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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에서 월남으로 귀환하는 제11 기갑기병연대 M113)


저번 글에서 나는 1970년 캄보디아 침공 당시 수행된 공개적인 작전에 대해 서술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작전은 월남전 중 가장 성공적인 연합 작전이었다.


닉슨 대통령이 모든 전투 활동을 월남에 넘기는 것의 추진을 가속화하는 동안, 캄보디아에 있는 월맹군 보호구역을 제거하고 무기와 보급품을 파괴할 수 있다면 월남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월맹군은 캄보디아에서 월남으로의 군사 작전을 시작하고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며 재무장도 가능했으나 연합군은 손이 묶인 채로 캄보디아의 월맹군을 공격할 수 없어 좌절했다.


그러던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정부는 서방에 더욱 우호적인 정부로 바뀌었다.


이는 닉슨에게 공격의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과 월남군, 해군, 해병대, 공군이 모두 캄보디아와 협력하여 참가했다.


월맹군은 일시적으로 철수했고 엄청난 양의 무기, 탄약 및 기타 보급품을 노획했으며 우호적인 캄보디아 정부는 공산군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약 30년 동안 밝혀지지 않은 비밀스런 작전들이었다.


1964년 초부터 MACV-SOG는 캄보디아, 라오스, 월맹에서 국경을 넘어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고 월남으로 향하는 공산군 및 물자의 이동을 늦추는 데 기여했다.


이것은 극도로 위험한 작전이었고 그린베레, 네이비씰, 전선 부대의 특공대와 헬기 승무원, 화력 지원 건쉽 및 폭격기와 같은 지원 인력과 같이 수많은 병력들이 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큰 대가를 치렀다.


SOG에는 CCN(North), CCC(Central) 및 CCS(South)의 세 개의 하위 부대가 있었다.


CCS는 주로 캄보디아 동부의 호치민 트레일 및 시아누크 트레일을 정찰하고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반적으로 미군 2명과 몽타냐드, 중국계 넝족, 캄보디아인 등 약 4명의 현지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팀은 종종 헬기를 이용해 적지 한가운데에 있는 LZ에 투입됐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발각되지 않고 정보를 수집하거나 심문을 위해 적을 포획하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헬기로 철수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월맹군은 투입 LZ를 관측하여 정찰팀에게 공격을 가하고 지원군을 신속하게 불러오는 데 더 능숙해졌다.


SOG 부대의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팀도 존재했다.


때로는 팀 전원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기도 했다.


많은 팀이 큰 공격을 받아 구출되어야 했고 때로는 같은 날에도 여러 번의 철수가 이루어져야 했다.


CCS 사령관 프레드 린지 중령은 자신의 저서 'Secret Green Beret Commandos in Cambodia'에서 4월까지 투입이 지속해서 어려웠다고 기술했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본대와 떨어져 있는 캄보디아군 부대가 있는 위치 4곳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린지 중령은 그 부대를 지원하고 그들이 공산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그는 항공 정찰을 수행하고 연락을 시도하기 위해 우리와 연락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이 포함된 메시지를 투하할 대원으로 CPT 스포리 대위를 선택했다.


대위는 플레이쿠의 정서쪽에 있는 바케브에 하나, 베트콩/월맹군 활동이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훨씬 더 남쪽에 있는 두 위치에 투하했다.


남쪽 기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바케브에서 스포리 대위는 거친 활주로 옆에 누워 마치 착륙하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고 있는 수척한 병력을 보았다.


해당 위치는 월맹군이 호치민 트레일의 서쪽에 위치한, 월남 이동 중 사용했던 중간역이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린지 중령은 바케브에 부대를 효과적인 전투 부대인 A팀 스타일로 전환하는 동시에 라반시크에서 서쪽으로 몇km 떨어진 상위 본부를 지원하며 해당 본부를 월남 특수부대에게 넘겨줄 게획을 세웠다.


이것은 그린베레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일급 비밀이며 빠른 속도로 작전을 수행하는 SOG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린지 중령은 대부분의 캄보디아 장교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경험이 풍부한 스포리 대위를 바케브 팀 지휘관으로 선택했고 빌리 워 원사에게로 보냈다.


빌리는 종종 언급되는 것처럼, 그의 책 Hunting the Jackal에서 묘사 되었고 애니 제이콥슨의 Surprise, Kill, Vanish에서 강조된 것처럼 그린베레에서 전역한 후에도 오랫동안 주목할만한 경력을 이어왔다.


린지 중령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윌리엄 D. "빌리" 워 원사가 70년 1월 어느 날 주립 병원에서 SOG 본부로 왔다. 그곳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워는 쉰겔 대령에 의해 CCS 정찰 중대의 일등상사로 개인적으로 선택되었고, 3월 초에 CCS에 배치됐다"


워는 이렇게 회상했다. "CCS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걸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댄 쉰겔 대령이 CCS 정찰 중대에 자극이 필요하다고 나에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린지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조 브록 상사가 정찰 중대에 좋은 일등상사로 있었고 빌리는 사무직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록은 일등상사로 남아 있었고 워 원사는 사실상 '정찰 원사'가 되어 임무가 서로 잘 수행되는 것 처럼 보였다. 이것이 워의 장점이었다. 그는 우리의 정찰 재훈련 시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찰에서는 계급이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자격을 많이 갖춘 사람이 책임자가 되는 것이었다. 워는 베이스캠프에서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은 전사였다. 그는 정찰팀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우리와 합류하기 전에 SOG 정찰 임무에서 코비 라이더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워는 세계적인 경험을 가졌다.


그는 51년 초 육군에 입대해 82 공수사단에 복무했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52년 12월 귀국했다.


54년에 그린베레로 독일 바트 톨츠에 배치됐고, 1962년 '제5 특전단'이 월남에 처음 배치됐을 때 월남에 도착했다.


69년에 원사 계급을 달았으며 65년 3월, 오키나와에 있을 때 월남의 5특전단 TDY로 봉손 전투에서 처음으로 월맹군과 싸워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은성훈장을 수훈했다.


오랜 입원 끝에 빌리는 67년에 월남으로 돌아와 FAC이자 코비 라이더로 CCN에 배정되었으며, 코비 라이더로 월맹군 국방 장관인 보응우옌잡을 잡기 위한 라오스 오스카-8에서의 비참한 습격에 참여했었다.


빌리가 사이공 근처의 롱탄 훈련 기지에서 훈련을 확인하는 동안 린지 중령은 워에게 전투 장비를 들고 OP35 사령관(린의 상사) 사무실로 오라고 전화했다.


그가 빌리에게 바케브에서의 임무를 맡을 의향이 있는지 묻자 빌리는 기꺼이 하겠다고 답했다.


실제로 빌리는 그린베레 경력 중 가장 만족스러운 시기였다고 훗날 말했다.


이 시점에서는 바케브의 캄보디아군이 실제로 우호적인지, 아니면 그가 함정에 빠지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한편 린지 중령은 빈실 대위 지휘 하에 버캐부 북쪽에 차단군을 배치할 준비를 했다.


린지 중령이 장 잘 기억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닉슨이 "침공"을 발표하기 며칠 전인 4월 26일 경과 4월 20일에 CCS 임무를 지원하기 위해 고정익 지원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된 지 며칠 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케브 작전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있었지만 CCS는 여전히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CCC와 CCN에서 팀을 빌려 작전을 수행했다.


린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다음 즉각적인 강력한 지원군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존 로스 대위와 함께 제1 전과확대 중대(해칫포스)를 플레이쿠 서쪽 국경 근처에 배치했다.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CPT 칼 빈실 대위의 제2 중대를 캄보디아 바케브 북서쪽에 투입했다. 그들은 최근 연합군 침공의 일환으로 월남군 사단이 샅샅이 뒤진 지역으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빈실의 해칫포스는 교란 및 차단, 가능하면 포로를 생포의 역할을 맡았고 필요한 경우 바케브에 지원군을 제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케브 및 해칫포스 임무에 대한 헬기 지원을 위해 월남공군 H-34와 할로웨이 기지의 제187 돌격헬기 중대의 지원을 받았다"


"우리는 캄보디아로의 모든 이동에 월남 공군 H-34 킹비 헬기를 사용했다. 처음부터 우리는 공식적으로 캄보디아에 미군을 파견할 예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 공군 비행기나 육군 헬기를 사용하는 것이 여전히 금지되었다. 이는 닉슨 대통령이 재래식 부대를 통한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통신 장비로 가득 찬 C-130 24시간 공중지휘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호출부호는 힐스보로(& 야간에는 문빔)였다. 그들은 태국 NKP에 기지를 두고 있었고 미군 제트기나 항공 지원을 위해 C-47 또는 C130 건쉽을 지휘했다. 거기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상공에 있었다. 또한 투입 중 워가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필요한 모든 퇴출을 위해 일반 미 공군 그린호넷 건쉽과 헬기 비행대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케브에서의 접촉에 대한 여러 우발 상황의 지원을 위해 다른 지원 부대의 이동을 계획했다"


힘든 시작 이후 좋은 환영


린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전에 엄격한 정보 수집 임무에 많은 팀을 투입하는데 사용되었던 두코의 북부 발진 기지에서 워의 팀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캄보디아인들이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할지, 아니면 우리에게 총격을 가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워와 그의 팀을 긴급 구출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모든 종류의 구조 팀을 준비했다. 그러나 팀은 발진기지에 도착하는 데 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빌리 워는 C130을 타고 깜란만을 거쳐 두코로 가던 중 기체가 피격 당해 간신히 도착했다.


"그날 오후,바케브까지의 투입을 계속하기 위해 두코에 착륙하기 직전, 우리가 탄 C-130 블랙버드가 총격을 받아 크루치프가 부상을 입었고 유압 장치는 완전히 망가졌으며 조종사 / 부조종사의 기술에 의해서만 기체가 고도를 유지하여 활주로에 거품이 뿌려진 깜란만으로 돌아갔다. C-130의 날개에는 45~55개의 구멍이 있었고 수평 안정 장치는 거의 손상되었다. 이것은 두코의 그린베레 기지 바로 바깥에 있는 월맹군의 51구경 기관총에서 온 것이었다. 우리 CCS 팀은 C-130에서 나왔고, 십여명의 중무장한 헌병에게 둘러싸여 격납고로 향했다.약 3시간 후, 아마도 1300시에 우리는 깜란만의 격납고에서 두 대의 H-34를 타고 두코로 이동하여 착륙하고 임무 직전 브리핑과 함께 작전을 준비한 다음 H-34를 타고 바케브로 향했다. 우리는 아마도 1500시쯤에 착륙했고 린지 중령과 연락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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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군 대대장 사부스 중령)


린지: "다행히도 팀은 누더기 같고 절박했던 캄보디아인들로부터 '두 팔 벌려' 환영을 받았다. 워는 초보적인 프랑스어를 최대한 사용하여 캄보디아 선임 대대장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워는 음 사부스 중령과의 만남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했다.


"그는 50대 중반이었고, 주름이 뚜렷하고 삭은 얼굴을 갖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었고, 키는 약 5피트 4인치 정도 되었다. 그의 앞머리 근처에는 총상으로 인한 것으로 깊은 흉터가 있었다. 그의 피부는 눈에 띄게 누렇게 변했고, 이는 대령이 말라리아로 인한 황달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줬다… 그리고 프랑스 권총 벨트에 부착된 가죽 권총집에 중국 권총으로 무장했다. 제복은 비록 해졌지만 깨끗했다. 키가 큰 편이었고,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었다. 천 명 이상의 부대원과 그 대가족이 기지 근처에 살았다. 프놈펜과의 모든 접촉은 '쿠데타' 직후 중단되었고 그의 주 2회 식량 공급은 우리가 도착하기 4주 전에 중단되었다."


워는 SOG 사령관의 편지와 맥주를 포함한 몇 가지 선물로 자신의 자격 증명을 제시했다.


그들은 미지근한 버드와이저로 관계를 맺었다.


워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의례를 가진 후 사부스 중령은 노랗고 피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간단한 질문을 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나는 이런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됐었다. 우리의 존재만으로 월맹군의 관심을 촉발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중령은 월맹군의 분노가 그의 부대에 내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C-130 공중지휘기(호출부호: 힐스보로)에게 바케브 지역에 있는 우리의 존재를 알렸다. 우리는 중령의 질문에 단호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사부스 중령에게 몸을 돌려 주변 산들을 가리키며 그에게 말했다. '400m 이상되는 곳에서 미국의 힘을 보고 싶은 곳을 골라보십쇼' 사부스는 활주로에서 약 800m떨어진 동쪽의 숲이 우거진 둔덕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십니까?'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략 8자리 그리드 좌표를 린지 중령과 비행 중인 미 공군 파일럿에게 전달하고 '스카이 스팟'(250kg의 고폭탄 2개)을 둔덕 좌표에 즉시 투하하도록 요청했다"


"5분도 채 안 되어 캄보디아군이 보지도 듣지도 못 할 상공에 있는 두 대의 전투기가 목표물에 직접 무장을 투하했다. 폭탄이 떨어지는 동안 우리 중 누구도 뭐가 지나가는 것 조차 보지 못했기 때문에 폭발은 사부스 중령을 포함하여 캄보디아 사람들의 숨을 잠시 멎게 할 정도로 엄청난 놀라움을 선사했다. 산에서 불꽃과 연기가 터지자 군인들 사이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활주로를 따라 서서 박수를 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그 순간을 되새겼다.

나는 아찔한 안도감이 내 위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폭격 시연을 위해 CCS FAC가 부른 미 공군 전투기는 투입을 위한 공중 엄호의 일부였다"


"사부스 중령은 이 컴뱃 스카이 스팟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우리는 기지와 대령의 오두막 근처로 이동했다. 린지는 밤 중에 내게 연락하여 내가 무전기에 응답하지 않은 것에 화를 냈다. 리마/찰리(Loud/Clear, 크고 분명하게) 통신을 계속 했기 때문에 FAC 연락을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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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시크 캄보디아군 지휘관 닉삼 대령과 월남군 응히아 대령)


워로부터 "모든 것이 명확해짐"을 알게 된 린지 중령은 다음 날에 또 다른 헬기와 함께 스포리 대위와 팀에 대한 증원 및 일부 기본 보급품을 가져왔다.


린지 중령은 "잡다한 병력"을 퍼레이드 대열로 모은 사부스 대령을 만났다.


그들은 표준 군복이 없었다.


일부는 군화나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고 맨발도 있었다.


헬멧을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기는 일반적으로 구식이었고 다양했다.


모터 풀에는 5개국의 오래된 차량이 있었다.


팀은 즉시 작업에 착수하여 경계 태세를 개선하고 정찰 및 기타 보병 훈련을 시작했다.


에이스 통신병 멜빈 힐이 도착했고 기지 전체를 5:5로 하여 CCS가 이용했다.


팀은 군인과 그 가족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의사를 포함한 의료팀을 데려왔다.


방문 중에 의사 중 한 명이 빌리에게 사부스 중령이 세 가지 유형의 말라리아로 심하게 겪고 있어 치료를 받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사부스는 그의 부하인 탄트 소령에게 지휘를 넘기고 치료를 위해 떠났다.


그리고 워는 4인 팀이 초기 정찰 중 트레일에 혼자있던 월맹군을 붙잡았다고 말했다.

네 사람에게는 각각 캄보디아 리엘로 20달러 상당의 보상이 주어졌다.


이를 통해 기지가 다음날 밤 두 적군 박격포 팀의 공격을 잘 막아냈으며 동시에 기지의 사기를 높였다.


임무는 동쪽 호치민 트레일에 있는 월맹군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편 빈실 대위의 차단군은 대규모 쌀 저장고를 발견하고 파괴했다.


22개의 대형 구조물이 있는 야영지가 파괴되었고 대형 탄약고는 바케브에 있는 캄보디아군이 확보했다.


또한 기지 순찰 작전 전반에 걸쳐 불량 탄약이 포함된 '폴빈(엘디스트 선)' 물품과 사기를 저하시키는 편지, 일기, 소형 검정색 라디오 등이 곳곳에 배치됐다.


이 기간 동안 기지 순찰팀과 몇몇 정찰팀이 점령했던 SOG의 702 목표 지역에는 190회의 항공 지원 출격으로 39개의 목표가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구조물 500개 파괴/손상, 벙커 73개 파괴/손상, 2차 폭발 52개란 피해를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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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캄보디아 바케브에서 캄보디아군 훈련 팀을 지휘한 빌리 워)


이는 물론 월맹군의 관심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상부는 월맹군은 기지를 전멸시키려고 할 것이라는 많은 정보를 입수했고, SOG 사령관에 해당하는 월남의 론 장군이 플레이쿠 2군단 본부에서의 회의 중 바케브 전초기지의 음아리 중위에게 직접 서면 제안을 전달했다.


기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국경 너머 월남으로 호송하고 무기를 확보하겠다는 제안이 이루어졌다.


CCS는 아직 그 아이디어에 열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부스가 돌아올 때까지 훈련과 작전이 계속되었고, 그는 워와 스포리가 철수할 때가 됐다고 말할 때까지 계획대로 작전을 계속하는 데 동의했다.


기지가 활동하는 동안 그들은 FAC의 관측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정보와 활동을 생성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적과 많은 물자가 파괴되었다.


일례로 린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케브가 실제로 운영을 시작하자 CCS FAC는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CCS는 ASA 도청 보고서를 이용하여 "스카이 스팟"을 사용하여 밤에 베트콩/월맹군 송신 기지를 폭격했다. 플레이쿠는 항공기를 제어할 수 있는 '스카이 스팟' 레이더를 갖고 있었다. 제2 DASCC는 위치를 표시했고 항공기에 비행 방향과 속도가 주어졌다. "스카이 스팟"은 모든 변수를 파악하고 항공기의 투하 지점을 계산했다. 그때 목표 중 하나가 월맹군 대대였는데 7일 연속 공격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8일째 되는 날 그들은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아마 아무도 알지 못했던 우리의 더 나은 작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월맹군이 바케브를 향해 진군하여 이를 제거해버릴 것이란 소식이 마침내 전해졌다. 그래서 SOG는 대피를 실행하기 위해 활동을 멈추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19번 도로를 따라 동쪽에 두코 그린베레 기지로 이동시켰다. 로버드 N. "팝" 테일러 상사가 대피 약 2주 전에 바케브 일행 증원을 위해 정찰팀을 데려왔고, 바케브 그린베레 팀 대부분은 6월 23일,24일에 부온마투옷으로 대피했다"


린지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고 지휘권 교체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의 마지막 단계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펜타곤에서 돌아온 쉰겔 대령으로부터 얘기를 듣기 전까지 결과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다)


미군들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워 원사와 다른 대원들은 6월 30일 두코 발진기지로 철수했다.


며칠 후,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전체 대피 상황을 상공에서 보기 위해 H-34 헬기에 탑승했다.


워의 뭉클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SOG(실제로는 월남군과 미군의 2군단 최고 책임자였다)의 지도자들에 의해 실행되었으며, 우리의 훌륭한 캄보디아 부대의 이동을 촬영하기 위해 언론 파견대가 바케브에 도착했다. 언론은 대피에 대해 알리지 않았고, 사부스 중령은 그의 부대에게 그들 가운데에 있던 미군 부대의 존재와 과거의 존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언론이 모였을 때 우리는 사라졌고 사부스 중령이 지휘를 맡았다. …이동은 동이 트자마자 시작되었다….'"


캄보디아 철수 H-34 헬기는 두코에서 워의 마지막 팀을 태우고 날아갔다.


H-34는 또한 절름발이와 노인들의 대피를 도왔다.


워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성경의 출애굽기를 개정한 일생일대의 광경이었다. 5km가 넘는 거리에 펼쳐져 있는 사람들과 모든 물자들은 극도로 천천히 움직이며 새로운 삶을 향해 터벅터벅 나아갔다. 염소와 소들은 뒤처졌지만, 그들은 여러 캄보디아 아이들, 즉 군인들의 아이들의 지시에 따라 동쪽으로 느리고 꾸준한 행군을 계속했다"


"출발 11시간 후, 대략 1700시에 호송대는 월남 국경에 도착했다. 우리가 병력, 차량, 무기, 개, 염소, 소, 30개 이상의 러시아, 영국 및 기타 국가제 트럭과 궤도 차량과 함께 두코 기지로 돌아왔을 때 약 2,000명의 호송대가 있었다. 엄청난 양의 항공기와 언론이 도처에 있었지만, 관계자들과 SOG의 매우 높은 우선순위 지원 덕분에 우리는 문제 없이 임무를 해낼 수 있었다"


"사부스 중령은 트럭에서 내리라고 지시하고 낙오자들을 모으기 위해 대열를 따라 병력들을 보냈다. 이 훌륭한 사람들에게 따듯한 밥과 닭고기를 줬고, 나이 많은 분들은 우리를 만지고, 손을 모으고, 이 빠진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린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처음에 두코 CIDG 캠프 바로 밖에 설치된 임시 캠프에 배치되었다. 다음날 아침, 빌리와 사부스 중령은 두코 그린베레 기지 안으로 들어가 월남군 장군 루론과 다른 VIP들을 만났다. VIP가 떠난 후 사부스는 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빌리는 사부스에게 버드와이저 20박스를 선물했다"


빌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임무나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사부스 중령에 대해 마지막으로 알려진 기록은 1973년의 것이다. 그는 당시 1성 장군으로 CIA 전투 서열에 등재되어 있었다"


CCS 바케브 팀 중 다수는 말라리아 회복을 위해 바로 병원으로 갔다.


"CCS 바케브 작전이 끝나고 대피에 성공한 두 바케브 대대와 여단 본부의 모든 캄보디아 군은 플레이쿠에서 재무장을 갖추고 재훈련을 받은 뒤 수도 프놈펜으로 다시 옮겨졌다. 그 이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우리 바케브 팀은 사부스 중령의 대대를 위해 실시한 훈련이 매우 호평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기지의 캄보디아 SCU 중 상당수가 장교로 캄보디아군에 합류하기로 선택되었다. 정확히 몇 명의 캄보디아 군이 후속 MACV 그린베레 훈련을 받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약 4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캄보디아군 훈련이 결국 78개 대대를 대상으로 할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했다! 따라서 CCS는 이 스노우 볼을 굴리기 시작한 공로를 인정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