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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침공 당시 월남군과 미군의 이동 경로. 베이스 에이리어 367에 패럿츠 비크와 706에 앤젤스 윙이 이번 글의 주요 무대이다)


월남전 동안 월맹은 자국군의 무장과 보급 뿐만 아니라 남쪽의 베트콩을 지원할 방법이 필요했다.


월맹은 바다와 강 하류를 거쳐 캄보디아 항구인 시아누크빌까지의 밀수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벌였다.


미국과 월남 해군은 이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약 90%가 감소했다.


이로 인해 월맹은 육상 보급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월맹은 두 베트남과 맞닿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중립성을 무시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두 나라 모두 강력한 군대가 없었고 월맹군에는 전투로 단련된 간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을 격파한 지 불과 4년 만인 1958년에 월맹은 이미 확립된 도로를 따라 도보로 병력을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는 주로 자전거와 도보를 활용한 보급 시도로 성장했다.


이 "호치민 트레일"의 대부분은 초목으로 덮여 있었고 험한 지형에 있었다.


1970년까지 SOG와 미 공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장" 도로를 따라 흘러가는 물자의 양은 엄청났다.


월맹은 보급로와 저장창고를 건설했고, 이 기지를 월남에 대한 공격을 위한 피난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라오스는 1961년 평화 조약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은 합의에 따라 공작원(CIA 및 SF)을 대부분 철수했지만 월맹은 계속 머물면서 주둔과 활동을 늘렸다.


라오스 정부는 무력했고 그들을 막을 의지가 없었다.


캄보디아에서는 당시 왕자라는 칭호를 가졌던 노로돔 시아누크가 월맹의 캄보디아 동부 끝자락 점령에 저항할만한 병력이 없었다.


시아누크의 "중립" 국가는 이를 용인했고 그는 러시아, 중국, 월맹과 협력했다.


그 대가로 월맹은 캄보디아 국민을 존중하고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공산주의자들의 개입은 더욱 커졌다.


캄보디아 군은 캄보디아 동부에 활동 중인 압도적인 수의 단련된 월맹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한 월맹에겐 캄보디아 남서쪽 구석에 있는 시아누크빌로 옮겨진 물자를 전달하기 위한 여러 경로인 "시아누크 트레일"이 있었는데, 물자를 동쪽과 북동쪽으로 운송하여 은닉처로 옮기거나 메콩강 삼각주를 통해 월남의 사이공 지역으로 직접 보냈다.


1970년 3월 18일, 시아누크 왕자가 치료를 위해 국외에 있던 동안 국회는 그를 해임하고 론 놀 총리를 임시 국가원수로 임명했다.


이는 3월 12일 론 놀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72시간 이내에 캄보디아를 떠나라는 최후 통첩을 내린 직후였다.


월맹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캄보디아 여러 지역을 공격하고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프놈펜에서 15마일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다.


또한 이전에 활동이 자제됐던 캄보디아 공산 반군인 크메르 루주를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미국은 론 놀이 서방, 특히 미국과 우호적일 것이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캄보디아가 미국에 제시한 초기 제안 중 하나는 소설 'NILO 하띠엔'에 잘 묘사된 것처럼 하띠엔에 있는 미 해군의 함정이 캄보디아로 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처음에는 미 해군이 캄보디아에게 월맹군을 격퇴할 수 있도록 2000개 이상의 소총과 기타 무기를 제공했고, 나중에는 35,000명의 월남 민족을 대피시켰다.


이것은 캄보디아 지원을 위해 미국과 남베트남 해군이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닉슨 대통령은 1968년에 미군을 "명예롭게 철군 시키겠다"는 공약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닉슨은 이미 확립된 월남화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하여 점차 월남인들에게 전쟁을 넘겨주었다.


미군의 지속적인 철수와 함께 그 과정을 크게 가속했다.


론 놀이 권력을 잡았을 때 닉슨은 캄보디아에 진입하여 은닉처에 있던 보급품을 파괴하고 가능한 한 많은 적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여 월남에서 철수하기 전에 월남이 전투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러나 많은 물자가 파괴되거나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맹군은 이를 알아냈거나 사전에 정보를 받아 양호한 무기와 탄약을 챙겨갔으며 월남군 및 미군과의 접촉을 거의 피했다.


대신 월맹군은 캄보디아 군에 더 많은 압력을 가하기 위해 병력과 무기를 내륙과 북쪽으로 더 이동시켰다.


내가 있던 A팀 기지인 득후에(Duc Hue) A325는 대규모 밀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패럿츠 비크'에서 동쪽으로 몇km 떨어진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 배치되었다.


짜쿠(Tra Cu) A326은 우리 동쪽의 밤코동 강에 있었고, 같은 이름의 브라운 워터 네이비 기지와 함께 배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유사했는데, 해군은 강변 순찰과 SOF 투입을 제공했다.


구글 어스 애호가 여러분에게 미리 설명하자면 득후에는 10°56'06"N 106°12'16"E에 위치한 프랑스의 오래된 별 모양 요새였으며 짜쿠는 10°54'01"N 106°18'55"E에 있는 밤코동 강과 운하가 만나는 삼각형 모양의 지역이었다.


둘 다 여전히 구글 어스에서 식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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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0년 북쪽 상공에서 촬영한 득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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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쿠 A326)


우리 기지는 모두 사이공 서쪽에 있었다.


득후에에는 캄보디아 중대 1개와 월남 CIDG 중대 2개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양가족과 다양한 민간인 근로자(간호사, 요리사, 세탁소, 통역사, 우리의 타이거 스트라이프 모자 챙을 다듬고 머리를 잘라주는 늙은 재단사,이발사 등)


내 오른팔인 민간 간호사 킴 푸옥은 캄보디아 출신으로 캄보디아어, 월남어, 영어를 구사했다.


그는 론 놀이 권력을 잡는 것에 흥분했다.


한 달에 몇 번씩 우리 기지는 박격포를 맞았다. 그 중 일부는 아마도 인근 국경 너머, 바투(Ba Thu)에서 진행된 베트콩 훈련을 위한 표적 연습이었을 것이다. 현재 지도에서는 찬쩨아(Chantrea) 근처에만 있는 것으로 식별된다.


우리에게는 잘 만들어진 시설, 이중층 지붕, 흙으로 가득 찬 55갤런 드럼과 모래주머니로 보호되는 기지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박격포 사격에도 부상을 거의 입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순찰대는 일종의 접촉을 겪었다.


우리는 또한 두 대의 155mm 곡사포와 포병으로 구성된 월남군 소규모 포병 파견대를 보유했다.


침공은 단계적으로 발생했다.


3월 중순부터 월남군은 일시적으로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그런 다음 4월 말경 월남군은 북쪽으로는 '앤젤스 윙'으로, 남쪽에서 '패럿츠 비크'지역을 향한 협공을 포함하여 프놈펜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미군 중보병 사단과 월남군은 5월 1일부터 캄보디아로 더욱 실질적으로 진격했다.


이러한 진격은 월남-캄보디아 국경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가장 북쪽에는 플레이쿠 서쪽, 거의 라오스 국경에 접한 미 육군 제4보병사단이 있었고, 가장 남쪽에는 태국 만에 월남 남서쪽 구석, 하티엔 근처를 지나는 월남군이 있었다.


위치는 알려진 또는 추정되는 월맹군 탄약 저장 구역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현장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에 따르면) 월맹군은 핵심 무기를 회수했으나 약 9개월치의 무기, 탄약, 그리고 베트콩을 지원하기 위한 물자를 확보했다.


그린베레 기지와 SOG(주로 CCS) 활동도 활발했다.


다가오는 작전에 대한 사항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일부 미군과 함께하는 월남군이 전날에 '앤젤스 윙'과 '패럿츠 비크'를 휩쓸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했던 것은 월남군이 캄보디아가 월맹에게 함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놈펜 지역을 향해 서쪽을 휩쓸고 있다는 것이었다.


득후에 A325의 CIDG 부대와 동쪽의 자매 A팀 기지인 짜쿠 A326의 부대로 구성된 우리의 협동 CIDG 작전은 월남군이 우리 구역을 떠나는 즉시 시작되었다.


휴이별로 다양한 그룹이 투입됐다.


내 그룹은 도착한지 약 2분 만에 부상당한 CIDG를 치료해야하는 환영을 받았다.


해당 대원은 지뢰를 밟아 양쪽 다리의 대부분이 무릎 약간 아래까지 날아갔다.


다행히 CIDG 의료진들이 이미 지혈대와 붕대를 감는 등 훌륭한 일을 해냈다.


그 대원의 전면에도 파편이 뿌려져 그는 앞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 대원을 덮은 것들을 조금 더 치워내고 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군 부대의 사상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린베레 대령이 도착하여 현장에서 진행 상황을 평가하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A팀 기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CIDG를 데리고 적절한 의료 시설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도 그는 몇 초 정도만 생각하고 동의해주었다.


나는 그 대원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고 다 쓴 주사를 그의 옷깃에 부착하여 다른 의료진이 그가 약을 투여받았음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우리가 그 대원을 헬기에 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령이 떠났다.


나는 약 3개월 후 나트랑에서 파병 종료 절차를 밟을 때까지 그 대원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의료 시설에 있는 한 병장의 제안으로 그곳에 들어갔을 때 멀리 떨어진 침대에서 큰 소리로 "박시(의무병)!"라고 외치는 인사를 받았다.


그는 살아 있었고 그 사실이 행복했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감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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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트레일, 시아누크 트레일 및 FAC가 이용하는 주요 공군 기지를 표시한 지도)


우리 작전의 목적은 지역을 확보하고 숨겨진 무기 벙커를 찾는 것이었다.


지역을 확보하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후방에 머무르는" 적군을 만났다.


이는 2~3일 간의 교전으로 발전했다.


우리는 득후에에 위치한 월남군 155mm 포와 미군 코브라 건쉽 헬기로부터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코브라가 우리 바로 위에 가까이 비행했기 때문에 낮이었다면 지나갈 때 파일럿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때 우리 부대는 잠 못 이루는 밤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도랑에서 전열을 갖췄다.


다음날, 우리는 전날 밤에 상당한 사격이 날아왔고 지금은 산발적인 AK47이나 기관총 사격이 날아오고 있는 수목선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을 구성했다.


내 등에 있던 AN/PRC 25를 사용한 뒤, A326 짜꾸의 지휘관인 섀넌 대위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CIDG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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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득후에에 하우 밀러와 짜쿠에 섀넌 대위)


그래서 월남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우리 후임 통신병 조 타일러스가 일어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약 20야드 앞으로 달려가 마른 논 위에 엎드린 자세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초급 월남어 수준을 최대한 이용하여 절반은 전진하고 나머지 절반은 전진하는 동안 엄호하라고 소리쳤다.


모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결국 우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시점부터 훈련이 빛을 발하였고 우리는 한 명을 잃고 목표를 달성했다.


2~3일간의 전투 동안 우리는 8명의 아군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나는 보병과 의무병의 임무를 같이 수행하느라 바빴다.


결국 우리는 적의 활동을 멈췄고 지역을 확보하고 쌀, 무기, 탄약, 지뢰, 폭발물을 수색하고 찾는 데 거의 두 달 동안 정착했다.


이용 가능한 항공기가 부족하여 기지로 회수 할 수 없었던 항공기도 제자리에서 폭파시켰다.


CIDG는 탐침 막대를 사용하여 부지런히 수색한 결과, 논 제방이나 트랩 도어 아래, 막사 내외부에 숨겨져 있는 대부분의 물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민간인이 없었기 때문에 CAP/민간인 환자 소집은 없었다.


의료 문제가 거의 없을 때 의무병은 현장에서 무엇을 할까?


최상의 위생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병력 진료 소집을 하고, 예정된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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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바투, 은닉처를 폭파하기 위해 준비 중인 캄보디아 CIDG)


그런 다음 공병 동료인 제프 힐튼이 가장 철저하게 교차 훈련을 받은 기술을 사용하여 물자를 폭파했다.


우리에게 가장 쓸모없는 것들은 대전차지뢰와 대인지뢰, 그리고 거기에 널려 있던 폭발물이었다.


적의 사용을 막기 위해 그 자리에서 파괴하기를 원했다.


사후 보고서에 "TNT"라고 기술한 것들은 실제로 높이가 약 9~10인치인 큐브로, 깔끔하게 접힌 두꺼운 왁스 종이로 포장되어 있었다.


폭발물은 매우 밝은 황갈색이었고 축축한 점토 정도의 질감이었다.


그들은 이 지하 저장고에 10개 정도 높이로 쌓아뒀다.


우리는 1차적으로 무반동총과 그 포탄을 제거했다.


이것들은 부식 억제제로 칠해졌고 한자로 표시어 있었다.


소총은 대부분 CKC라고도 불리는 러시아제 반자동 소총인 SKS의 중국 버전으로, 일반적으로 AK47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7.62mm x 39mm 탄환 10발을 장전했다.


우리의 M14 소총과 M60 기관총 탄약과 외관상 비슷했다.


SKS는 AK47보다 훨씬 열등했기 때문에 내버려뒀다.


사용할 것이라면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때 이미 AK47은 온갖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월맹군은 이 시기에 트럭을 타고 북쪽에서 호치민 트레일을, 남서쪽에서 시아누크 트레일을 통해 엄청나게 많이 이동하고 있었다.


이 SKS 중 일부는 결국 우리 후방 부대에게 좋은 거래 물품이 됐고, 나는 수출 허가를 받고 하나를 집으로 가져갔다.


또한 각각 별 모양 총검(러시아 및 동유럽 버전의 칼날 모양과 반대)이 접이식으로 있다는 점에서 편리했다.


그리고 적절한 탄약을 갖춘 기관총, RPG 발사관, 박격포, 부비트랩, 심지어 많은 삽도 있었다.


나는 폭발물에 대한 경험이 있는 CIDG 중 하나를 데리고 가서 이러한 물자 중 일부를 폭파했다.


C4, 도폭선, 뇌관을 함께 장착한 후 퓨즈에 점화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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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바투, 1970년 5월~6월 또 다른 은닉처를 폭파함)


베트콩과 월맹군이 여러 차례 우리 기지로 박격포를 쏘고 국경을 넘어 안전한 피난처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그들의 보급품을 파괴하면 미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주민과 동맹국 친구들을 많이 죽이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조용한 시간대의 어느 순간, 내 앞에 반원형으로 서 있던 6~8명의 CIDG 그룹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마치 엄숙한 일을 하려는 듯 조용했다.


한 명이 나에게 뭔가를 건네주더니 자기들이 직접 파냈고 내가 이걸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본질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감상적인 가치도 있는 것이었다.


집 입구 옆에 놓여 있는 해태였다.


보통 한 쌍으로 나오며, 해태 한 마리 발 아래에 새끼가 있는 모양이었다.


또 다른 것은 구체를 쥐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그들로부터 이걸 받게 된 영예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색하게 월남어로 감사 인사를 했더니 다들 웃으며 자리를 떴다.


훨씬 이후에 나는 해태상의 단단한 검은 표면이 보호 코팅이었고 사실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는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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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2 데놈 소령, 득후에 LLDB 지휘관 하이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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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수영 후 CIDG 옆에 M79를 들고 서있는 하우 밀러)


한편 캄보디아 남부에서는 월남군, 미군 보병 및 공군, 연합군 해군, 그린베레 A팀 기지들이. 북쪽에서는 SOG, 월남군, 연합군 공군, 미군 보병 및 다수의 A팀 기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캠페인에 참여했다.


여기에는 '앤젤스 윙' 남쪽에서 진행되는 지상 및 수상 활동 중 일부를 작성했다.


다음에는 월남군, 미군 보병, SOG, 그린베레 A팀 기지의 참여를 포함하여 북쪽을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