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내전
1983년 4월 18일 월요일, 고성능 폭약을 실은 주황색 제네럴 모터스 픽업트럭이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자폭 테러였다. 이 거대한 폭발은 63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사망자 중에는 CIA 베이루트 지부장 케네스 하스와 부 지부장, 그리고 11명의 해병대원과 1명의 델타 A 스쿼드론 대원 테리 길든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격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 라디오 방송에서 '이슬람 아말'이라는 레바논의 시아파 아말 민병대의 분파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그 테러리스트 그룹의 지도자는 후세인 무사위로, 이란의 후원을 받는 극단주의자였다. 이슬람 아말은 베카 계곡에 위치한 바알베크 시에 기반해 있었고, 베카 계곡은 시리아 군이 주둔해 있던 곳이었다. 시리아 군은 바알베크 시의 통제권을 이란에게 넘겨주었고, 이란의 혁명수비대는 그 지역에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레바논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국가였다. 기독교 계열인 마론파 기독교, 이슬람 분파인 드루즈파, 그리고 제일 가난하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시아파 무슬림, 적지만 수니파 무슬림까지 한 나라 안에서 살고 있었다. 레바논의 정치 체계는 마론파, 드루즈파, 시아파, 수니파가 인구비례에 따라 나눠갖는 형태였다. 하지만, 가난해진 시아파 무슬림의 증가와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넘어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들어닥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팔레스타인 전투원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은 보복을 가했고 가난한 시아파는 베이루트 남쪽으로 밀려가 판자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있었던 종파간 갈등과 가난이 합쳐저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무슬림 그룹이 동맹을 맺었고, 이에 대항해 레바논 동부와 북부에 강력한 기독교 계열의 팔랑헤 민병대가 창설되었고, 드루즈파도 베이루트 위쪽에 위치한 슈프 산맥에 진보사회당이라는 민병대를 창설했다. 남부의 판자촌과 서부 베이루트를 지배하는 것은 시아파 아말 민병대였다. 이들 사이의 긴장은 1975년에 레바논 내전으로 이어졌다. 무슬림 대 기독교의 양상을 띤 이 내전의 당사자들은 시리아, 사우디, 이라크, 리비아, 이스라엘 등등으로부터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는 무슬림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우세했던 PLO의 세력이 시리아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독교 민병대 쪽으로 레바논 내전에 개입했다. 이 덕분에 레바논 북부와 동부에는 시리아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군도 레바논 내전에 개입했는데,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가 그 원인이었다. 레바논 남부를 차지한 이스라엘군은 얼마 안가 기독교 민병대에게 지역을 양도하고 철수했지만, 4년 뒤 영국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이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공격받자 다시 레바논을 침공하였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2년 레바논으로 해병대를 다국적군의 일부로 보내 베이루트를 떠나고 있던 이스라엘군과 PLO 사이의 완충지대로 기능하게 했다. PLO가 떠나자 해병대도 철수했으나,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였던 바시르 제마엘이 끝내 암살당하자 즉각 레바논으로 돌아왔다. 제마엘의 암살은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인들을 학살하는 보복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공격들과 늘어나는 이란과 시리아의 영향력은 헤즈볼라나 이슬람 아말과 같은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단체들의 창설을 유발했다.
미 국방장관은 미 대사관과 베이루트에 주둔하던 1500명의 해병대에게 유용할 만한 정보들을 검토하기 위해 소규모 ISA 팀을 보냈다. ISA의 부지휘관 캘빈 사사이가 이끄는 5명의 소규모 팀에는 빌 코완이라는 ISA의 해병대 대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베트남에서 해병대로 복무한 빌 코완 중령은 룽삿 특별지구에서 CIA나 육군 정보부대들과 함께 작전을 한 경험 덕분에 정보 세계와 어느정도 접점이 있었다. 1983년, 빌 코완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으나 마침 빌이 해병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ISA 해병대 대표가 얼마 안가 전역을 해서 그의 추천으로 ISA의 해병대 대표직으로 ISA에 들어오게 되었다.
캘빈 사사이의 ISA 팀이 베이루트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현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보 수집 현황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ISA 팀은 충분한 정보가 수집되고 있는지, 어떻게 수집되고 있는지 등을 확인했다. 얼마 안가 ISA 팀은 문제를 발견했다. 4월 대사관 테러로 인해 CIA 베이루트 지부의 최선임 공작관 3명이 사망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연락책과 레바논 내의 다양한 공동체들이나 시리아군에 대한 연결점들도 폭발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베이루트 내의 CIA의 작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ISA 팀은 대사관 직원, CIA, 해병대, 소수의 델타포스, 대사관 보안 직원들, 그리고 레바논군을 훈련시키던 그린베레 팀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과 대화를 하고 다녔다. 또한 ISA 팀은 베이루트 길거리로 나와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의 미국인들에 대한 인식, 레바논에 살던 각기 다른 파벌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점들을 파악하고 다녔다.
활동대가 발견한 정보 부족은 해병대 막사 근처에서 일어났다. 당시 베이루트에는 1500명의 해병대원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주둔 위치가 공격에 너무나 취약할 뿐더러 해병대는 주변 지역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사실, NSA, 영국, 키홀 위성, SR71, CIA 등등 정보는 여러 곳에서 수집되고 있었으나, 이렇게 수집된 정보가 한데 모이지 않고 각자 따로 놀고 있었다. 새로 취임한 CIA 지부장 빌 버클리는 대사관 테러 이후 베이루트 내의 네트워크 재건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나, 다른 기관과의 협조에는 부정적이었다.
캘빈 사사이의 활동대 팀은 미국으로 돌아와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에게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보고해 해결 방안을 기대했지만, 펜타곤 내에서 수많은 반대에 가로막혀 실질적으로 바뀐 점은 없었다. 한편, 레바논에서는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주둔중인 외국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징조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징조는 1983년 10월 23일 아침, 해병대 막사에 대한 테러로 현실화 되었다. 트럭 폭탄이 베이루트 국제공항 근처에 주둔하던 해병대 막사를 강타해 4층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241명의 미군이 사망했다. 두 번째 폭탄은 프랑스군 주둔지에서 폭발해 58명의 프랑스 공수부대원이 사망했다.
해병대 막사 테러 이후 만들어진 위원회에서는 EUCOM(유럽사령부)와 기타 정보기관의 정보 공유 실패와 해병대 막사 주변의 보안 조치 부족을 원인으로 짚었다. 위원회의 보고서에서는 캘빈 사사이의 활동대 팀이 베이루트에서 돌아와 제안했던 '정보 취합 센터' 의 개념을 인용해 현지 지휘관들에게 테러 위협에 대한 정보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레나다 침공-Urgent Fury
1983년 10월 14일, 캐리비안의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강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더 강경한 마르크스주의자들로 교체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섬에 있었던 600명의 미국 의대생들의 안전을 우려해 그레나다 침공을 결정했다. 침공은 해병대 막사 테러 이틀 뒤인 10월 25일에 시작되었다. 침공에는 해병대, 82 공수사단, JSOC의 델타포스, 씰 6팀, 레인저 1, 2대대, TF160, 그리고 Det 1 MACOS가 참여했다. 그레나다군 규모의 10배를 상회하던 미군은 결국 승리하기는 했으나 19명이 사망했고 그 중에는 낙하산을 통한 해상 침투과정에서 사망한 씰 6팀 대원들과 블랙호크 사고로 사망한 레인저 대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작전은 지휘체계의 혼선, 제대로 된 지도도 없는 형편없는 준비, 침공군 간의 통신수단이 거의 없었던 것, 그리고 적절한 정보의 부족으로 방해받았다. 보 그리츠 사건으로 인해 JSOC 사령관, 리처드 숄츠는 그레나다 침공 사전에 ISA가 정찰작전을 준비하는 것을 막았다. 숄츠 장군이 보 그리츠 사건에서 ISA가 델타-그리고 JSOC 의 미션을 빼앗았다고 생각해 ISA나 그 지휘관인 제리 킹 대령도 개인적으로 믿지 못했던 결과였다. ISA의 잘못으로 군 내에서 ISA의 이미지는 추락했고 이는 JSOC과의 불화를 유발하였다.
SOD의 몰락
SEASPRAY와 기타 특수 작전 지원 요소를 담당하던 SOD는 특수작전의 작전보안 요소도 맡았다. SOD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에드 마이어 대장은 다양한 특수작전 부대들의 비밀성을 지킨다는 신념으로 재정적인 부분까지 SOD에 맡기게 되었고, 이것은 마이어 장군이 절대로 원치 않던 결과를 낳았다. SOD는 비밀 특수작전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거짓 지출과 불법 행위, 방만한 운영을 일삼았다.
ISA 만큼이나 CIA와도 자주 협력한 롱호퍼 중령의 SOD는 전 세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그런 작전을 위한 자금은 비밀 계좌와 이름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런 활동을 하는 기밀 부대중 하나인 "Yellow Fruit" 이라는 부대(옐로 프룻은 무작위로 생성된 SAP 코드네임이다.) 는 데일 덩컨이라는 중령에 의해 만들어진 표면상 '기밀 특수 작전 및 정보 요소를 위한 작전 보안과 방첩 지원' 을 하는 부대였다. 서류상 육군에서 전역한 덩컨 중령은 비즈니스 시큐리티 인터내셔널이라는 옐로 프룻의 위장 회사를 만들었다. 이러한 유령 회사를 CIA가 아닌 옐로 프룻이나 SOD같은 군부대에서 운영하는 것은 명백한 연방법 위반이었다.
SOD와 옐로 프룻은 수많은 비밀 예산을 의회나 펜타곤에 보고 없이 극소수의 관리들에게만 알리거나 부대의 지출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고, 기밀이라는 명분으로 비리를 저지르는 등 비밀리에 느슨한 운영을 했다. 한편 CIA 국장 빌 케이시는 롱호퍼 중령의 SOD가 비밀리에 어디든 무기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높게 사 그 능력을 콘트라 반군 지원에 사용하도록 SOD와 옐로 프룻을 스카우트했다. 이란-콘트라 작전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그 밖에도 옐로 프룻은 방첩활동이라는 명분으로 델타포스나 ISA같은 특수작전부대들을 대상으로 간첩활동을 했고, 위장회사인 비즈니스 시큐리티 인터네셔널의 사무실에서는 ISA와 관련된 일급 기밀 문서가 시설 보수 작업을 하던 민간인들도 쉽게 꺼내 볼 수 있는 서랍에 놓여있는 등 보안 문제도 있었다. 두번째 사건은 ISA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고, 이는 INSCOM 사령관의 귀까지 흘러들어가 즉각적인 수사가 진행되었다. 수사를 통해 SOD와 옐로 프룻의 만행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SOD와 옐로 프룻이 얼마 안가 법정 소송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SOD와 옐로 프룻에 대한 조사에는 법무부도 합세하기 시작했다. SOD의 강력한 지지자 에드 마이어 대장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퇴직했기 때문에, SOD의 뒤를 받쳐줄 그 누구도 남지 않았다. 조사 결과 SOD, 옐로 프룻의 지휘관 롱호퍼, 덩컨 중령도 상관없이 수많은 옐로 프룻 대원들이 법무부의 수사대상이 되었고, 롱호퍼 중령은 직무유기 혐의로 2년형을, 덩컨 중령은 사기 지출 청구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조사는 확장되어 델타포스, 씰 6팀, ISA까지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다. 델타 포스에서만 수십 명이 수사를 받았다. 2명의 ISA 대원들도 부대의 예산과 관련된 횡령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특수작전부대들에 대한 평판이 굉장히 나빠졌고, 그중에서 ISA가 제일 비밀스러운 부대였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 가장 많이 받게 되었다. 마이어 대장이 제일 바라지 않던 기밀 부대의 언론 노출이 이루어졌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SOD의 활동에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고 인정했다. 그나마 ISA에게 좋은 소식은 SOD의 몰락 덕분에 SOD의 항공 자산 SEASPRAY가 ISA 소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ISA의 새 항공 유닛은 Flight Concepts Division(항공개념부)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SEASPRAY 라는 기존의 SAP 코드네임은 'QUASAR TALENT' 라는 새로운 코드네임이 대신했다.
TWA 847 하이재킹
1985년 6월 14일에 일어난 헤즈볼라의 TWA 847편 하이재킹 사건은 JSOC와 ISA 모두에게 뼈아픈 결과를 낳았다. 먼저, JSOC은 태스크 포스를 즉각 배치시킬 특수작전용 항공기와 승무원이 없어 15일이 되어서야 시고넬라 비행장으로 배치시킬 수 있었다. 작전이 지연되자 델타포스가 작전 수행을 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작전 스쿼드론의 직접타격 팀 일부를 민항기에 태워보낼 계획을 세웠던 ISA는 DIA의 허가를 받고 추가로 SIGINT 스쿼드론 대원 일부를 포함해 키프로스의 아크로티리 공군기지로 위치를 옮긴 JSOC 태스크 포스에 합류시켰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육군참모총장 존 위컴과 참모차장 맥스웰 서먼은 분노해 ISA가 작전을 수행하기 21일 전에 통보를 하지 않으면 모든 대원들이 알링턴의 ISA 본부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극단적인 명령을 내렸다. 델타와 씰 6팀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미리 작전지역에 나와 있어야 하는 ISA의 입장에서 이런 명령은 아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았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사항이었던 이스라엘에 수감된 700명의 시아파 죄수들의 석방을 들어주며 일단락된 TWA 847편 하이재킹 사건은 JSOC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JSOC 사령관 칼 스타이너가 합참에 불만사항을 강력히 주장한 덕분에 얼마 안가 C-141 수송기 몇 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ISA는 21일 전에 통보를 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최대 7명의 육군 변호사들에게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했어야 했다. 이 때문에 ISA의 지휘관 하워드 플로이드 대령은 항의하는 의미로 그당시 ISA를 담당하던 INSCOM의 사령관에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ISA를 비활성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적어 보냈다. INSCOM은 ISA의 해체에 관한 사항을 육군 정보참모차장에게 보냈지만 'ISA의 해체가 시스템에 악영향을 끼칠 것' 이라고 우려한 군 선임 장교에 의해 거부당했다.
레바논 인질 위기
위 사진은 헤즈볼라에 의해 인질로 잡힌 미국인 중 3명으로, 왼쪽부터 순서대로 로렌스 젠코 목사, CIA 지부장 빌 버클리, AP뉴스 중동 특파원 테리 앤더슨의 사진이다.
1985년 9월까지 레바논을 기반으로 한 테러리스트 집단들은 총 7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실제로는 6명이었다. 인질 중 한명이던 빌 버클리 CIA 지부장이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빌 버클리가 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하는 대신 자신들이 처형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특수작전 커뮤니티 내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당시 ISA 대원이던 빌 코완의 말처럼 특수작전 커뮤니티, 특히 ISA는 빌 버클리의 구조에 매우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이 실행되는 것을 막은 것은 백악관이었다. 미국은 레바논에서의 인질 위기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NSC의 올리버 노스 해병대 중령이 기획한 해결책은 이란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훗날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불릴 이 해결책은 이란에 무기를 공급하는 대가로 이란과 연계된 레바논 테러리스트 집단을 설득해 인질을 석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빌 버클리가 사망했을 때는 100대의 토우 대전차 미사일이 이란으로 넘어간 뒤였다. 400대가 이란에 들어간 9월 중순이 되자 이란은 1명의 인질을 석방시켰다. 석방된 인질, 벤자민 위어 목사는 9월 14일 델타포스 대원 1명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항공모함에 도착했다.
1985년 10월, ISA는 레바논에 잡혀 있는 인질들의 구출 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정보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ISA 대원들이 향한 곳은 레바논이 아닌 워싱턴이었다. ISA 대원 폴 던바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레바논인 '미셸' 을 찾았다. 미셸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본국인 레바논에서의 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셸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내부에 한 소식통을 알고 있었다. 폴과 미셸이 처음 접촉한 것은 전화통화를 통해서였다. 다음날 크리스털 시티의 바에서 다시 미셸을 만난 폴은 자신을 미 정부에서 대표로 나왔다고 소개했다. 폴과의 대화를 통해 미셸은 그가 미셸과 친한 레바논 내의 소식통, '샤몬'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바논 안팎에 다양한 정보원들을 가지고 있던 샤몬이라는 인물은 기독교 계열 민병대 '레바논의 힘' 의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써 이스라엘의 모사드, 프랑스의 DGSE 같은 정보기관과의 상호 협력을 이끌어내면서 레바논의 힘 민병대의 대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미셸은 의문이 생겼다. 샤몬은 CIA나 DIA와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미 정부 대표'는 왜 그러한 루트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찿아온 것인가? 폴은 2주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바에서 미셸을 다시 만나 자신들이 대테러 활동에 관여되어 있고 레바논 내의 테러리스트 집단들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폴과 그의 동료들이 레바논에 인질로 잡혀있는 미국인들을 찾고 싶어한다는 것이 확실시되자, 미셸은 레바논에 있던 샤몬과 상의했고 샤몬은 직접 워싱턴으로 와 미스터리한 미 정부 대표 폴 던바를 만나보기로 했다.
미셸, 샤몬, 폴, 그리고 동료 ISA 대원이 한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도착한 호텔은 실제로는 샤몬이 나온 공항에서 5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공항에서 나온 샤몬을 태운 일행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세번이나 타고 있던 차를 바꾸고 같은 장소를 몇바퀴씩 도는 등 아무도 이들을 추적할 수 없도록 행동했다. 샤몬과 미셸이 보기에 이들은 보안에 미친 것 같았다. 도착한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폴의 상관들이었다. 스위트룸에서 진행된 샤몬과 ISA 대원들간의 질의응답은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는듯 싶었으나 어느순간부터 샤몬은 어떤 인물이 어떤 집단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어느정도 위치에 있는지 등의 질문에 열심히 답변하고 있었다. 샤몬이 ISA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검증되었다. ISA의 스파이 네트워크, "Felix" 의 중심축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칼 스타이너 소장과 JSOC 태스크포스는 9월 초에 이미 키프로스의 아크로티리 공군기지에서 인질 구조작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86년이 되면서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다는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비밀리에 이란에게 지속적으로 무기를 공급하며 인질 협상 문제를 해결하려고 있었다. 1986년에 접어들면서 ISA의 펠릭스 네트워크는 레바논의 힘 민병대의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펠릭스 네트워크에서 수집된 첩보는 ISA 뿐만 아니라 CIA와 NSA로도 보고되었고, 수집된 첩보가 가리키는 위치를 스파이 위성을 통해 검증되었다. 레바논의 힘 민병대는 레바논 내의 많은 종교단체들에 정보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을 통해 인질들이 두곳의 장소에 위치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인질들은 베카 계곡에 위치한 브리탈이라는 지역과, 바알베크 시에 위치한 셰이크 압둘라 막사에 위치해 있었다.
1986년 5월, ISA 본부에 인질들이 하크라크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팩스가 도착했다. 팩스에는 죄수 및 외국인 인질들이 하크라크 지역의 헤즈볼라군 주둔지로 옮겨졌고, 이는 리아드라는 정보원으로부터 사실임을 검증받았다고 적혀있었다. ISA는 레바논으로 대원 몇 명을 보내 인질 구출작전을 준비했다. 한편, 올리버 노스 중령은 조용히 테헤란을 방문해 이란 고위급 인사들과 만나 인질 협상을 했다. 헤즈볼라는 미국의 리비아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들 중 3명을 처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란 측에서는 더 많은 미사일을 보내야 인질들의 석방이 있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슬슬 인질과 무기를 교환하는 해결책이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믿기 시작했다.
ISA와 펠릭스 네트워크는 계속해서 인질들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6월이 되자 펠릭스 네트워크의 레바논 정보원에 의해 인질들이 바알베크 지역의 미크라크 요새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본부가 위치한 브리탈 지역으로 옮겨졌다는 정보를 얻었다. 스파이 위성은 브리탈 지역에 감시를 집중했고, 인질들이 위치한 건물과 좌표까지 파악되었다. 펠릭스 네트워크는 수백장의 분량에 달하는 정보 보고서를 매주 생산해냈고, 이들은 CIA, NSA, NSC, 그리고 국무부로도 전달되었다. 펠릭스 네트워크는 레바논 내의 팔레스타인, 시아파, 리비아 정보원, 이란 정보원, 시리아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까지 추적했다. 워싱턴에서는 펠릭스 네트워크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품었지만, 스파이 위성으로 검증한 결과 펠릭스는 상당한 정확성을 보였다.
6월 말, 인질들은 또다시 아르살이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키프로스를 통해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 본거지인 주니에에 침투한 활동대 대원은 민병대원들과 함께 인질 구조 작전을 실행할 지역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아르살은 바알베크에서 북동쪽으로 27km 가량 떨어져 있었고 시리아 국경과의 거리는 12km로 꽤 가까웠다. '개비' 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린 이 활동대 대원은 레바논의 힘 민병대와 10일가량 레바논에 머물며 펠릭스 네트워크의 정보원들의 신뢰성을 평가하고 작전 지역 인근을 정찰했다. 개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구조작전에 방해가 될 요소는 크게 두가지였다. 첫번째 요소는 고압 전선이었다. 작전지역을 그대로 통과하는 고압 전선은 헬리콥터가 충분히 작전지역에 가까이 접근할수 없게 할 수 있었다. 두번째 요소는 아르살의 동쪽으로 6km 떨어진 지역의 시리아군 레이더 기지였다.
한편 JSOC은 레바논에서의 인질 구출작전을 위해 넬리스 공군기지, 51구역에서 작전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1985년, 인질들이 베카 계곡에 있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JSOC 태스크 포스는 인근 지역의 레이더 기지 위치를 전부 받아와 그대로 훈련시설에 적용시켰다. TF 160의 침투 계획은 야간에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뒤 시리아 방공망에 걸리지 않게끔 저공비행을 해 베카 계곡까지 침투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리허설에서는 헬리콥터 중 한대가 조금 높게 날아 레이더에 걸렸으나, 두번째 시도에서는 레이더 운용 인원들이 아무런 눈치를 못 채고 작전지역까지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칼 스타이너 JSOC 사령관은 이 결과를 가지고 펜타곤의 회의론자들에게 JSOC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인질들의 정확한 위치에 관한 정보였다. 칼 스타이너에 따르면, 작전 실행에 제일 가까웠던 순간은 벤자민 위어 목사가 풀려났던 1985년 9월에서 몇 달 뒤의 시점으로, 정보 커뮤니티에서 인질들이 서부 베이루트에 위치한 한 건물을 특정해 냈을때라고 했다. JSOC은 미국에서 인질들이 같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과 비슷한 건물을 찾아 훈련을 진행했지만, 작전 디데이 2주 전에 헤즈볼라에 의해 레바논 내의 정보원들이 발각당해 취소되었다.
1986년,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군사작전 준비 명령이 떨어진 뒤, 6월, JSOC와 ISA는 'Quiz Icing' 이라는 인질 구출 작전을 위한 훈련을 6월 6일부터 15일까지 9일간 진행했다. ISA가 맡은 파트는 인간정보 및 신호정보와 인질 구출 팀의 침투, 퇴출루트 확보였다. 같은 기간 이란과의 밀담 또한 계속 진행중이었는데, 이란 측은 미국에게 곧 인질 1명을 석방시킬 것이라고 통보한 뒤 인질 중 1명이었던 젠코 목사를 베이루트의 남부 교외에 있던 다른 인질들과 분리시켜 베카 계곡으로 옮긴 뒤, 7월 26일 석방시켰다. 석방된 젠코 목사는 국가안보보좌관 존 포인덱스터에게 빌 버클리가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처형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병에 의해 사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8월, ISA는 본부를 알링턴에서 포트 벨보어로 옮겨졌고, 플로이드 대령의 뒤를 이어 존 G. 래키 III 대령이 ISA의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또한 8월과 9월 사이에 진행될 인질 구출 작전 'Round Bottle' 을 위해 펠릭스 네트워크는 인질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헤즈볼라가 이동시키는 인질들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작전을 위해 펠릭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보자산이 베이루트와 베카 계곡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크리스탈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던 KH-11 키홀 위성은 인질들이 있는 지역의 자세한 이미지를 제공했고, NSA는 아프리카 위에 떠있는 볼텍스 스파이 위성과 인근 미 대사관에 자리잡은 CIA-NSA 합동 SIGINT 수집팀인 SCS(특별 수집 서비스), 키프로스 동쪽에 위치한 아요스니콜라오스 영국군 SIGINT 수집기지 등의 다양한 자산을 통해 전화 통화나 라디오 신호를 감시했다.
라운드 보틀 작전에 참여할 60명 가량의 델타포스와 씰 6팀 대원들은 미 해군 함선에 승선해 키프로스 북쪽에서 기독교 민병대 소유의 화물선에 옮겨 탄 뒤, 소형 보트 두대에 나눠 탈 것이었다. 구출부대는 그다음 레바논의 힘 민병대가 관리하는 항구에 평상복 차림으로 내려 장비를 받고, ISA 팀의 지휘 하에 레바논의 힘 민병대가 이들을 싣고 베이루트 동부로 이동할 것이다. 인질들은 두군데에 나뉘어 갇혀 있었다. 따라서 구출부대는 세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비르 엘 아베드에 있는 인질들을 구하고, 한 팀은 베카 계곡에 있는 셰이크 압둘라 막사에 갇힌 인질들을 구할 것이었다. 나머지 한 팀은 백업용으로 남아있도록 했다. 구출부대가 탈 차량은 헤즈볼라 아말 민병대의 마크가 그려진 SUV로, 활동대는 구출부대원들을 위한 위조 신분증을 준비해 이들을 현지 민병대처럼 위장시키려고 했다. 각 팀은 ISA의 가이드에 따라 작전지역에 도착해 작전을 수행할 것이었다.
비르 엘 아베드와 바알베크에서의 작전은 동시에 진행하도록 하였다. 개비의 정찰 작전과 무기 거래로 풀려난 인질인 젠코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인질들을 둘러싼 경비 병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인질들을 구출하면 비르 엘 아베드의 델타포스는 해안가로 이동해 대기하고 있던 ISA 팀과 만나 보트 또는 헬리콥터를 이용해 지중해 연안에서 대기중인 미해군 함선으로 퇴출하고, 셰이크 압둘라 막사의 구출팀은 또한 해안가로 이동할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협조로 이스라엘군 헬리본 부대가 구출부대를 퇴출시킬 것이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이란과의 무기 거래 때문이었다. 두명의 인질을 풀어준 헤즈볼라는 9월 9일, 레바논 국제학교 교장 프랭크 리드를 납치했고, 12일에는 또다른 인질 조셉 시시피오를 납치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란과의 협상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채널인 하셰미 라프산자니 이란 의회 의장의 조카와의 협상으로 무기-인질 교환 정책을 이어나갔다. 한편 활동대는 인질 구출 작전과 관련된 활동을 중지하도록 명령받았고, 레바논의 힘 민병대와의 접촉도 중단되었다. 이스라엘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약화시키기 위해 미국이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적극 찬성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심지어 미국에게 니카라과 반군을 위해 노획한 소련군 군수물자를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란-콘트라 사건이 언론에 폭로되어 버리자, NSC는 ISA에게 라운드 보틀 작전 계획을 재개할 것을 명령했고, 펠릭스 네트워크는 베카 계곡에 위치한 동굴과 막사에 3명의 인질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두 명의 ISA 대원이 레바논으로 보내져 작전 준비를 하였으나, 다시 중단 명령이 떨어졌다. 작전이 또 중단된 이유는 올리버 노스 중령이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해 라프산자니의 조카에게서 2명의 미국인 인질을 석방할 것이라고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이란과의 무기 거래를 통한 협상책도 문제가 생겼다. 미국이 다른 채널을 통해 인질 협상을 시도하자 기존에 미국과 연락을 취하던 이란 협상가들은 불만을 품고 레바논 현지 언론에 관련 내용을 누출시켜 버린 것이다. 약속한 대로 2명의 미국인 인질이 풀려났으나, 라프산자니가 로버트 맥팔레인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인질 협상을 위해 테헤란을 방문했던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해버렸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국무부와 펜타곤은 자신들을 변호하기 바빴다.
해체
ISA는 비밀 정보부대라는 명성에 맞지 않게 상당한 언론 노출을 받았다. ISA의 존재는 1983년에 이미 많은 언론사를 통해 밝혀졌다. 1987년, 뉴욕타임즈의 기자 시모어 M. 허시는 ISA와 SOD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기사를 보도했고, 1988년에는 ISA 소속 소령 한 명이 부대의 무기들을 사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무기 수량에 대해 거짓 보고를 하여 기소된 사실이 언론에 실렸다.
1989년 3월 16일, INSCOM 사령관 스탠리 하이먼은 ISA의 "종료"를 명령하며 기존 부대의 자산들의 처분은 육군 지침에 따라 이루어질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3월 31일 INSCOM 사령관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NSA 국장, JSOC 사령관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들에게 ISA의 종료와 함께 ISA가 마지막으로 사용하고 있던 SAP 코드네임인 'GRANTOR SHADOW'의 종료를 알렸고, 1989년 3월 31일로부터 24시간 뒤 시점부터 미 육군 정보 지원 활동대, 또는 'USAISA' 가 중단될 것이며 이 시간 이후로 'USAISA', 'ISA' 라는 단어가 어떠한 통신이나 서신에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1989년 3월 31일, ISA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디시 문제인지 원래 2부로 계획했던 부분을 부득이하게 두개로 나눠서 3부로 따로 업로드하게 되었음.
그린베레쪽으로 해서 타격팀 있고 첩보활동이 주목적인거 따지면 SOG와 비슷한거 같긴한데 NSA, CIA쪽에 더 가까운건가
ISA가 JSOC로 넘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느낌이 강했음. 현재도 ISA의 SIGINT 부분은 NSA에서 편성하는 예산이 담당함.
JSOC 이후로는 분위기 바뀜?
2001년에 럼스펠드가 JSOC의 작전 시연을 보고서는 감명을 쎄게 받아버려서 JSOC를 GWOT 최전선(아프가니스탄)에 투입시키려니까 제약 사항이 좀 있었음. 그중에 하나가 국방부 내의 정보 부족이었는데 이때 럼스펠드의 눈에 들어온게 ISA였음. 그래서 럼스펠드는 ISA를 JSOC랑 더 가깝게 두라고 지시하고 예산도 늘려주고...
나중엔(2002년인가) ISA를 JSOC 밑으로 두라고 지시해서 04년쯤에 ISA가 JSOC 소속으로 들어갔음. JSOC으로 들어간 뒤에는 직접타격 자산에도 투자 하고 JSOC ISR 함대에 ISA 자체 항공자산을 포함시키는 등 JSOC이랑 직접적인 교류가 잦아졌음. 예전에는 JSOC이랑 작전을 해도 조금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던 것 같았음
예전처럼 정보 중시를 하되 JSOC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슈터쪽 비중도 커졌다라 보면 되는건가
그렇다고 보면 됨
재미있게 봤음 개추! 혹시 출처는 어디인거? 이런 내용들 관심은 많은데 어디서 찾아서 볼수있는지 몰라서 글 올라올때까지 기다리네 ㅠ ㅋㅋㅋ
출처는 대부분 마이클 스미스의 Killer Elite 라는 책에서 가져왔음. 80, 90년대의 ISA에 대한 내용은 대체로 정확한 반면에 테러와의 전쟁 이후로는 뇌피셜 수준으로 신뢰도가 급하락함. 2000년대 이후의 ISA에 관한 내용은 Relentless Strike 라는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함. JSOC에 관한 책인데 ISA에 대한 설명도 잘되어있음.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잼난 글 부탁할께요
재미있게 봤음 근데 ISA 는 미국의 정보협동체에도 포함 안 되고 그렇다고 DIA 의 밑이라고도 볼 수 없고 특수전부대에서 정보전을 담당하는 부서 정도로 봐야하는건가? 보다보면 애매한 부분이 있음
일종의 전략자산 취급을 받는다고 함. NSA랑도 친한데 NSA에서는 자기네들이 하는 국가 차원의 미션에 ISA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