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2월 17일, 이탈리아 베로나의 자택에서 평소처럼 일상을 보내던 NATO 남유럽 지상군 참모차장 제임스 도지어는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밖을 나가보니 꾀죄죄한 몰골의 일꾼 두명이 있었고, 그 중 한명이 어색한 영어로 자신들을 배관공이라고 소개하며 아래층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어서 그 윗집인 도지어 장군의 집을 살펴보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했다. 도지어는 이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집 안으로 들여보내 누수의 원인이 될 만한 곳으로 데려왔다.
도지어 준장이 원활한 대화를 위해 이탈리아어 사전을 어디 두었는지 찾으려던 찰나, 배관공들은 권총을 꺼내들어 그를 가격했다. 바닥에 쓰러진 도지어는 반격을 하려 했지만 세번째 '배관공' 이 그의 아내를 인질로 붙잡아 둔 것을 보고 이내 포기했다. 도지어는 아내에게 이들이 하는 말을 따르라고 한 뒤 배관공들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했다. 자신들을 '단원(brigatisti)' 이라고 부르던 배관공들은 도지어 장군을 밖으로 끌어내어 파란색 피아트 밴에 쳐넣고, 그의 아내는 의자에 묶어두고 다용도실에 가둔 뒤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도지어가 배관공인 줄 알고 들여 보낸 이들은 이탈리아의 극좌 테러단체인 '붉은 여단'으로, 알도 모로 전 이탈리아 수상을 납치 후 살해한 전적으로 악명이 높았다. 지금까지 붉은 여단에게 잡힌 인질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했던 것을 감안하면 도지어 준장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었다.
붉은 여단은 그날밤 첫번째 성명서에서 자신들이 도지어를 납치해 '인민 감옥'에 가두었고 '프롤레타리아 정의' 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틀 뒤에 공개한 두번째 성명서에서는 도지어 준장을 '양키 돼지' 라고 지칭하며 그가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학살의 영웅이며, 그 공로로 수많은 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그의 오랜 생애 동안 제국주의자들이 민족 해방투쟁을 억압하고 목조르며 점령과 도발을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의 상급자들의 미명 속에서 숨어 이를 계획했다.' 라고 선언했다.
붉은 여단의 성명서에서는 어떠한 요구 사항이나 인질 석방에 대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Winter Harvest"
이탈리아에 급파된 JSOC의 연락팀의 존재는 유럽에서의 작전을 총괄하던 미 유럽사령부와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미 유럽사령부에서는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특수작전 태스크포스를 비첸자의 인근 NATO 기지에 보내 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는 처음 JSOC가 창설될 때 군에서 수많은 반대의견이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전세계에 위치한 미군 사령부의 총사령관, 일명 CinC(Commander-in-Chief)들은 자신들은 알지도 못한채 파견된 JSOC의 특수작전부대들이 상황에 개입해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이들이 두려워 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작부터 이글 클로 작전을 연상케 하는 난장판이 일어났다. 도지어 준장 납치 사건을 실적을 쌓을 기회로 본 이들이 전 군에서 달려와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정보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군 지휘체계의 혼선과는 별개로 이탈리아 당국의 수사는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카라바이네리(carabinieri)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국가 헌병대와 대테러 경찰이 베로나 시를 이 잡듯 뒤졌지만 도지어 준장이 갇힌 곳을 찾을 수 없었다. JSOC의 연락팀이 보기에 이탈리아 경찰이 필요한 것은 전자감시 수단이었다. 이들이 JSOC 본부로 ISA의 전자감시 팀이 수사 지원에 적합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리면서 윈터 하베스트 작전이 시작되었다.
ISA에는 크게 3가지 부류의 대원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전직 그린베레 대원들로 이루어진 '슈터' 들은 주로 직접 타격 작전을 수행하고 동료 대원들의 정보작전을 돕는다. 그 다음은 '스파이' 들로, 이들은 현지에서 정보원들을 이용해 휴민트 수집을 한다. 마지막은 일명 '노브 터너'라고 불리는 이들로 활동대의 3개 스쿼드론 중 하나인 SIGINT 스쿼드론에서 모든 종류의 신호정보 수집을 담당한다.
이탈리아에 파견된 25명의 ISA 대원들은 '노브 터너' 들로, 이들이 이런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신호 도청을 할 때 사용되는 장비들의 수많은 조작기기(노브) 를 돌리는 모습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붉은 여단이 공개한 두번째 성명서에서 도지어 장군의 왼쪽 눈이 상당한 부상을 입은 흔적이 보였다. 붉은 여단의 악명을 생각하면 이는 아직 맛보기에 불과할 것이었다.
카라바이네리들이 베로나 시를 샅샅이 수색할 때, ISA의 SIGINT 전문가들은 붉은 여단 단원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무전 통신을 사용할 때를 노려 이들을 도청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미국 관계자들은 이런 물밑 작업을 언론에게 간단히 '검은 선글라스를 쓴 자식들이 여기 있고 곧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일을 시작할 겁니다' 라고만 말했다.
ISA의 노브 터너들은 주파수 스캐닝 라디오 장비들과 방향 탐지장치를 설치한 개조된 UH-1 휴이를 타고 이탈리아 상공을 날아다녔다. 이들은 단원들이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워키토키 스타일의 무전기 신호들을 추적했다.
ISA 대원들이 설치한 전자감시장비들은 일종의 테스트 빌드로, 개조된 휴이는 외견상 일반적인 UH-1 이로쿼이와 똑같아 보이게 했다. 당시 부대의 준위 중 한명이 개발한 이 빌드의 주요 목적은 장비 세트들이 쉽게 휴대되고 빠르게 항공기에 설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술은 FOG 시절부터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특수 개조된 UH-1에 탑승한 노브 터너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여러 주파수 대역을 찾아다녔다. 한 번 대역을 찾아내기만 하면 붉은 여단 단원들이 주파대를 이리저리 옮겨도 계속 추적해 나갈 수 있었다. 휴이에 탄 대원들이 공중에서 신호정보를 수집할 때, 지상에서도 활동대 대원들이 자동차나 고정 장소에서 붉은 여단 단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통신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해서 얻은 정보들은 메릴랜드 포트 미드의 NSA로 전달되어 스파이 위성인 '아쿠아케이드' 가 지중해 위에서 신호를 추적하며 붉은 여단의 안전 가옥을 찾아내는 일을 했다.
초반에는 테러리스트들이 우세한 모습을 보였다. 붉은 여단은 베로나의 남서쪽에 위치한 로비고라는 지역에서 삼엄한 경계를 받던 감옥에서 4명의 단원들을 탈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해가 넘어가면서 연합 작전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82년 1월, 경찰이 밀란과 파도바에서 붉은 여단 단원 4명을 체포했다. 또, 로마 경찰은 명소 '스페인 계단' 에서 2명을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의 차에서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비롯한 무기와 여러 문서 등을 찾아냈다. 이어진 체포 과정 중 로마에서 붉은 여단의 안전가옥 2곳의 급습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서 체포된 10명의 단원 중 붉은 여단의 핵심 인물인 조반니 센자니를 체포했다. 센자니는 또다른 핵심 인물 안토니오 사바스타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사바스타는 도지어를 잡아두고 있었던 단원 중 한명이었기 때문에 수사망은 한층 더 좁아졌다.
활동대가 수집하고 분석한 정보에 따라 북부 이탈리아 도시인 파도바, 베로나, 비첸자 세 곳이 추려졌다. 이 세 곳의 특징은 붉은 여단의 송수신기 신호가 활발한 지역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활동대 팀은 베니스에서 붉은 여단 단원으로 의심되는 인물과 연락을 주고받은 송신기가 있는 요트 하나를 찾았다. 정보를 분석한 결과, 파도바의 구이차라는 지역에서 신호를 수신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요트의 주인은 마리오 프라셀라라는 인물로, 현지에서 존경받는 폐 전문의였다. ISA의 정보 분석가들은 구이차의 가구들의 최근 한달간 전력 사용량을 조사하고 의심스러운 양의 전기가 사용된 가구의 전화를 도청했다.
그 결과 한 8층짜리 아파트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집이 최종 후보지가 되었다. 이 집은 요트 주인인 프라셀라가 그의 딸인 에마누엘라를 위해 빌린 집으로, 이 집은 이웃들로부터 혼자 사는 에마누엘라가 왜 그렇게 많은 양의 식료품과 온갖 신문을 사들고 가는지 의문을 낳던 차였다.
도지어 장군이 이곳에 갇혀 있을 것이 확실해지자, 이탈리아의 경찰 특수부대인 NOCS가 구출 작전에 나서게 됬다. NOCS는 이전에 언급한 이탈리아 전 수상 살해사건 이후로 창설된 경찰 특수부대로, 가죽으로 된 발라클라바를 쓰고 다녀 레더헤드라는 별명을 가졌었다. 작전 개시 당일, 사복 경찰들은 이미 건물의 1층 슈퍼마켓에서 인파에 녹아들었고, 11시가 되자 공사장 인부로 위장한 경찰들이 건물 바깥에서 불도저를 끌면서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레더헤드들이 목표인 건물 2층에 도달하자,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단원 조반니 쿠치를 맞닥뜨렸다. NOCS 대원은 휴대하고 있었던 베레타 M-12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대신 당수로 그를 쓰러트렸는데,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집 안에 있던 사바스타가 눈치를 채 소음 권총을 들고 도지어가 갇힌 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뒷 창문으로 넘어온 경찰이 그의 뒷통수를 가격해 쓰러뜨렸고, 에마누엘라를 포함한 3명의 붉은 여단 단원들은 항복했다.
NOCS 대원들은 총알 한 발 없이 작전을 성공시켰다. 납치된 지 6주만에 도지어 장군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모든 공로를 이탈리아 경찰에게로 돌렸다. 붉은 여단 단원들의 추적에 핵심적이었던 ISA의 신호정보 작전은 비밀로 남았다.
조직의 변화 및 훈련과정
ISA에서 작전을 담당하는 부서는 작전국으로, 작전국은 원래 분석 및 작전국이라는 하나의 참모부로 묶여있었으나 하워드 J. 플로이드 대령이 ISA의 2대 지휘관이 되면서부터 분석국과 작전국으로 쪼개진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작전국은 또다시 작전, SIGINT, 통신 총 3개의 스쿼드론으로 나뉜다.
작전 스쿼드론은 트룹 A, B, C 총 3개의 트룹으로 구성되었다. 작전 스쿼드론은 ISA의 작전에 인력을 제공하는 역할로, 원래 25명의 그린베레 대원으로 시작한 '슈터' 들에 부대가 성장하면서 추가된 '스파이' 들이 포함되어 이루어졌다. 작전 스쿼드론의 한 트룹은 12명에서 1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에는 다수의 전직 그린베레 및 델타포스 대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SIGINT 스쿼드론은 '개발(Exploitation)' 트룹과 직접 지원 트룹으로 이루어졌다. '노브 터너' 들이 SIGINT 스쿼드론에 속했다.
분석국은 ISA의 작전으로 얻은 정보의 습득, 분석, 그리고 전파를 맡았다. 라틴아메리카, 중동 및 북아프리카, 개발 지사로 구성된 연구 및 분석과, 행정과, 위협 관리과가 분석국을 구성했다.
ISA에서 작전을 지원하는 부서는 지원국으로, 이곳에서는 ISA가 사용할 특수 장비를 개발하고 휴민트 대원들이 위장으로 사용할 위조 문서 등을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존 G. 래키 III 대령이 부대의 지휘관을 맡기 시작한 1986년에는 작전, 작전 보안, 분석, 인사 및 행정국 총 4개의 참모부가 있었다. 작전국은 새롭게 추가된 공작, 폭발물, 화기 숙달 및 특수작전 전술 그리고 통신 기술을 훈련시킬 6인의 훈련 팀을 흡수했다.
1987년에는, 트룹 C가 작전 스쿼드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R 분견대를 형성했다.
ISA의 편제 중 가장 최신 버전인 1988년 ISA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ISA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인 인간정보, 또는 휴민트(HUMINT)는 CIA가 국방부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굳게 믿는 분야 중 하나였다. 그만큼 ISA는 CIA의 경계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제리 킹 대령은 CIA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한번은 활동대에서 대원 2명을 버지니아 캠프 피어리에 위치한 CIA의 공작관 훈련시설, 농장(the farm) 으로 위탁교육을 보냈다. 농장으로 교육을 받으러 간 2명은 출발 전에 '기수에서 1등과 2등으로 수료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 이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1등과 2등으로 수료에 성공했고, 5명의 전 CIA 지부장이 참관한 가운데 해외 공작 훈련을 마쳤다. 위탁 교육을 받은 2명의 대원은 환호를 받으며 돌아왔다.
ISA의 모든 후보생들은 각 참모부에서 요구하는 능력에 따라 추려져서 마지막에는 지휘관 제리 킹 대령으로부터 일일히 검토받았다. 일단 선발을 통과하면, 이들의 이전 군 기록은 지워지고 DASR이라는 곳에서 대원들의 인적사항을 관리하게 되었다. DASR이란, 육군 특수 명단 부서(Department of Army Special Roster)의 약어로, DASR에서 대원들의 신상정보가 보호되는 순간 다른 모든 군의 전산 시스템에서 이들의 이름은 사라진다. 시스템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슷하게 델타 포스도 DASR에만 이들의 리스트가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ISA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가리지 않고 지원받았다. 활동대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대원들의 인종이 굉장히 다양했다는 것인데, 이는 의도된 결과로 처음부터 많은 수의 히스패닉, 동양인, 중동 출신의 대원들을 받았다. 다양한 인종의 대원들은 나중에 라틴아메리카나 동남아, 중동 등지에서 수행할 작전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중국적 대원들 중에는 미국 여권과 외국 여권 2개를 보유한 경우도 있어 언더커버 작전을 할때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ISA에서 모집한 다양한 인간정보, 정보분석, 신호정보 등에 특화된 정보 전문가나 해커, 다국어 구사자, 통신 전문가, 또는 전투작전 전문가들은 모두 선발과정(A&S)을 거쳐야만 했다. 선발과정은 당시 육군 내에서도 굉장히 집중적인 편에 속했다. 일반적인 부대들과 다르게 훈련과정은 훈련병들로부터 일체 비밀로 유지되었다. 사소해 보일지라도 이러한 방식은 훈련병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항상 대비해야 하게 만들었다. 제일 먼저 훈련병들은 맨몸으로 네바다에 위치한 사막에 떨어져 특정 작업을 위한 리스트와 장비를 전달받았다. 이들은 리스트에 적힌 작업을 위해 수일동안 잠을 거르며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사막에서 테스트가 끝나면, 이들은 곧바로 이상한 도시에 배치되어 훈련병들의 현장에서 실작전 능력을 시험받았는데, 특정 인물을 따라가는 동시에 훈련병들을 미행하는 다른 요원들의 눈에 걸리지 않게 하는 훈련도 있었다. 이 전체 과정은 한달가량 소모되었다. 주기적으로 50마일(약 80km)을 24시간 안에 완주할 수 있어야 하는 등의 육체적인 능력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셀렉션 과정은 전체적으로 정신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었다. 이들이 셀렉션 과정을 통과하고 나서도 훈련은 끝나지 않고 생존 능력이나 공수훈련, 화기 훈련과 정보원 개발 등의 공작(tradecraft) 기술을 훈련받았다.
"Queens Hunter"
온두라스의 북부 연안 도시 라 세이바의 모든 주민들은 미국인 항공 측량팀이 사는 곳을 알았고 그곳이 삼엄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곳을 침입한다는 멍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시 북쪽의 온두란 항구에서 보이던 미국인들은 보통 현지 바나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퀘벡' 에 사는 사람들만큼 살벌한 경비들을 두고 있지 않았다. '퀘벡' 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끄트머리에 위치한 방 6개짜리의 넓은 집은 파란색 바람막이와 야구모자를 쓰고 우지 기관단총을 든 경비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지키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들과는 대조적으로 퀘벡의 항공 측량팀은 해변가에서 랍스터, 스테이크를 곁들인 바베큐 파티를 하는가 하면 또 정기적으로 도시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놈브레 데 디오스 산맥으로 등산을 나가기도 했다. 경비들은 확실히 미국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라 세이바의 주민들은 우지를 휴대한 무장 경비들이 집 안의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지 주민들의 추측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실제로, 퀘벡은 온갖 기밀장비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퀘벡에 살던 사람들은 항공 측량팀이 아니라 미 육군 정보 지원 활동대의 SIGINT 스쿼드론 대원, '노브 터너' 들이었다. 또한, 퀘벡을 경호하던 무장 경비들은 델타 포스 오퍼레이터들이었다. SEASPRAY 팀이 조종하는 비치크래프트 킹 에어 100이 남부 온두라스까지 가로지르며 무한히 8자비행을 하는 동안 그 안에서 ISA 팀은 엘살바도르의 극좌 반군 연합 게릴라인 FMLN(파리분도 마르티 민족 해방전선) 의 통신들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이 대원들은 이론상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FMLN은 엘살바도르 기독교민주당원 출신 대통령 호세 나폴레온 두아르테의 정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두아르테도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어서 원래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으나, 나중엔 놀랍게도 나름대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엘살바도르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두아르테에게 정보를 제공해 반군을 격퇴할 수 있게 해야 했다. CIA와 NSA는 별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의회조차도 존재를 모르던 활동대는 비밀스럽게 반군 연합의 통신을 가로채며 거의 모든 공격과 매복작전 계획들을 파악해 엘살바도르군 지휘관들을 돕고 있던 육군 특전단에게 제공했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1981년의 엘살바도르는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FMLN이 정부에 최종 공세를 예고하고 정권을 무너뜨릴 기세로 수많은 공격을 가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정부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전 카터 행정부로부터 받은 긴급 지원 군수물자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었다.
1980년 당시 카터 행정부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이 집권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레이건 후보의 선거 운동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이때 선거 캠프 내의 일부 강경파는 극우 데스 스쿼드가 FMLN 반군 퇴치에 효과적일 것이라며 두아르테 정부를 지원할 것을 주장했으나 데스 스쿼드는 이미 7명이나 되는 미국인들을 살해한 전적이 있을뿐더러, 두아르테 정부가 군사정권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의논할 여지도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이후 CIA 국장 빌 케이시가 레이건을 설득해 두아르테와 1982년 3월에 민주적인 선거를 약속하고 그동안 두아르테의 힘을 늘리기 위해 CIA가 친 두아르테파에 지원을 퍼부을 수 있게 하는 국가안보결정지침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
백악관은 50명이 넘는 병력을 엘살바도르로 보냈다. 이들 대부분은 그린베레와 델타 포스 대원들이었고, FID 임무의 일환으로 엘살바도르군에게 중남미와 미국의 기지에서 대반란전 전술을 가르쳤고, 몇몇 장교들은 엘살바도르군 지휘체계에서 군사고문으로 활동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이 단순히 엘살바도르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중앙아메라카, 남아메리카, 나중엔 북아메리카까지 뻗어나갈 것이며 도미노가 무너져내려 미국에 닿기 전에 행동하는 것은 게릴라전으로 인한 불안정화와 혁명이 미국까지 수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엘살바도르의 군사개입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베트남전에서의 악몽도 한몫 했지만, 엘살바도르군 정보장교 출신이 이끄는 극우 데스 스쿼드가 죽인 사람들의 숫자가 FMLN 반군에 의해 죽은 이들의 수를 훨씬 상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살바도르에서의 군사 개입은 FID 전술의 좋은 예시가 되었다. 미군은 FMLN 반군이 현지 주민들과 접촉해 지원을 받거나 인구 대부분이 가난한 점을 이용해 이들을 선동시켜 자신들 편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수많은 소규모 헬리본 순찰대를 매일 띄워보냈다. 그와 동시에 현지 주민들에게 식량과 주거지를 제공해 친정부적인 분위기를 유도했다.
FMLN 반군들은 니카라과 국경을 통해 산디니스타 정권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의 통신을 도청한다면 FMLN과 극우 데스 스쿼드 양쪽 모두에서 방해를 받던 두아르테의 대선 캠페인과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항해 싸우며 CIA의 비밀 지원을 받던 콘트라 반군 모두에게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CIA는 엘살바도르에 많은 공작관들을 배치했지만 반군의 라디오 신호를 가로챌 수단이 없었다. 또한 반군들이 쓰는 통신장비들의 출력이 낮아 NSA의 자산으로 신호를 추적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NSA는 이 일을 육군 정보참모차장 빌 오돔에게 넘겼고, 그가 작전통제권을 갖던 ISA가 이 일을 맡게 되었다.
근접 SIGINT 모니터링이 필요한 이 작전에서 ISA는 공중 플랫폼을 사용하기로 했다. 따라서 ISA는 SEASPRAY의 항공기들을 빌려 작전을 준비했다. SEASPRAY가 동원한 항공기들은 비치크래프트 킹 에어 100으로, 재도색을 하고 민간 항공측량 회사의 로고를 대문짝만하게 박아놓았다. 그다음 항공기들은 이탈리아에서처럼 최신 주파수 스캐닝 라디오 장비들과 방향 탐지장치를 탑재했다. 다만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들 장비는 샌더스 어소시에이츠 사에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는 방산업체 BAE 시스템즈에 매각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샌더스 어소시에이츠 사는 최첨단 통신, 전자도청, 그리고 항공정찰 장비 등의 신호정보에 특화된 회사였다. ISA는 SAP 코드네임으로 샌더스 사와 협력해 윈터 하베스트 작전에서 발견된 장비들의 문제를 줄여나갔다.
원래 계획된 퀸즈 헌터의 작전 일수는 30일로, 두아르테의 선거 준비를 위해 설정된 기간이었으나 나중엔 90일까지 작전 일수가 늘어났다. ISA 팀은 온두라스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산 페드로 술라에 빌린 집을 거점으로 했고, SEASPRAY 조종사들은 호텔에서 묵었다. 퀸즈 헌터 작전은 상상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 작전으로 수많은 반군 은신처들과 엘살바도르로 들어가는 무기 밀수 루트를 찾아냈고 여러 반군의 공격 계획들을 무너뜨렸다.
작전에 동원될 비치크래프트 항공기들은 점점 늘어났고 작전 거점도 산 페드로 술라에서 북쪽의 라 세이바로 옮겨졌다. 보안을 위해 작전의 이름도 'Quiet Falcon' 으로 변경되었다. 항공기들은 하루 6시간씩 엘살바도르와 니키라과 국경을 넘나들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정보들은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군은 물론 CIA와 특전단에게 제공되었고 이 덕분에 최소 15건의 반군의 매복 작전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CIA는 1982년 겨울 볼랜드 수정안이 체결되어 반 산디니스타군에 대한 정보 지원이 금지될때까지 콘트라 반군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넘겼다.
이 작전에서 얻은 정보에 굉장히 만족한 곳은 다름아닌 NSA이었다. ISA가 수집한 정보들은 포트 미드의 NSA 본부에도 중계되었고 작전이 종료된 이후 작성된 NSA의 보고서는 '한 조그만 팀이 니카라과에 대한 전술적 정보의 95%를 생산해 냈다' 라고 기록했다.
또한 이번 작전으로 델타 포스 등의 다른 군 부대들과 함께 하게 된 ISA는 이들 부대들과 유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델타포스와 레인저는 ISA의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ISA의 본부가 워싱턴 DC와 펜타곤에 가까웠기 때문에 ISA를 '버지니아 북부의 비밀 군대(the Secret Army of Northern Virginia)' 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델타 포스 등과 원만한 관계를 맺은 ISA였지만 상부에서 걱정한 것은 퀸즈 헌터 작전에서 SEASPRAY와의 협업에서 일어난 마찰이었다. 산 페드로 술라의 호텔에서 라 세이바로 거점을 옮겨서 더이상 미국 TV에서 방영하던 히트 드라마인 '댈러스' 를 시청하지 못하게 된 SEASPRAY 조종사들을 위해 SOD에서 지름 4.5미터 짜리 값비싼 위성 접시를 구매해 퀘벡의 앞마당에 설치한 것이었다. 위성 접시는 오로지 미국 드라마 시청을 위해 설치되었을 뿐 이미 충분한 작전 통신 지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ISA의 전자감시 팀의 위치를 소련의 감시 위성을 포함해 온 동네에 광고하는 꼴이었다. 설치 해체를 반대한 SOD는 제리 킹 대령이 군 상부에 라 세이바의 위성사진을 첨부해 항의하자 그제서야 위성 접시를 해체했다.
보 그리츠, JSOC, 그리고 POW/MIA
"...1981년 6월쯤... '활동대(The Activity)'의 대원 한 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활동대' 가 머지않아 미군 포로 구출 작전을 인가받기를 희망하고 있고 제가 그 작전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더군요."
-퇴역 그린베레 중령 보 그리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ISA가 깊게 관여된 1980년대의 POW/MIA 사건은 상당한 논란거리이다. POW/MIA 사건의 근간이 되는 정보조차 여러 출처에 따라 전혀 다른 의견이 나오고 사건의 전개 과정 또한 여러 엇갈린 의견이 존재한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1979년 KH-11 키홀 위성과 SR-71 정찰기가 라오스의 놈마랏이라는 지역에 위치한 캠프를 찍은 정찰 사진에서 지면에 "B 52 SOS POW K" 라는 글씨가 써져 있는 것을 확인한 사건이다. 문제의 정찰 사진을 본 사람마다 증언이 다른데, 대체로 '52' 라는 글자는 확실히 식별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한 JSOC 측 관계자로부터 사진에서 어떠한 글씨도 식별할 수 없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건 놈마랏에서 찍힌 사진에 나타난 '52' 라는 숫자는 미군 및 정보 커뮤니티에서 라오스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는 전쟁포로들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52' 라는 숫자는 베트남 전쟁에서 남겨진 전쟁 포로들이 하늘 어딘가에 있을 미국의 정찰 수단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POW/MIA (전쟁포로/실종자) 문제와 관련해서 항공 정찰 사진이 보여준 대로 놈마랏 어딘가에 위치한 포로 수용소에 미군 포로들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현지에서 수집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이 사건에 대해 무려 네 곳에서 작전을 계획하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작전을 펼쳤다.
제일 먼저 라오스에 발을 들인 것은 CIA에서 고용한 라오스 용병들이다. 라오스 용병들은 놈마랏 지역에 미군 전쟁포로들의 흔적을 찾아 다녔지만, 끝내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다음은 JSOC에서 진행한 작전명 'Pocket Change' 이다. 1981년 5월에 실행할 것으로 계획된 포켓 체인지 작전은 라오스에 있을 전쟁 포로들을 델타 포스가 구출하는 것이었다. 태국의 버려진 미군기지에 거점을 둔 이 작전은 태스크 포스 160이 민간 트럭에 리틀버드 헬기를 적재하고 작전지역 근처까지 접근해 헬기들을 조립해 델타 대원들을 태워 구출작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CIA에서 라오스에 전쟁포로들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후술할 보 그리츠 퇴역 중령과 ISA의 계획과 충돌해 이뤄지지 않았다.
세번째 작전은 제임스 "보" 그리츠 퇴역 그린베레 중령의 독자적인 작전인 'Velvet Hammer' 이었다. 보 그리츠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현역이던 시절에 확인한 놈마랏 지역의 위성 사진을 바탕으로 전역한 뒤에 여러 투자자들을 확보해 훈련받은 군 출신자들을 데리고 전쟁포로 구출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군에서 계획 중이던 포켓 체인지 작전에 방해가 될까봐 합참과 DIA에서 보 그리츠에게 작전의 중단을 요구하며 수차례 경고를 주었으나 보 그리츠는 이를 무시하고 직접 동남아시아에 방문하는 등 벨벳 해머 작전의 준비를 계속했다.
마지막은 ISA의 개입이다. 보 그리츠가 'Grand Eagle' 이라고 증언한 이 작전은 보 그리츠의 활동이 ISA의 눈길을 끌면서 시작되었다. ISA는 라오스에 미군 포로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듣고 이들을 구출할 델타 포스 등의 특수작전부대들을 지원할 사항들을 모색하고 있었다. ISA는 막연히 델타 포스같은 부대들이 구출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독자적인 정보 수집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합참에 ISA의 정보 수집 행위들을 보고하지 않았다. 따라서, JSOC와 ISA는 각각 독자적인 전쟁포로 구출작전을 짜면서 서로의 작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ISA는 보 그리츠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지만, 보 그리츠가 가지고 있던(혹은 그렇게 주장하던) 태국 등지에 있는 현지 정보원들에 관심을 가졌다. ISA는 보 그리츠로부터 쓸만한 현지 정보원들을 인수받기 위해 보 그리츠에게 접근해 그에게 자금과 거짓말 탐지기나 통신장비 등을 지원해 보 그리츠가 새로운 작전을 펼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ISA의 문제점은 보 그리츠가 그저 언론의 관심을 받기를 원하는 순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파악했다는 것이다. 보 그리츠가 가진 현지 정보원들의 존재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알려지자 ISA는 보 그리츠에게 지원한 장비들을 되돌려받고 연락을 끊으려고 했으나 보 그리츠로부터 장비를 되돌려받지 못했고 그가 언론에 ISA의 존재를 알릴까봐 연락을 끊지도 못했다.
보 그리츠는 POW/MIA 사건과 관련한 의회 청문회와 언론에게 수많은 ISA 관계자들의 주장과 상반되는 증언을 펼쳤다. 대표적으로 ISA의 지휘관인 제리 킹 대령과 실제로는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으나 수차례 만나 작전에 대해 논의했다거나, ISA를 보 그리츠에게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게 묘사한 것 등이 있었다.
전쟁포로 구출을 맡을 JSOC의 작전은 보 그리츠 때문에 이미 한차례 연기되었으나, 이후에 보 그리츠와 그에게 지원을 퍼붓던 ISA에 대한 내용이 언론에 공개가 되면서 구출 작전은 무산되었다. 의도는 선했을지라도 ISA의 행동은 POW/MIA 사건과 그에 관련된 구출 작전을 망쳐버렸다. ISA의 문제점은 합참에 정보수집 작전을 알리지 않은 것과 섣부르게 보 그리츠에 대한 지원을 이어나간 것이었다.
한때 의회에서조차 존재를 모르고 국방부에서도 소수에게만 알려졌던 비밀 정보부대 ISA는 감찰관의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감찰관의 ISA에 대한 보고서는 ISA가 충분한 감시를 받지 않았던 점을 문제삼았다. 또 보고서는 ISA가 '문제의 소지가 있는 계획을 지원한 것(보 그리츠에 대한 지원)' 에 대해 비난했고, 부대의 예산을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들의 습득에 쓴 것 또한 비난했다. 이부분에서는 ISA에서 반론의 여지가 있었지만,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감찰관의 보고서는 활동대의 명성에 크나큰 악영향을 주었다. 보고서를 본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한달 내에 부대의 해체를 요구했다. 하지만, ISA의 직속 상관이었던 육군 참모차장 빌 오돔 중장의 로비 덕분에 수명을 잠시 연장받았다. 빌 오돔 중장의 로비 덕분에 ISA가 제멋대로인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ISA와 관련된 행정적인 절차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는 의견이 수용되었다. 1982년 5월 26일에 작성된 국방부 차관 프랭크 칼루치의 보고서는 '우리는 우리만의 CIA를 창조한 것처럼 보였지만, 톱시(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출신과 성장과정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여자아이) 처럼, 협조도 통제도 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냈다' 라고 말하는 한편, ISA에게 한달간의 유예기간을 주면서 여러 조건을 내걸고 이를 6월 15일까지 지킬 것을 요구했다.
1983년 중반, 마침내 ISA가 지켜야 할 '헌장' 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ISA가 진행 중인 활동들은 빌 오돔 중장에게 보고되고, 빌 오돔 중장은 다시 의회의 특정 위원회에게 이들을 보고해야 했다. 중요한 점은 헌장이 ISA가 '특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허가했다는 것이었다. '특수 활동' 은 미 대통령이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활동들로,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통과시킨 행정명령 12333에 따라 오직 CIA만이 수행할 수 있었다. 특수 활동은 대통령이 CIA를 제외한 기타 기관이 특수 활동에 더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 이상 오로지 CIA의 것이었으므로, ISA가 특수 활동을 수행할 때는 CIA로부터 허가가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ISA의 인간정보 및 신호정보 작전들은 CIA, 그리고 추가적으로 DIA의 허가를 받고 수행해야 했고, 특히 신호정보 작전은 NSA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했다. 이 헌장의 요점은 ISA의 존재 이유를 '기타 정보기관이나 지원 요소가 부적절하거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에 활동을 수행하도록 하는것' 으로 정의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ISA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매우 어려운 정보 수집 작전이 필요할 때 그 작전을 맡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언론 공개
아이러니하게도 POW/MIA 사건 이후 ISA에 대한 헌장이 만들어졌을 무렵 ISA의 존재는 이미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최초 공개는 워싱턴 포스트의 1983년 4월 24일 기사 'Can Congress Really Check the CIA?(의회는 정말로 CIA를 감시할 수 있는가?)' 이었다. 이 기사의 저자, 제이 피터젤이 워싱턴의 국가안보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서 비밀 공작에 대한 일부 정보들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위 기사에서는 ISA의 존재와 보 그리츠와 POW/MIA 사건에 관해 간단히 다루었다. 더 자세한 내용들은
뉴욕 타임즈의 'Secret Pentagon Intelligence Unit is Disclosed(기밀 펜타곤 정보부대가 드러나다)',
워싱턴 포스트의 'Secret Army Intelligence Unit Lived On After Iran Mission 1980(1980년 이란 미션 이후 존재하는 기밀 육군 정보부대)',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의 'White House to Put Limits on Army's Secret Spy Unit(백악관이 육군의 기밀 스파이 부대에 제한을 가하다)' 에서 다루었다.
모두 1983년 중순에 보도된 이 기사들은 대부분 ISA의 창설부터 엘 살바도르에서의 존재와 보 그리츠 사건, 도지어 장군 구출 작전에 대한 내용까지 담고 있었다.
연이은 언론 공개는 기밀 해제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83년 국가안보연구센터(CNSS)의 정보자유법(FOIA) 에 따른 정보공개 요청에 대해 INSCOM(육군 정보보안사령부)이 '관련된 자료'가 전부 기밀이라고 답변하는 바람에 ISA라는 부대의 존재에 대해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실제로 1984년 9월에 이루어진 재요청에서는 지난 요청에서 육군의 답변이 그 조직(ISA)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는 것임을 지적했다. ISA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련된 자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군은 빠르게 의견을 철회했다. CNSS에 보낸 편지에서 데럴 L. 펙 육군 민사 법무차관보는 INSCOM의 답변이 "그러한 부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고 말했다. 그 편지는 INSCOM이 단순히 "언론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정보부대에 관한 기록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기밀일 것" 이라고 가정을 했을 뿐이며, "존재할 수도 있는 모든 문서에 대해 포괄적인 면제" 를 적용했다는 기괴한 진술을 담고 있었다. 데럴은 "그것이 우리의 설명이고, 우리는 이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라는 말로 편지를 마감했다.
이렇게 보니 시긴트가 많이 발전된 SOG같네
레바논꺼 잘려있던데 길어서 3편행임?
디시 자체의 문제인지 계속 글 잘려서 3부로 업로드하겠음
그나저나 보 그리츠 껀은 저렇게 된거였던건 처음알았내
ㄹㅇ 그동안 에릭 해니 썰 기반으로 작전 사항이 너무 많이 공개 됐다 정도만 알았는데
그 람보 2 모티브가 저거였던가?
정확한건 없지만 저 사건이 83년이고 람보2 촬영이 84년에 시작했으니(각본은 적어도 더 일찍 만들었을테니) 아마 영향을 많이 받긴 했을듯
"당수로 그를 쓰러트렸는데" - 80년대 액션영화가 리얼 고증이었네. 그동안 비웃어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