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항상 슬프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워 해야만 성공한다.txt


슬픔이라는 그 감정을 겉으로 잠깐 느낄때에는 찌질하다고들 하는데.



그리고 이런 감정을 타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 뭔가 뒤틀려도 한참 뒤틀렸다. 배경이 안좋은가봐.


이런식으로들 생각을 하는데.


오히려 한심스러운 소리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남에게 드러내 보일때에 그때 비로소 약점이 되고 찌질한것이지.


나 혼자서 삭히는 순간에는 그 순간에 슬픔과 우울함이라는 감정이 비로소 진짜 진가를 발휘한다.


슬픔과 우울함의 대상이 비로소 나 혼자일때,


남을 탓하는게 아니라 그 대상이 바로 나 스스로일때 비로소 슬픔과 우울함 비참함이라는 감정이 진가를 발휘한다.




나도 나름대로 골방에 틀어박혀서 자폐증 환자처럼 일에만 몰두하고 내 관심사에만 몰두하는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고.


나를 어떻게 드라마에 빠뜨려서 그 안에 가둬야 하는지.


나를 어떻게 휩쓸리지 않게 일에 몰두하게 할수있는지.


가능한의 메뉴얼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무슨 의지 타령을 하고 불굴의 열정 타령을 하는데.


그건 진짜 웃기는 말이고.


마치 그건 뭐냐하면, 농사를 할때 논밭을 일구려면 쟁기로 갈고 씨앗을 뿌리고 1년에 2모작 3모작을 준비하고 논을 가꾸고 이런 구체적인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완성이 됨에도 불구하고


"아 그냥 열심히 하는거야"


이러면서 모든 그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공정을 얼버무리는것과 같다.


진짜 내가 가장 가장 싫어하는 태도야. 그렇게 추상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얼버무려버리는것들.



사실 나를 스스로 다루는 구체적인 메뉴얼은 존재한다.


사람이 열심히 몰두할때에 생기는 그 감정이 무엇일것같나.



집중력. 고양감. 용기. 열정.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건 '몰입'이 진행이 되는 한창 중간의 얘기고.


그 몰입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첫발 첫단추는 슬픔과 우울함 비참함의 감정이다.


슬픔이라는 과정의 근본이 무엇이냐. 비참함. 우울함. 비명. 괴성.


정말로 밑바닥중에 가장 밑바닥인 구석중의 구석의 감정들.


동물들을 도축하는 장면들을 보면, 그 짐승들도 죽기 직전 괴성을 지른다.


짐승과 사람이 다르지만, 정말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지 사람이 그 동물의 괴성을 들을때 절실히 그 동물의 감정을 느낄수 있다.


돼지이건 소건 쥐건 죽기 직전의 그런 비명은 마찬가지야.


그런식의 죽기직전 괴성. 비명. 고통의 단말마. 절규. 슬픔.


이런 감정들은 그 궤를 같이한다.


"나 죽기 싫어요 죽게 생겼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단지 절규와 비명은 그 아주 그 농도가 진하고 발현 시간이 짧지만,


슬픔과 우울함 비참함은 템포가 조금 느리면서 오래 갈 뿐이다.


여기에서 궤를 같이한다는것에 포인트를 둬야한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생명의 생존에 가장 밀접한 인간 감정이라는 것이다.


죽기 직전의 그 처절한 감정에서 파생된 감정이 바로 슬픔 비참함 이라는 감정이다.


인간이 느끼는 다른 모든 종류의 감정들, 설렘, 기쁨, 환희, 기대, 걱정, 실망, 고양감, 자랑스러움, 등의 감정들과 비교했을때


죽음과 가장 그 거리가 가까운 감정이 슬픔과 비참함 절규 따위의 감정이다.


단지 절규는 내 눈앞에 정말 칼이 닥쳐오면서 내 목을 자를듯할때에 그 때 느껴지는 감정이지만.


슬픔과 비참함은 내 현실의 모습을 직시하고있을때에 그리고 곧 죽음과도 같은 상황이 바로 눈앞에 왔다는것을 감지하였을때에,


그때 느린 템포로 생성된다.



이게 단지 형식적인 뇌피셜의 이론이고 아주 고지식한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슬픔의 감정이 배경에 깔릴때, 비로소 나는 굴러갈수있는것이다.


"제발 나를 도와줘 나를 살려줘" 라면서 슬픔과 같은 '느린 절규' 를 하게 되지만,


내 주위에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고 이 텅빈 공간에 나만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될때,


그때 다시 일하게 되는거다.


경사로에 멈춰있는 구슬에 윤활유를 뿌려줘 다시 굴러가게 할뿐이다.




여기에서 몇가지 질문과 반문을 할수 있을텐데.



사람의 감정과 그 쓰임새, 특징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소위 말하는 용기와 자신감. 믿음 이라는 감정들로 긍정적인 미사여구를 붙이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실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들여다보지를 않고 그냥 그냥 대충 넘기는데.


사실 실상은,


특히 '용기' 라는 인간 감정은, 일시적인 대상을 만났을때 짧은 시간에 확신을 갖고 어려운 대상에게 움직이는것이 용기이고.


전쟁터에서 잠깐 몇분 충돌할때 흥분감과 동반하여 고양되어서 쓰일 필요가 있는 그런 감정이 용기다.


열정도 마찬가지다. 열정은 너무나 포괄적인 대상을 겸하는것이 문제다.


실제로는 열정열정하지만,


그냥 여느 다큐멘터리에서 그 숱한 열정 강조하듯이, 태릉선수촌에서 사람들 운동하고 땀흘리는 그 장면만 찍어다가 '열정' 따위 운운한다면,


그냥 5살짜리 애이던 200키로 초고도비만 파오후이던 하루에 2분 운동 잠깐하고 땀 흘리면서 헉헉거리는 장면 그 잠깐만 찍어둬 '열정'이라고 갖다붙일수 있는것이다.


실제에서는,


당신이 정기적으로 하루 몇시가 이상씩 공부를 해서 고시를 붙는걸 목표로 하던,


아니면 하루 몇시간이상 몇년씩 투자해서 살을 빼고 몸을 가꾸던간에,


아니면 하루 19시간 일에 미쳐서 완전한 일중독자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게 목적이던,


실제에서 필요로 하는 감정은 '용기' '자신감' 따위보다는 비교할수도 없이 굉장히 무겁고 느리다.




일이라는게 어려운 이유는.


굉장히 오랜시간을 질척거리는 변수가 많은 현실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서 가야한다는것이고.


그 가는 길중에, 대개 맞닥드리는 경우란, A 이라는 루트를 통과하여 도착하면 B 라는 보상을 받을수 있겠다 이론을 세우고,


막상 그 길을 가다보면 A-1 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되고, 시간은 지체되게 된다.

그리고 그 A-1이라는 문제 안에 예기치 않은 또다른 문제 A-1-1을 만나게 되고,


A-1-1 안에서 또 다른 다른 문제 A-1-1-1 을 만나게 된다.


또한 만약에 그런 숱하디 숱한 장애물 A-2-1 , A-2-6 , A-3-1, A-4 따위의 무수한 예기치 못한 문제들과 장애물을 뚫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가정을 한들,


실제로 이론대로 B라는 보상을 얻는게 아니라 A+59 아니면 B-27 같은 엉뚱한 현실을 발견하게 될수 있는것이다.


맞닥드릴 현실이란 절대로 용기 자신감 열정 패기 노력 이따위 추상적인 쓰레기 언어들로 포괄되고 정의될수있는게 아니다.


굉장히 오랜시간, 얼마동안의 시간동안에 이 과제를 달성할수 있느냐를 놓고,


수많은 요소로 매일같이 컨디션이 달라지는 당신을 상대로 매일 각기 다른 함정으로 괴롭히면서, 당신이 한번 헛발질하거나 루트 잘못가면 조지는 게임이다.


숱한 사람들이 머릿속의 그 잘난 이론만 가지고, "아 이거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되겠는데?" 하지만, 실제로 성취하는 사람은 1000명중에서 1명도 안된다.


500명은 순전히 자기만 똑똑하다는 고양감을 느끼는 용도로 이론만 곱씹어보고 귀찮다고 시도도안하고,


499명은 시도했다가 시간 돈 에너지 세가지 요소 전부 다 버리고 도중포기 실패로 끝나는 사람들이야.


인생에서, 그런 비루하고 추상적인 쓰레기같은 이론을 가지고 마치 이미 성취를 한 양 자랑스러워하는 인간들을 비웃는듯한 실제의 현실의 일들이,


인생을 사는 수십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일어날거다. 그 목표가 돈이던 일이던 인간관계이던간에. 끊임없이 끊임없이 일어날거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을 할때에, 그 첫단추가 대개는 두가지의 감정인데.


긍정적인 용기 희망 기대" 아니면 "아 이거 아니면 진짜 나 인생 조진다"


그 특유의 탄성과 끈기는 긍정적인 결과를 깔고 갔다가 한번 장벽이나 장애물에 부닺힐때 실망하고 돌아올법한 그런 긍정적인게 아니라,


"아 나 이거 아니면 진짜 자살한다" 이게 더 탄성있게 쉽사리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않은채 쫀쫀하게 오래 간다.


"긍정적인 용기 희망 기대" 이따위 감정은 5살 어린이때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나 부모님이 포장해주는 선물 뜯으면서 느끼는 감정이지.


요행 바라면서 "긍정적인 용기 희망 기대"  이따위 단어로 좋게 포장하라고 쓰는 정신승리하면서 감정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소유하고 자기 스스로를 증명하는 과업이며 과정이다.


처음부터 탄생이 비참한 장애인이라면 이런 극단적인 얘기는 해당 안되겠지만


이를 부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스스로의 증명 과정을 생략하고 비루한 요행만을 바라며 삶에 핑계를 댄다.


자기자신의 삶에서 자기 스스로를 증명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그것은 특권이며 사명이다.


이 한번 사는 삶에서 숱한 몇십억명의 사람중 이 과업을 수행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야 만이 진실로 그 스스로의 인생을 소유하게 되는것이고,


그 때 그 순간, 남이 더 돈많은집안에서 태어났다거나, 잘생겼다거나, 선천적으로 잘났다 못났다 따위의 요소들은 중요하지 않다.


나를 증명하는 과업을 포기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음에도 본인의 인생을 본인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들러리로 살기를 스스로 자인하며 천명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죽어도 좋다. 그런데 웃긴점은 죽어봤자 당신을 향해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슬퍼해주지 않을것이며, 종래에는 땅에 묻히거나 었었음에도 없었듯이 사라질뿐이다.


돈많고 잘나고 아니면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자수성가 하는 사람도 종래에는 이슬로 먼지로 흙으로 사라지지만


진짜 나의 육신과 실물이 그렇게 결말을 맡는것과는 별개로,


진짜 차이점은, 내가 눈떠있고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의 단 한번의 삶 동안에, 내가 한번이라도 내 삶을 받아들이고 소유했냐는데에 있다.


어차피 이 세상이 모두 거짓이라 할지라도 나 스스로를 증명해줄 사람은 나 뿐이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의 눈으로 남을 보며 부러워하고 나를 비하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도 내가 아니고 나는 감정을 느끼는 상황일 뿐이기 때문에, 모든게 거짓이라고 할수있지만.


다만 내 자신은 나 스스로가 존재하고 살아있고 의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수있다. 그것은 오로지 나만이 할수있다.


그것이 바로 한번 사는 삶의 숙명이며 과업인것이다.


그럴 준비가 스스로 안되있다면 느끼는 동안 고통스럽고 시간만 아까울 뿐. 그 자리에서 죽는게 낫다.


그리고 삶에서 모든 결과와 우열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것은,


이 세상에서 나라는 사람 하나만이 할수있었던 나만이 소유할수있는 고유의 증명의 과업과 숙명을 포기하는것이다.



고승덕이 단국대에서 강연을 한적이있는데.


대한민국에서 최극고난이도의 3대 고시를 모두 대학재학시절 4년안에 패스한 3관왕으로 유명한 사람답게, 자기 공부일화에 대한 내용이 주된 것이다.




위 단국대 강연 영상에서 10분에 고변이 고2 시절에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나오는데.


이 때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던 고변은 반에서 수학점수 꼴찌를 한 성적표를 집에 가져다주고, 이미 인생에서 자살을 결심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아직 졸업까지 약 2년정도의 시간이 남았는데, 이 때 동안 전력을 다하고, 안되면 그때가서 자살하도 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으로 다시금 공부라는 테마에 마음을 다잡고 도전했다고 한다.


남들은 허상에 빠진 나이, 고등학생시절,

고2때 자살이라는 각오를 하고 진행한 계획에서, 그 진실하고 처절했던 감정은 결국에 역량으로 증명된다.


그런것이다. 이런 심각함 비참함 슬픔에 기반함 결심이 바로 행동력과 몰입의 가장 확실한 첫발이다.





아,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긍정적이에요 !




소위 많은 자기개발서적이나 다큐멘터리 티비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라고 하지만,


이는 실질적인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것이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라고 권유를 하는 말은 그 가능성이 막다른 벽처럼 보여도 비집고 들어갈 곳이 있다라고 포기하지 말라는 메세지이지,


또한 부정적인 심각한 현 상황을 아예 직시도 하지 말고 긍정적인 면만 보면서 방만하라는 메세지가 아니다.





실제로는 이런 슬픔, 비참함, 심각함, 죄의식에서 기반한 낮은 분위기의 감정들이 오래 가며 결국에 그 끝을 보는 근원이다.


자신감, 용기, 열정, 이따위 잠시만 겉보기용으로 좋고 듣기 좋은 추상적이고 위선적인 쓰레기 함정같은 감정들이 아니란 말이다.



또한 이런 정말 low한 감정은, 그것을 어떻게 태동시키냐보다도, 어떻게 유지 시키냐에 달려있다.


슬프다 심각하다 위기다 급박하다 등의 정말 숨죄여오면서도 압박감을 느끼는 감정은 정말 소중하다.



사람이 태어나서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쉽지만, 반대로 행복한일 좋은 일 따뜻한 일 웃을일이 아예 없는것도 아니다.


또 한번 마음먹은 일이 매듭도 지어질때도 있고.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유지의 문제지.


사람이 한번 만들게 되면 자신감도 생기지만, 태초의 그 처절함과 심각한 감정의 동력을 잃어버린다.



고양감과 자신감, 용기로만 일을 이끌어 나갈수는 없다. 그래서 슬픔이나 비참함 처절함 이러한 감정들은 시간이 갈수록 소중해지게 된다.


그럴때면 태초의 결심을 다시금 상기시켜야 한다.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중간은 고양감이 될수 있고, 몰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은 자랑스러울수있다. 그토록 꾸준히 바라던 성공일수있다.


그러나 첫발의 첫단추는 비참함의 되새김이고, 슬픔의 잔존이며, 심각함과 급박함으로 움직이는 행동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성취가 겹겹히 쌓일수록 쉽사리 없어지는 감정은 사실 그저 과거의 잠시뿐이었던 불행한 단편인것만 같아도,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행동기제이자 소중한 재료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성공의 성취도가 높다한들 슬픔이나 절망 심각함 등의 감정이 행동의 가장 강력한 촉발기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다르게 얘기해서,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한 고찰을 떠나,



모든 일의 성취는 철저히 그 일을 진행하고 담당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정말로 솔직하고 진실했느냐에 달려있다.


1. 이론을 앞세워서 스스로 의기양양하게 느끼는 새끼도, 결국에 이론의 가벼운 허울만 믿고 자기고양감의 재료로 삼을뿐, 실제 성취의 과중함을 무시하고 스스로 잘난것만 광고하고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소인배다.

2. 성공한 사람들은 긍정적이다 따위 긍정론을 듣는 놈도, 순전히 방만하고 태만하기 위한 구실에만 긍정하며 행동은 뒷전이고 결국에 자기 편하겠다는 심보다.

3. 비참함과 심각함을 강조하는 사람들 와중에 ,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 보다 오로지 남 앞에서만 비참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공짜 도움을 받는등의 요행을 바랄뿐, 절대로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남이 얹어주는 허울에서 가짜 인생을 살고싶어할뿐이다.


대개 스스로가 결심을 했다고 믿는 이는 모두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서 영웅이나 위기를 극복한 자수성가의 인물로부터 영감을 얻어 어설프게 따라하지만,

현실은 그런 평균적인 사람을 위해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기 위한 드라마 따위와는 달라서,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 스스로에게 진실된 사람에게만 성취라는 열매를 준다.


결국에 무엇을 결심한 순간 몇년 몇십년에 걸쳐서 그 결심을 곱씹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수 있느냐의 문제다.






네줄요약

1. 일의 성취에 있어서 실제 성취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만화나 영화보다 훨씬 더 끈적끈적하고 복잡한 과정이 몇년 혹은 수십년에 걸쳐서 일어난다.  

2. 긍정적인 의지를 표상하는 열정, 자신감, 노력, 믿음 등의 감정은 추상적이고 쓸모없는 쓰레기중에 개쓰레기이다. 개인이 긴 시간동안 온전히 이끌고 가기에 전혀 맞지않는 감정들이다.

3. 모든 일의 진행에 있어서, 그 첫발의 시작은 비참함, 절망감에 있고, 이와같은 감정을 남에게 하소연하는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에게 돌릴때 진정한 일이 시작된다.

4. 한번 성취를 맛본 사람은 비참함과 슬픔의 감정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기 쉽다. 고양된 자존감과 과시욕을 버리고 우울하고 낮은 종류의 감정들을 소중히 하고 유지해야 더 높은곳에 갈수있다