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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길 (황룡 관구)


1951년 4월 29일, 강원도 문천(文川)지구 공작요원으로 선발되어 문천- 양덕 지역의 거점을 확보임무를 맡고 동료 11명과 함께 미해군 군함에서 출발, 해상으로 침투.


상륙직후 초병에게 한번 들켜서 해안에서 후속부대와 접촉할 2명을 남기고 일부 대원만 내륙으로 침투.


해안에 남은 2명은 밤새 대기하다 후속부대가 오지않자 본대를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이동하나 보초르 서던 내무서원(북한 경찰)과 접촉, 생포하려 했으나 저항하는 통에 사살해버림. 총성으로 인해 토벌대가 출동하여 산으로 도망침. 산에서 나무꾼과 마주쳐서 정보를 캐기 위해 생포하려 했는데, 그 나무꾼이 '여기 괴뢰있다!' 하면서 크게 소리를 질러대길래 사살함.


총소리를 듣고 현지 민병대 2명이 소학교 학생 10여명을 앞세우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올라오고 있었음. 포위망이 좁혀오자 2명은 각개탈출을 시도, 1명은 빠져나갔으나 나머지 한명은 사살 당함. 살아남은 1명은 풀뿌리와 나뭇잎으로 연명하며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1차 집결지로 향함. 


5월 11일, 버려진 집에서 휴식하다 내무서원한테 생포되었고 밧줄에 묶여 내무서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음결국 5월 19일에 자신들이 공중으로 대규모 침투할 예정이라고 거짓으로 진술함.


원산에 있던 북한 사회안전성 장교가 직접 찾아와서 중국집에 데려가 밥을 먹여주며 '남조선 특무들이 침투할 지점을 알려주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함. 자신을 길잡이로 데려가면 기회를 봐서 탈출하려 했는데, 19일 당일 자신은 안 데려감. 결국 거짓 진술한게 탈로 나서 다시 고문과 협박을 받음.


5월 26일, 다른 정치범-포로들과 함께 평양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는데 거기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약 2개월 가량 산속을 떠돌다가 후속부대로 투입된 낙오인원 1명과 접선함. 이 2명은 약 4개월을 더 산 속에서 숨어지내다가 11월 7일, 해안가에서 어선을 탈취하여 부산 영도로 귀환함.


본대는 전멸 했을 것으로 추정.








전하정 (백호 관구)


함경남도 단천지구 공작요원으로 선발되어 동료 9명(지휘관 황태룡)과 10월 중순 단천군(端川面)으로 공중투입되어 땅굴을 파고 아지트를 세움. 


11월 초, 지역대장이 삼수군 활기봉(闊起峰)에 주둔 중인 본부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


11월 7일, 적 토벌대가 아지트를 기습하여 전원 분산탈출. 자신은 부상 당한 동료 1명을 업고 동료의 고향집인 단천군 신흥리로 피신함. 그 곳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근처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선 아버지와 접촉함. 아버지는 '토벌대가 오니까 빨리 월남해라'라고 조언함.


며칠 후, 자신의 고향집에 가서 친동생을 만남. 동생은 길주군 설령봉(雪嶺峰)에 침투한 다른 지역대 300여명이 한달만에 토벌대에게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음. 이걸 듣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탈출을 고민함.


그 후 아버지를 다시 한번 만났는데, 자신에게 자수를 권유함. 그 말을 듣고 빡쳐서 수류탄을 꺼내들고 '차라리 자폭하겠다!'라고 언성을 높이고 문을 박차고 나옴.


그 뒤로 두 번 다시는 아버지를 뵙지 못함.


12월 4일, 성진(城津)에 있는 결혼한 누나의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아내를 만남.

아내에게 월남을 종용했으나 아내는 아들을 두고 가진 못하겠다며 완강하게 거부함. 누나와 매부는 대신 친동생을 데려가라고 함.


12월 5일 낮, 자신의 5살 난 아들이 혼자 놀러 옴. 그리고 고모(전씨의 누나)에게 '울 아바이 못 봤어요?'라고 물어봄. 하필 그때 근처에 북한군이 순찰을 돌고 있어서 헛간에 숨어있었는데, 아들의 모습을 문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음.  그리고 돌아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림.


그것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지 못함.


12월 18일, 매부가 조각배 한 척을 훔쳐줘서 동생과 함께 성진 앞바다를 출발하여 부산 영도로 귀환.



본대와 남겨두고 온 부상 당한 동료는 전원 전멸했을 거라고 추정.







조광진 (오봉 관구) 


1951년 8월 23일, 설령지구 공작대원으로 선발되어 14명의 동료들과 함께 공중투입.


 개마고원에 구축한 아지트에서 그 해 겨울을 지내고 산을 내려가 춘계 작전을 전개함. 경성군(鏡城郡) 주을(朱乙)에서 북한 내무서를 습격하거나 공산당원을 생포하는등 활약을 펼침. 하지만 포섭해둔 민간인이 식량을 구하러 가겠다고 말하고선 아지트 위치를 내무서에 밀고하는 바람에 철수하게 됨. 관모봉 본부로 돌아올 때는 아직 겨우내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아서 허리춤까지 오는 눈을 파헤지며 복귀함.


이후 청진(淸津)으로 가서 현지 반공인사 포섭작전을 펼쳐 지역유지들과 접선하는데 성공함.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공산당에 입당해있던 사람들이라서 꽤 협조적으로 나왔으나, 1952년 4월부로 휴전회담이 진전되어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자 전부 변절해버림.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동네 친한 형이었던 사람과 접촉해 보기로 함. 이 사람은 북한군 대좌가 되어있었음. 어찌저찌 연락이 되어 야밤에 단 둘이 권총을 겨눈 상태에서 만나서 자신들 쪽으로 넘어오라고 권유함. 당연히 둘 다 서로를 설득 실패함. 


그 형은 '옛정을 봐서 모른 척 할테니 그냥 가라'라고 했고, 자신은 '요 앞에 기차역이 폭파되면 내가 한줄 아시오'라고 인사를 나눈 뒤 헤어짐. 



1952년 6월 26일, 관모봉 본부가 토벌대에게 습격받아 전원 분산탈출하게 됨. 이 때 딱 12명만이 탈출에 성공했고 일부 대원들과 부상자들은 시간을 벌기위해 본부에서 저항하다 전원 전사함. 살아남은 12명은 마천령 산맥을 타고 두만강 인근까지 가서 어선을 타고 탈출할 계획을 세움. 하지만 도중 지속적인 토벌대의 습격, 그리고 산악지대에서 실족으로 인하여 지역대장을 포함한 3명이 더 사망-실종됨.


약 10여일의 강행군 끝에 성진 인근에 도달함. 거기서 동료 한명이 동네후배와 접촉하여 길안내를 받았고, 마침 미해군이 성진 시가지에 함포사격을 해대는 일이 벌어져 난리가 난 틈을 타 어선 한척을 납치했고 이걸 타고 부산 영도로 복귀하는데 성공함.







김후적 (백호 관구)


1951년 8월, 갑산지구 공작대원으로 선발되어 동료 7명과 함께 갑산군(甲山郡)으로 공중투입. 


이후 본부 지시로 갑산군 백암리(雲興郡)쪽에 파견되어 활동하다 11월 초, 북한측 토벌대에게 포위 당함. 처음에는 매복으로 선발대 40여명을 사살하는등 선전했으나, 북한군이 1개사단을 차출하여 포위해오자 결국 분산탈출하게 됨. 이들은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쳐가며 철수함. 동료들은 하나둘씩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갔다가 매복에 당해 전사함.


1952년 2월, 마지막 남은 동료 1명과 함께 고향집에 몸을 숨기고 2개월을 보냄. 하지만 4월 중순, 북한군에게 생포된 또 다른 동료가 변절하여 이들이 숨은 곳을 밀고함.


갑산군 내무서로 끌려간 2명은 사회안전부 부장에게 심문 받고선 특이하게도 별 일 없이 석방됨.


내무서에서는 '죄를 묻지 않을테니 산에 남아있는 동료들 설득해서 투항시키라'고 명령함.


(당시 갑산군의 험난한 자연환경과 지역대장의 유능함으로 갑산지구 지역대가 매우 큰 활약을 했는데, 북한 측은 토벌이 너무 빡쎄다보니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함.)


일단 풀려는 났지만 철저하게 감시받으며 살다가, 1953년 6월에 옆동네 여자랑 약혼하게 됨. 그런데 그 여자는 출신성분이 좋던 공산당원이었고, 자신은 한번 변절했던 적성계급이라  갑산군 전체 난리가 났음. 여자 쪽 집안사람들은 너도 반동되고 싶냐면서 파혼하라 했는데, 그 여자가 오히려 '차라리 남편 따라서 반동 되겠다' 선언하고 자신한테 옴. 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여자 앞길을 막는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자를 설득하여 집으로 돌려보냄.



휴전이 되자 북한 측은 1953년 10월부터 생포한 뒤 풀어줬던 북파 유격대원들을 다시 체포하여 처형하기 시작함.


이제 자신차례가 왔다고 여기고 갑산군을 떠나 함경남도 신안주(新安州)로 도피하여 현지 도자기 공장에 신분을 속이고 위장취업함.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신하자 이번에는 북한군에 입대함. 그리고 몇개월간 동부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북한군 3군단 소속 박격포병으로 근무하다가 탈영하여 1954년 9월 24일, 맨몸으로 휴전선을 넘어 월남함.


당시 한국군 초소가 보이자 '자유대한 만세'라고 소리쳐서 사살 당하지 않았다고 함.


하지만 이미 영도 본부는 1952년 9월에 해체되어 있었고, 자신의 군적은 인정되지 않고 그냥 귀순용사로 취급되어 한국에서 정착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음. 






출처: 중앙일보 취재 'Y부대 실록'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