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핏파이어 작전(Operation Spitfire)
버지니아 작전이 실패로 끝났으나 베이커기지에서는 재차 북한지역에 유격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스핏파이어 작전을 계획했다. 이번에는 버지니아작전의 실패를 교훈삼아 작전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했다. 먼저 선발대로 우뢰(Thun der)팀을 파견한 후, 1주일 정도 간격으로 번개팀(Lightening) 팀장 애담스 액튼 소위와 대원 11명), 폭풍팀(Storm) 20명, 북풍팀(Northwind) 20명을 투하시킬 예정이었다. 또한 버지니아작전 때의 무전기 고장을 감안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썼던 SCR 300보다 훨씬 가볍고 성능이 좋은 최신 기종인 AN/ PRC–10이 2대가 제공되었고, 헬리콥터를 이용한 구출작전도 준비되었다.
기간이 넉넉했으므로 대원들은 독도법·첩보수집·낙하훈련 등을 비롯해 양산과 기장에서 종합 훈련을 받았다. 1951년 6월 18일 오후 10시 앤더슨 대위, 가너 하사, 마일스 상병 등과 한국인 하용정과 서창옥 통역 등 선발대가 C–47 수송기를 타고 수영비행장(K9)을 떠나, 가려주리 동남쪽 분지에 투하되었다. 버지니아1 작전에 참가했던 퍼셀과 베이커는 미군 제4 특공중대로 복귀했고, 마일스 상병만 잔류하여 참가했다. 선발대의 임무는 1주 후에 있을 본대의 안전한 낙하를 유도하기 위한 낙하지점(DZ)을 준비하고, 작전 근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투하된 대원들은 근거지로 예정된 황해도 곡산군 화개산으로 이동했다. 이 산은 2차 대전시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를 이용해 벌목작업을 한 곳으로, 일본 패망 후 선페스트(bubonic plague) 전염병이 돌아 주민들의 왕래가 드문 곳이었다. 또한, 협곡과 크고 작은 분지가 발달해서 유격대가 활동하기가 좋았다.
이곳에 도착한 선발대는 정찰활동을 통해 때마침 그 지역을 통과하는 중국군 1개 사단의 이동을 추적하여, 공군으로 하여금 광현리(CT 2288)에 대한 폭격을 유도하여 그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이 성과로 위치가 노출될 우려 때문에 대원들은 이동해야 했다. 본대 가운데 헌 중위, 애담스 액튼 소위, 마일스(Fusilier Mills), 김성환, 홍순권 등 11명의 2차 투입팀은 6월 26일 02시경 화개산으로 낙하했다. 이들은 선발대와 합류했다. 그렇지만 적지에서 대낮에 헬리콥터에 의한 앤더슨 대위의 복귀, 수회의 공중보급지원에서 보여준 미 공군조종사와 항법사들의 미숙한 조치로 기지의 위치와 더불어 대원 규모까지 적에게 노출되어 기습을 자초하게 되었다. 즉, 식량 보급 지점을 찾기 위해 선회하던 수송기(C–47)는 날이 밝은 아침에야 비로소 보급품을 투하하면서, 중국군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보급품을 접수하려고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기습을 받았다.
대원들은 중공군의 추격을 피해 산 속을 헤매면서 보급된 식량도 없이 때로 교전을 하면서 귀환해야 했다. 헌 중위는 체중이 25파운드나 빠졌고, 한국인 한 대원은 그 고난을 기억하고 싶지않을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다고 한다. 총원 18명 중 절반 뿐인 9명만이 UN군 전선에 접촉하여 귀환했다. 영국군인 마일스(William T. Miles, Jr.) 상병이 이끌던 7명은 끝내 아군 점령지로 복귀하지 못하고 실종됐다.
결국, 스핏파이어 작전도 북한지역에 게릴라 기지를 설치하지 못한 채, 내륙 지역에서 약 1개월 동안 첩보수집과 아군 폭격유도 등의 활동을 하다가 기지로 귀환했다. 이 작전이 실패한 후 앤더슨 대위는 크게 위축되어 결국 부대를 떠났다고 한다.
게릴라 부대에는 숙련된 공수훈련을 받은 인원이 준비되지 못했다. 그리고 임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험을 전수해줄 베테랑 대원조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격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한 한국 게릴라들의 연속적인 축차투입은 의미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무엇이 효과가 있었는지, 실패했는지 판단하기 위한 생존자들의 피드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악몽으로 배우는 교훈이 존재하지 않았다. 최소 17개 이상의 유사한 작전이 시작됐고, 적지에서 유의미한 전과를 기록하더라도 생환하는 대원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사령부는 한국인 게릴라 대원들을 사실상 소모품으로 취급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공산군 측에 유리한 이점을 주지 않기 위해 미군, 영국군 출신들의 투입은 금지시켰다.
1952년 1월 22일부터 1953년 5월 19일까지 400명 이상의 한국인 게릴라들이 북한으로 낙하산을 타고 북한으로 침투했으나 다시는 목격되지 않았다.
https://arsof-history.org/articles/v9n1_operation_spitfire.html
Operation SPITFIRE: No Lessons LearnedOperation SPITFIRE: No Lessons Learnedarsof-history.org
ㅅㅂ.. 그 많은 국군 포로분들이 괜히 생긴게 아녔네.
저분들은 포로대접도 못 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