군 대령 해리 "헤이니" 애더홀트 대령의 전문 지식에 도움을 요청했다.
(콜비의 월맹 공수 계획을 도운 해리 애더홀트 대령. 애더홀트 대령은 CIA의 티베트 공수를 지휘했고 이후에 SOG의 "브라이트 라이트" 포로 구출 프로그램을 창시했다)
당시 태국 타클리에 본부를 둔 애더홀트는 수백 명의 달라이 라마 게릴라와 수천 톤의 보급품을 중국이 점령한 티베트로 수송하는 CIA의 일급 비밀 티베트 공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5년간의 티베트 공수 기간 동안 애더홀트의 표시 없는 C-130은 한 대도 손실되지 않았다.
콜비는 애더홀트에게 월남인에게 침투 비행을 훈련시키고 월맹에 침투하기 위한 경로를 선택하기 위한 교관 파일럿의 제공을 요청했다.
티베트 비행을 계획한 미 공군 래리 롭카 소령은 월맹으로 들어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산악지대인 라오스의 "백도어"임을 발견하고 지형 마스킹과 전자 교란을 위해 수백 개의 산을 이용하는 경로를 마련했다.
한편 사이공에서 콜비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장거리 연료 탱크를 갖춘 C-47 특수 비행대를 이끌 월남 공군 파일럿을 모집했다.
이 비행대의 지휘관이었던 응우옌 까오키는 나중에 자국의 공군을 지휘하고 결국 월남의 수상직을 역임하게 된다.
(콜비는 미래의 월남 수상인 응우옌 까오키를 개인적으로 모집하여 월맹 상공에 요원을 공중 투하하는 위험한 임무를 부여했다)
장기 요원팀
키와 그의 파일럿들이 월맹으로 투입시킨 소규모 팀은 대부분 1954년에 남쪽으로 온 북부인, 즉 프랑스군과 함께 싸운 가톨릭 신자와 소수 부족민이었다.
그러나 월맬이 월남에 침투하는 것과는 달리 미국 정책은 콜비의 장기 요원이 저항군을 구축하거나 민간인과의 접촉을 금지했다.
팀은 목표물을 치고 탈출할 수 있는 단기 특공조도 아니었고, 무력과 지원, 생계를 끌어낼 수 있는 대중과 함께하는 게릴라도 아니었다.
요원 팀은 생존을 위해 정글에 숨어 공중 투하 보급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전상 고아였다.
(재보급을 연습하는 C-46. 화물칸 문 아래에 보급품이 매달려있다)
(어두운 밤에 공수되어, 요원 팀은 휴대하던 전자 트랜스폰더를 통해 이와 같은 재보급품을 발견했다)
재난을 구걸하는 꼴이었다.
장기 요원 팀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25마일 떨어진 비밀 CIA 훈련 센터인 롱탄 기지에서 방수포로 덮인 철조망 뒤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린베레와 CIA 공작관들은 야전기술, 무기 기술, 소부대 전술, 폭파 및 생존 등의 기술을 가르쳤다.
(롱탄 기지에 있는 일급 비밀 CIA(이후 SOG)기지. 중앙에 방수포 덮인 울타리로 둘러싸인 건물 주목)
(롱탄 기지에서 요원 훈련생들은 이러한 석유 탱크 시설 모델을 통해 습격 전술을 연구했다)
(이 탁상에는 교량 파괴가 가르쳐졌다)
(경공업 시설을 파괴한 요원들이 연구에 사용한 모델)
팀 무전병은 모스 부호, 암호 및 비밀 경보 코드 등을 배워 CIA에 그들이 체포되어 적의 통제하에 전송되고 있음을 알렸다.
(모스부호를 연습 중인 요원팀 무전병. 생포 후 무전병은 적의 협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들만이 사이공에 곤경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팀원들의 전문적인 낙하산 훈련이었다.
기존의 낙하산 부대와 달리 요원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이 많은 삼층 캐노피의 정글로 뛰어든 다음 땅으로 하강한다.
그러한 위험한 착륙에서 살아남기 위해 두껍게 덧대진 미국 산림청 스모크점퍼 슈트와 헬멧을 착용했다.
(장기 요원들은 험지 강하법을 배웠고 미국 산림청 캔버스 "스모크점퍼" 슈트와 케이지 바이저 헬멧을 착용했다)
1961년 늦봄, 수십 명의 새로운 요원이 월맹의 아레스와 합류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로 배치된 팀인 팀 아틀라스는 단 하나의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고 투입 항공기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하노이는 공개 재판에서 팀의 생존자 3명을 기소했지만 서방 언론에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노이에서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는 착륙 직후 체포된 CIA 훈련을 받은 요원 팀)
이 불길한 손실로 인해 응우옌 까오키는 개인적으로 팀 카스토르를 강하시키는 다음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무사히 끝났다. 팀 카스토르는 안전하게 착지했지만 무전이 끊겼다.
그리고 CIA 담당자는 팀 디도와 팀 에코가 적의 통제를 받는 것을 보아 이중간첩으로 활동함을 파악했다.
1961년, 월맹으로 투입된 마지막 팀인 팀 타잔은 실종되어 생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29개월 동안 CIA는 22개 팀을 월맹으로 공수했다.
(1962년 2월부터 1963년 12월 사이에 CIA는 월맹에 25개의 장기 요원 팀을 보냈는데, 첫 번째 팀인 아레스를 제외한 모든 팀은 낙하산으로 투입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하노이 보안부는 CIA 네트워크를 와해하는 놀라운 일을 해냈고 약 14개 팀이 착륙하자마자 이를 제압했다. 세 팀이 추가로 소식이 끊겼고, CIA는 이 세 팀인 디도, 에코, 에로스가 적의 통제하에 하노이에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간첩으로 있다고 결론지었다. SOG가 창설될 당시에는 아레스, 레무스, 투르비용, 벨, 이지 등 5개의 CIA 요원 팀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14개 팀을 착지하는 순간에 잃었고 109명이 포로가 되거나 사망했다.
1963년 6월과 7월의 투하는 특히 큰 피해가 발생했다. 도핀느, 베카신, 바트, 텔루스, 미다스, 니케, 자이언트, 패커 등 8개의 팀이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1963년에 추가된 마지막 세 팀(스완, 불, 루비)도 포로로 잡혔고 추가로 21명을 잃었다.
(미국 교관과 함께 있는 팀 이지, 팀 불 장기 작전팀. 불 요원팀은 월맹에 착지하자마자 포로로 잡혔고, 팀 이지 요원은 포로로 잡혀 하노이의 대응에 이중간첩으로 대응했다)
아레스 외 벨, 레무스, 이지, 투르비용 4개 팀만이 1963년 말까지 투입되어 남아 있었다.
라오스 정찰
장기 요원 팀이 월맹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트랑의 그린베레는 확장 중인 호치민 트레일을 침투하기 위해 월남 제1 관측단 코만도를 훈련하고 있었다.
(라오스 초기 정찰은 월남 제1 관측단 코만도가 주도했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프랑스 스타일의 군복과 헬멧에 달린 프랑스 공수 마크가 있다)
월남의 가장 유명한 정치 가문의 아들들이 이끄는 이 공수특공대는 죽거나 죽이는 대원이라기보다는 지엠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의장대 및 근위대임이 입증되었다.
제1 정찰단은 1961년과 1962년에 라오스 침투로에서 41차례의 정찰 작전을 수행했지만, 팀을 이끌었던 의지 없는 장교들은 접촉을 피하여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을 포기했다.
오키나와에 본부를 둔 제1특전단의 그린베레는 중부 고원의 닥토에서 산악 정찰대를 훈련했지만, 문맹인 몽타냐드 족은 라오스에 들어왔을 때 본 것을 파악하고, 기록하고, 보고하는 정교함이 부족했다.
마찬가지로, 그린베레는 여러 월남 강습 중대를 위해 강인한 몽타냐드 부족민을 훈련했지만, 몽타냐드는 겁많은 월남 장교들이 허용해주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보 공백 속에서 월맹은 침투율을 꾸준히 높이고 있었고, 동시에 무기만 가득한 선박이 월남 해안에 도착했으며 호치민 트레일이 점점 더 성장했다.
CIA의 노력은 신속히 확대되었지만 곧 비밀 프로그램에는 CIA 공작관보다 군 특수 작전 고문이 더 많아졌다.
이렇게 커진 불균형은 곧 비밀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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